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in Netherland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면 좋겠는가?란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20대라고 답했다.
그 때 내가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달라져 있었을 거라고.
20대에, 나는 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아마도 1999년) 호주에 몇 주 정도 머무를 생각으로, 비행기 표 외에 100만원을 준비해 갔었는데, 우연히 알게된 호스텔 친구들로부터 브리스번으로 가면, 워킹비자를 위조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나는 브리스번으로 가서, 사과 농장에서 사과를 따고 포장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3주 정도 사과 농장에서 일하고 나니, 그 돈이 꽤 되서 이후 2개월 정도를 호주에서 머물고 돌아갔다.
사실, 사과 농장 주인은 내 비자가 위조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성실히 일하는 걸 알고 눈을 감아준 셈이었다. 내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농장 부부는 자신들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 발급을 도와줄 수 있으니, 여기서 일하면서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다른 한국인들이 그렇듯, 일을 찾아서 잘 했고, 끝나고 뒷정리도 깔끔히 마쳤으니까.
나 역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와서 어학연수를 하고 가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를 앞으로 얼마나 쓰겠어, 여행할 정도면 되지'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후 커리어를 이어가며, 어설픈 내 영어실력은 계속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확장해 나가는 데 발목을 잡았다. 글로벌 언어인 영어는 양질의 네트워크와 개방성, 확장성을 갖는데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그 때는 그걸 알지 못했다. 영어의 중요성을 알았을 때는 이미 30대가 훌쩍 넘어서였고, 영어에 올인할 수 있는 타이밍은 다시 오지 않았다.
개인의 삶도 타이밍이 중요하듯, 한 국가의 운명도 타이밍이 결정한다. 역사에 IF는 없다고 하지만, 만약 조선왕조가 500년이 아니라 400년 만에, 즉 정조가 승하한 1800년 즈음에 막을 내리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면 어땠을까?
세도정치의 암흑기가 시작되기 전, 서양의 배들이 문을 두드릴 때 네덜란드에서 온 하멜 같은 이들을 억류하는 대신, 서양의 앞선 과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들을 무역 파트너로 삼아 실력을 키웠다면? 당시 꿈틀거리던 실학의 천재들인 정약용이나 박지원 등에게 기회를 주어 조선이 일본보다 먼저, 혹은 비슷하게라도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일본에게 그렇게 허망하게 무릎 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여행 4일째. 델프트와 헤이그의 낭만을 기대하고 왔다가, 분무기로 뿌리듯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 뜻밖에 아픈 '조선'을 만났다. 바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평화 박물관'이다. 이곳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이준 열사가 숨을 거둔 '드 용 호텔(Hotel De Jong)' 건물이다. 당시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분이 머물렀던 그곳을, 한 한국인 부부가 사재를 털어 매입해 박물관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 했던 이유는, '을사늑약' 때문이었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이 조약의 핵심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즉, 한국은 더 이상 국제 사회에서 자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손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이 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가 모이는 평화 회의장에 특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로 그들은 회의장 문턱조차 넘지 못했고, 이준 열사는 울분을 삼키며 이곳에서 순국했다.
박물관에 걸린 그들의 상소문이 가슴을 찌른다. "대저 그 조약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그 먼 곳까지 조국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 떠난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고종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서양 오랑캐를 이용해 일본이라는 오랑캐를 제압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힘없는 나라의 슬픈 '희망 회로'에 불과했다. 그가 믿었던 강대국들은 이미 뒤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서로의 이익을 챙긴 뒤였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에 밝았고 외교의 중요성을 알았던 고종이었지만, 냉혹한 힘의 논리 앞에서 '타이밍을 놓친 나라'의 외교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박물관은 독립운동가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방문객 방명록에는 "한국인이라서 자랑스럽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넘쳐난다.
하지만 삐딱한 나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서 오히려 화가 났다.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혔던 조선의 '순진함'과 '무능함' 때문에.
좋은 마음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도덕이나 명분에 갇히지 않고, 냉정하게 판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의도에 맞는 치밀한 전략을 강구하고, 끊임없이 실력을 키워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하지만 조선은 정조 이후 그런 리더를 만나지 못했다. 부패를 가리기 좋은 '유교적 명분'의 그늘 아래서 시스템은 썩어갔고, 결국 그 대가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치러야 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한국에게 '외교'는 여전히 생존의 문제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대통령만의 숙제는 아닐 것이다.
나의 20대 호주 생활이 그랬듯, 우리는 누구나 '내 인생'이라는 나라의 리더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외교는 필수적이다. 막연한 선의나 "잘 되겠지"라는 희망 회로 대신,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나를 지지해 줄 키맨(Key-man)을 만드는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그 관계를 지탱할 '나의 주체적 실력'이 필요하다.
고종의 실패가 뼈아픈 건, 그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나라를 지킬 '힘'을 기를 타이밍을 놓치고 타인의 선의에만 기댔기 때문이다.
돌아보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나의 20대는 영어라는 무기를 놓쳤고, 조선은 근대화라는 무기를 놓쳤다. 하지만 늦었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준 열사가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운명"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곳까지 날아왔듯이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내 능력에서 놓친 것과 관계 속에서 놓친 것을 냉정하게 복기해보고 싶다. 좋은 의도가 좋은 전략을 만나, 결국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내 인생의 다음 타이밍은 놓치지 않겠다고, 비 젖은 헤이그의 거리에서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기차를 타고오며 다짐해 본다.
이제 여행도 절반을 넘어선다. 돌아오기 위해 정리가 필요한 생각들이 하나 둘식 머리 속을 채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