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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급한 나무늘보 Dec 30. 2021

다 시들어서 떨어지기 직전의 꽃 같았던

- 2021년을 떠나보내며


 한 해를 돌아봤다. 한 해를 돌아봤던 연말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올해 목표는 ‘평안할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평안의 ‘ㅍ’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친년이라도 된 듯 아이들한테 소리도 치고 미안하다고 울고 돌아서서 또 빼애액거렸으며 모든 걸 포기한 인간처럼 누워있었다. 뭐, 부끄럽게도 현재진행형이다.     


 2019년 누워서 울기만 하던 둘째가 일어나서 걷고 뛰며 이젠 “엄마 미워!”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기까지, 말로 충분히 설득이 되던 첫째가 이젠 동생과 소유권 다툼을 하고 엄마아빠의 말꼬리를 잡고 어마어마한 감정기복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나는 늘 아이들과 붙어있었다. 코로나가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와 가정보육을 반복하면서 아이들도 마냥 즐겁진 않았겠지만 나 역시 더 더 더 더 쭈우우욱 짜내는 물걸레처럼 쥐어짜였다. 어느 순간에는 확진자 수가 2,000명, 4,000명 넘어가더라도 부득불 일이 있는 엄마처럼 눈을 딱 감고 어린이집에 보냈다. 저 숫자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뉴스도 보지 않았다. 식당에서 밥만 한번 먹으려 해도 바짝 앉은 옆 테이블 사람이 불편해 괜히 나왔나 속으로 욕을 천 번쯤 하는데 사람들은 어딜 가나 북적였다. 마치 나 혼자 코로나라는 허구의 귀신을 만들고 무서워하는 정신병자 같았다. 그래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면 고작 한 끼인데 쏟아지는 플라스틱 더미들에 치였다. 이 쓰레기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모르는 사이 점점 엄마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아내가 되는 것도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오늘도 재미없고 내일도 당연히 재미없을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눈을 뜨면 뭘 먹여야 할지, 뭘 하고 놀아줘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게 너무 지긋지긋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바쁜 부서에 매몰되어 밤이 늦어서야 들어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점점 잠이 줄어 이제는 아빠가 오는 시간에야 겨우 잠에 든다.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와서 말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고. 사직서를 내려던 거를 말리고 모두가 휴직을 권하고 있다고. 그 동료가 우울증의 여러 증후를 말해주었는데, 자기도 그런 것 같다고. 내일이 기대되지 않고, 그냥 ‘아 이렇게 언제 죽어도 상관없겠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육아우울증이 오면 주변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친정이고 시댁이고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었다. 그냥 우리에게는 어린이집이 전부였다. 어린이집이 없었으면…그건 너무나도 지구 종말과도 같은 이야기다. 선생님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들이 구세주고,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애들을 보내고 집에 있으면 망할 죄책감과 자책으로 잡념에 빠졌다. 팟캐스트에서 <김이나의 밤편지> 금요일 코너인 ‘깨끗하고 어두운 곳’을 죄다 찾아 듣거나, 유투브에서 온갖 정신과 육아 관련 동영상을 찾아봤다. 시간을 때우고 있는 건지, 버리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살았다. 생각이란 걸 하면 자꾸만 병이 들 것 같아서. 정신과에 가서 항우울제를 처방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우울증은 아닌가 싶어서 관뒀다. 내가 우울하다는 걸 느끼는 건 그냥 우울하고 싶은 도피인 건 아닐까 싶어서.     


 주말이 되면 목적지도 없이 무조건 차를 탔다. 정말 아무 데나 갔다. 올 한 해 남편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렇게 죽으나, 코로나 걸려서 죽으나’였다. 그 말은 코로나 정신병자인 내게 묘하게 힘이 되었다. 사실 힘이 됐다기보다는 ‘그래, 걸리면 오빠 탓!’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집 근처 쇼핑몰을 가장 많이 떠돌았고-정말 말 그대로다-되도록 멀리 가서 잠깐 놀고 다시 차 타고 돌아오는, 그러니까 차 안에서 애들을 재우는 시간이 많았다.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아 남편은 차라리 운전을 택했구나.


 감사한 건지 불행한 건지, 습관처럼 감사히 오늘도 숨을 쉬고 있으니 어쨌든 살아지겠지만 건강하지 않은 나와 이제 그만 이별하고 싶다.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건 불과 며칠 전이다. 저녁 차리고, 설거지옥 거치고 나면 양치와 목욕 콤보 고행을 마치 미션 클리어하듯 표정 없이 해오던 여느 주말 밤, 목욕을 마친 둘째가 맨몸으로 남편에게 꼭 안겨 거실로 나오는데,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은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했다. 순간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미션 클리어에만 몰두해 아가들의 그 얼굴을 놓쳐왔던 걸까 싶었다.      


 곧 여섯 살이 되는 첫째에게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네가 원하는 것만 먹을 수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순 없어.’ 따위인데, 정작 그 말은 내가 들어야만 했던 말이었을까. 하기 싫어 죽겠는 일을 발령을 안 내줘서 계속 하게 한다고 잔뜩 불어터져서는 일도 엉망, 삶도 엉망이었던 몇 년 전의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지금도 똑같다.


 그래. 나는 어쩌면 나의 민낯, 나의 어두운 곳을 속속들이 비춰가며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이 육아라는 덫이 너무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너무 무섭고 두렵다. 나도 덜 된 내가 아직 싫고, 어디까지 덜 됐는지도 채 모르는데 누군가를 ‘독립된 인격의 한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니.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며칠 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좀 웃어. 다 시들어서 곧 떨어져버릴 꽃 같이 있지 말고. 내가 웃게 해 줄게.” 다 시들어서 곧 떨어져버릴 것 같다니. 그 표현이 너무 웃기면서도 아파서 한참을 생각했다. 아아, 올해 평안하자고 마음먹었던 사람은 결국 시들어버렸구나. 비록 올해는 실패했지만, 내년에는 남편 말대로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제는 20대의 팽팽한 피부도 아니라 내가 자주 짓는 표정으로 굳어갈 테니까 더욱 조심해야지. 그리고 나도 남편이 어떤 택배를 시켜서 집 앞에 한가득 쌓이더라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해본다.


 정말, 정말 힘든 한 해였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잘 버텼다. 이제는 좀 웃어보자. 쉽지 않겠지만. 올해 시든 꽃은 내년에 어떻게 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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