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상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내 삶은 열어보기 힘든 상자 같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에서 상연이가 끝자락에 했던 독백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단짝이었지만, 서로가 가진 장점을 부러워하고 또 질투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은중(배우 김고은) 편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모와 탁월함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신 보다 은중을 더 좋아하는 엄마와 남자친구로 인해 늘 열패감을 느끼고 은중의 뒷통수를 치던 그녀. 그녀가 암 말기 선고를 받고 은중을 찾아 사과하고 머물러 달라 사정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상연(배우 박지현) 편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결핍감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을 거다. 엄마 사랑을 받지 못한다 느꼈고, 누구와도 공유하기 힘든 가족사가 있으며, 대학 때 집이 쫄딱 망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는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회사로 걸려오는 아빠 카드 독촉 전화가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었고, '누가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같은류의 질문으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래서 이십 대 별명 중 하나가 '씨니 걸'. 엄마가 도시락을 맛있게 싸줬을 것 같은, 원래도 앞으로도 행복했을 것 같은 애들을 보면, 항상 씨니컬했다. 열등감이었고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뾰족했던 내가, 지금 제법 둥글고 낙관적인 사람이 된 데에는 상연과 다른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남편의 보수적인 성향으로 이혼을 하지 못했다. 이혼 서류도 작성하고 많이 노력지만, 한 쪽의 동의가 없다 보니 계속 살게 됐고, '이 사람은 떠나지 않는구나'라는, 안전벨트 같은 안전감이 생겼다. 둘째,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엄마같은 딸을 낳았다. 아이에게 내가 가진 불안과 결핍을 물려주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그 자체로 삶에 보상이 된다. 셋째, 나를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바라보는 소설같은 자서전을 썼다. '아 내가 참 안스럽구나'라는 자기연민, '내가 나를 이렇게 불쌍하게 보고 있었구나.'라는 자기 객관화, 그리고, 그렇게 원망했던 엄마 아빠가 나에게 줬던 사랑과, 내 삶의 은인들을 만난 행운들이 드러나면서, '불쌍한 송지현'에서 '용기있는 송지현'으로 내가 바라보는 내 스토리가 바뀌니까, 내 삶도 바뀌어갔다. 사실 세 번째 내 삶의 스토리가 바뀌고 나니, 가족과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보는게 맞다.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과정 중 하나로 참여한 내 삶의 자서전. 내 삶은 자서전을 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스토리텔링과 리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은 이유다. 그리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앞으로의 내 삶의 스토리를 위해, 40대 이후는 그 어느 때 보다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미래의 목적이 현재와 과거의 의미를 결정한다.
- 개인심리학 by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청소년기 이후부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을 알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개인적인 신화(Personal Myth)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 신화, 즉 삶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것이 곧 자아(Self)를 이해하는 것이다.
- 내러티브 정체성 by 댄 맥아담스(Dan P. McAdams)-


나의 스토리텔링의 힘에 대한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존경하고 또 고마운 심리학자와 철학자들은 말한다. '트라우마 따위 별거 아니야, 너를 이해하고 진짜 간절한 삶의 목적이 있으면 돼!'라고.


국립 초상화 박물관


런던의 중심가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과 피카딜리 써커스(Piccadilly Circus) 지역을 지나가다, 발견한 뮤지엄. The National Portrait Museum.


이 박물관의 전시 모토는 'Artist First'. 영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들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그렸다.

그리스의 여신 아테네에게 투구와 뱀이 있고, 제우스에서 번개와 창이 있듯이, 이름을 남긴 자들의 초상화에는 그들만의 아이템이 함께 그려진다. 관람객들은 그들의 초상화 앞에 서서,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며 그들의 삶이 남긴 이야기를 이야기 한다.


모든 삶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여행을 와서 참 많은 박물관을 다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유럽의 강국, 프랑스와 영국의 국립박물관에 기록된 모든 작품들은 '우리는 이런 나라야'라는 자신들이 편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는 위대한 이야기를, 때로는 잊혀져서는 안되는 소중한 이야기를.

그 이야기는 몇 퍼센트의 객관성을 담보할까?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보다 어떤 이야기를 왜 남기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플롯은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사 박물관 앞의 전경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 걸린 18세기 Gay 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1997년에 재현해 그린 그림이다. 소수자의 이야기지만, 영국의 국립 박물관에 걸려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어떤 광물도 모양과 크기가 동일하지 않다.

Crystals of the same mineral are never identical in shape or size because their growth conditions vary. The overall shape of crystals is known as their habit. Some minerals have a single characteristic habit, such as garnet which is usually twelve-sided. Others show a great variety of habits.

오늘 자연사 박물관에서 발견한 광물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소개 문구다. 지구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인 광물들도 각자의 상황을 다르게 인지하고 반응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내 초상화는 어떤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

과거의 이야기 말고, 마지막에 관뚜껑 닫히고 난 이후의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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