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프트에서, 관계 면역력을 생각하다.

여행 10일 차,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에 대하여

1.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귀찮다


어제는 암스테르담에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델프트헤이그를 걸었다.

잔잔한 물길을 따라 늘어선 그림같은 레스토랑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웃고 있었고 따뜻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대부분 두 사람이 거닐고 있다. 문득 혼자 하는 여행자가 와서는 안 될 곳에 왔다는, 별 볼일 없는 생각과 외로움이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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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아기자기한 상점과 거리들로 가득한 델프트. 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문득 쇼펜하우어가 떠올랐다.


작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독서 모임을 진행하면서 염세주의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는 누구보다 삶한 의지가 강했고, '넘치는 것 보다 부족한 것이 낫다는 지혜'를 가진 철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교에 영향을 받은 그는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에 비유했다The Pendulum of Life).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욕망하지만, 막상 그것이 충족되면, 권태에 빠져 버리고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 된다고 말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추우면 붙어 있고 싶고, 붙어 있으면 가시에 찔려 아픈 고슴도치처럼, 우린 외로움을 느끼지만 막상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되면 서로가 가진 다른 욕구 때문에 권태를 느낀다. 그래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함께 있을 때 타인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필요한 관계를 만들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틀 전 시티 투어에서, 비를 맞고 다니는 나에게 우산을 건네 준 말레이시아에서 온 수이(?)와의 점심이 떠올랐다. 아시아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동질감을 느껴 함께 점심을 먹게 됐지만, 메뉴를 조정하고 이후 동선을 맞춰 보면서 서로가 참 다르구나,는 사실을 느껴 결국 바로 헤어지지 않았던가.



"인간은 외로울 때 제일 제정신인 것 같아."

스크린샷 2025-11-17 053828.png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서로를 채워준 미정이와 구씨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미정이 관계에 대해서 한 명대사에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묻어있다.


그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또 동시에 사람에게 부대끼는 피로를 떠올리는 걸 보면, 역시 관계란 참 어렵다.

우린 혼자 설 수 없고, 타인에게 의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니까. 하지만 동시에 서로의 기대가 달라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욕구를 무시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

'사람이 내 맘같지 않다...',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회사를 떠난다'


이 흔한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관계에 의지하고 실망하기를 거듭하는 지를 보여준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하며, 많은 상처를 의도치 않게 주고 받았다. 내가 좋은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혼자 있는 힘을 기르자라고 생각하게 된 배경도 그렇다.


결국 핵심은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관계의 핵심은 외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허함을 타인을 통해 채우려 할 때, 우리는 쉽게 더 공허해진다. 혼자 나에게 결핍된 부분, 가고 싶은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주며 중심을 잡을 때, 상대를 채울 힘도 생긴다. 미정이가 말한 '추앙'은, 역설적으로 혼자 설 수 있는 사람끼리만 가능하다.


'관계 면역력'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힘을 이렇게 이름을 지어본적 있다.


감기에 대한 면역력이 높은 사람은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려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관계 면역력이 높은 사람은 아무리 다양한 사람들 속에 휩싸여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사람과 상황을 예측하고 멘탈을 관리하며, 관계를 레버리지해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면역력은 관계 면역력이 아닐까. 라고,


2. 관계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Me-Time


"Carrie님은 참 잘 웃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난 내가 웃었는지도 모르는데, 자동반사적으로 내 광대뼈의 근육과 살, 입꼬리의 훌륭한 협업으로 그렇게 그렇게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사회적 미소'를 갖게 됐다.


이 능력은 내가 코칭이나 워크숍에서 사람들을 만나, 공감할 때 십분 활용된다. 하지만, 이렇게 내 얼굴 근육들이 과로한 날은, 혼자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관계 면역력'이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신체의 면역력이 그렇듯이, 밸런스가 깨지면 문제가 생긴다.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시간만큼, 오롯이 나의 감정과 생각에 머무르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 균형이 깨지면 혼자 있을 때 불안하고, 함께 있을 때 소진된다.


내가 이번 혼자만의 여행을 결심한 이유도 이 '면역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회적 역할과 관계의 거미줄을 잠시 걷어내고, 낯선 곳에 나를 떨어뜨려 놓는 것. 내 몸과 머리가 보내는 신호에만 집중하며 나라는 사람의 지도를 재구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각자도생의 시대, 나를 온전히 채워줄 타인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타인의 요구에 나를 맞추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기적으로 'Me-Time'이라는 백신을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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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운하를 따라 스프레이처럼 뿌리는 비를 맞으며 혼자 추적추적... 외롭지만 또 그래서 운치있지 않은가.


3. AI는 우리의 관계 스트레스를 구해줄까?


이번 여행은 엄밀히 말해 '완벽한 혼자'는 아니다. 내 오른손에는 언제나 두 개의 AI(ChatGPT, Gemini)가 들려 있으니까.


AI는 내가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려준다. 때로는 뻔한 답을 하거나 엉뚱한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인간 친구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정보를 연결한다. 심지어 "캐리, 지금은 관광할 때가 아니라 열차표를 예매할 때야"라며 나의 지난 대화를 기억해 잔소리까지 해준다.

앞으로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코칭이나 퍼실리테이션 영역에서도 AI와의 협업은 필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 냄새나는 관계'의 가치는 올라갈 것이다. 지금 기차 건너편에 앉아 친구들과 대화 나누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내가 그 근거다. 감정과 욕구의 덩어리인 나는 '기능적인 대화' 말고 나의 비언어적인 눈빛을 읽어주고, 내 말실수를 유머로 받아쳐주며, 굳이 효율적이지 않아도 함께 시간을 낭비해 주는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AI가 아무리 좋은 대답을 해도, 'AI라 뭐라는지 알아?'라고 인간친구와 확인하고 비생산적으로 깔깔거리고 싶다.


때문에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는 더 올라갈 것이다. 대화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 보다는 AI와의 대화가 훨씬 좋을 테니까. 동시에 관계 스트레스는 더 올라갈 지도 모른다. 사람친구와 정말 대화하고 싶은데, 내 대화 수준으로는 날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AI 시대에 우리는 '따로 또 같이'의 관계를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혼자서 AI와도 잘 지내고, 함께 좋은 대화도 나눌 수 있는 레고블럭 같은 사람. .그러려면 밖에서만 채우려 해서는 안된다. 혼자 추앙할 수 있어야 한다.


KakaoTalk_20251117_045644150_01.jpg 1800년대 시청과 신교회를 보존하고 있는 델프트 광장 뒷편에 현대 예술가의 '블루 하트' 작품이 있다. 두 가지 다른 문화를 교차시키면서 역동과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더치인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싫어하는 것, 기쁘게 하는 것에 집중해서, 관계 면역력을 꽉 채워 돌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서울 생활로 돌아갔을 때는 내 개인적 일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공감하며 확장하는 내가 될 수 있기를. 필요하다면 주기적으로 백신을 맞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한 '레고 블럭 같은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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