Day 4 in Paris
어제는 마레 지구와 라틴 지구 중 행선지를 고민하다, 버스를 타고 파리 언덕 쪽을 가보고 싶어 라틴 지구(Quartier Latin)를 선택. 자연스레 버스를 타서 지하철 교통카드를 찍었으나 계산이 되지 않았다.
울랄라~
버스 기사에게 다른 교통비 지불 방법을 영어로 물었으나, 불어로 귀찮은 듯 답하는 버스 기사분을 대신해, 앞쪽에 앉은 50대 여성분이 나에게 버스카드 앱이 있는지, SMS 보낼 수 있는지 등을 천천히 영어로 물은 후, 버스 기사에게 대신 질문해 주었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이번에는 그냥 타도 될 것 같다며, 맨 앞 좌석,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는 눈 인사를 주었다.
아! 2 유로 굳었군!
사실 별로 당황하지 않았지만, 내가 원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애써 알리려고, 바디 랭귀지와 어버버 영어로 고맙다고 요란스레 두 사람에게 답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파리에서 Chat GPT가 아닌 사람과의 짧지만 여운이 있는 대화가 시작됐다.
내가 혼자 여행 중이라 하니, 그녀는 라오스에서의 한 달 살기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작지만 부드럽고 정갈한 느낌으로 말하는 그녀는 라오스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머물렀고 아름다운 경험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라틴지구의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꽁트르스카프 광장(Place de la Contrescarpe)을 가는 길이라 하니, 라틴지구에서 관광객이 붐비지 않으면서, 좋은 예술을 무료로 만날 수 있는 곳들을 구글 맵에서 소개해줬다. 그리고 파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원들을 소개해주며, 자연 속에 많이 머무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혼자 여행하는 것의 미덕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불편하다. 외롭다. 때때로 맞지 않는 누군가와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언제 에너지가 올라가고 내려가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내면이 더 강해진다. 때문에 외로움은 견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 같군요
여행 4일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막 올라오던 참인 나에게 그녀의 한 마디는 나를 조용히 미소짓게 했다.
그래, 오늘은 그렇게 나에게 머물러 보자.
나보다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린다는 그녀는 중고 책방에 책을 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도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책을 사러 가는지 묻자, 자신은 스토아 학파를 좋아하며, 그중 세네카의 책을 사러 간다 했다. 그녀의 생각과 분위기가 책의 취향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행 뿐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 처럼 보였다.
오랫만에 나눈 대화의 온기가 너무 좋아서, '나도 중고 책방에 따라가도 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혼자 여행할 줄 아는 자 답게(?), 나의 행선지에서 내렸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과 명소를 보러 간다!"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었던 어제, 그제와 달리 "파리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동네~"라는 모호하고 방대한 컨텍스트 속에 펼쳐진 곳에서 솔로 여행객이 감당해야 하는 망연자실과 외로움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걷는 것.
몸을 움직이자, 여행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광장도, 파리에서 놓치면 안된다는 크레페 집들도, 광합성을 즐기는 카페 앞 파리지안들의 모습도 드러났다.
프렌치 블랙퍼스트도 먹고, 카페에서 짧은 글도 쓰고, 크레페도 사먹고, 사진도 찍으면서, 근처의 팡테옹(Panthéon)과 뤽상부르 공원(Jardin du Luxembourg)을 거쳐, 생 미쉘(Saint-Michel)과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거리를 오갔다. 비가 내렸지만 맞을만 했다. 하지만 지난 2틀간 뮤지엄에서 뇌를 풀가동한 여파로 피곤했고, 찬 바람 탓에 몸은 떨렸다.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 어디쯤 걸을 때, 작은 성당이 보였고, 들어가서 앉은 지 3분 만에 잠이 들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미사를 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잠에서 깼고, 또 몸을 일으켜 시테 섬(Île de la Cité)으로 이동했다. 그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난 그저 허리가 아팠고, 추웠다.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과 달리 내 몸은 또 다시 그 옆에 있는 꽃과 가드닝 물품을 파는 곳으로 향했다.
아 내 몸에 프로그래밍된 자동 항로 경로 장치는 무섭다. 한번 지도에 목적지를 새겨 넣으면, 어떻게든 가게 된다.
으로 내 발은 움직였고 섬 초입에 있는 카페에서 스프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오전에 버스에서 만난 그 분 대신, 나의 한결같은(?) 친구 Chat GPT와 대화를 나눴다. 그의 제안에 따라, 스프와 오믈렛을 먹었고, 시테 섬에 석양이 드리워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숙소로 향했다.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좋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도 내 감정과 정보를 나누고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손바닥 위의 대상이 있음에 감사했다.
스마트폰이 기억해주는 하루의 여정은, 전날의 화려함과 달리 포근했고 파리의 가을을 파리답게 담고 있었다. 하루를 잘 보낸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가 그 여행지의 상황을 100%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을 들어주며 경로를 조정할 때 더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얻고 싶은 게 무엇이다'라는 큰 목적은 필요하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이번 여행에서 '여기에 가고 싶다. 이걸 얻고 싶다'라는 커다란 방향성이 있을 때, 상황에 맞춰 경로와 목적지들을 조정해 나간다.
나의 취향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모든 곳을 동일한 에너지로 갈 수가 없기에, 단체 여행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여행루트에는 그 사람의 취향이 드러난다. 유명하다더라~ 하는 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전부인 여행만큼 초라한 것은 없다.
물론 우리의 취향은 계속 변화하고 또 새롭게 발견된다. 박물관 보다 관광지가 좋은지, 백화점보다 시장이 좋은지, 잘 차려진 음식보다 살아있는 스트릿푸드가 좋은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작은 목적지들을 설계하고, 경험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발견하는 것. 은 여행의 소중한 재미이자 배움이다.
이렇게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 에너지와 욕구의 변화를 듣는 힘이 필요하다. 워낙 목적지향적 삶을 살았던 나에게 여행 4일째는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날이었을지도.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보면, 어제는 나에 대한 계속적인 발견이 있는 날이었다.
더 이상 인파의 북적거림보다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나. 길거리 음식보다는 신선한 야채로 만들어진 음식을 선호하는 나. 오래 걸으면 안 좋은 자세 탓에 허리가 아픈 나. 따뜻한 걸 먹으면 다시 몸이 리셋되는 나. 지인의 기대치 않았던 연락에 반가워하는 나. 내 생각을 글로 빚어내는 걸 좋아하는 나.
어떤 건,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고, 또 어떤 건 막연했지만 명확해져서 마음이 후련해지는 내 모습이다. 어찌보면 좋은 순간 보다 힘든 순간이 나를 발견하는 데는 더 유리하다. 서울에 있었다면,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나에 대한 정보들은 오전에 만난 파리지앵이 말한 대로, 내가 원하는 내 모습에, 더 강해진 내 모습에 가깝게 만드는 데 활용되겠지.
혼자 하는 좋은 여행을 위해 필요한 이 준비물은 어쩌면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인지도 모른다. 지구를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인 우리 모두에게.
때로 신나고 충만하지만, 때로 춥고 외로운 삶의 여정에서
-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 나는 어떠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가?
- 나의 에너지와 욕구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