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위태로운 순수
순수하다는 것은 분명 큰 장점이다. 상대방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내 마음 역시 투명하게 드러내보인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에는 대개 순진함이 따라오곤 한다. 크게 의심을 갖지 않고, 타인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순진함.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순수함에 주목하기보단, 순진함만을 바라보고, 그 점을 이용한다. 그렇게 투명하던 유리에 실금이 생기고, 종국에는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영화 "유리정원" 의 제목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숲 속의 유리정원은 한 번도 자신을 감추거나 숨긴 적이 없다. 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정원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재단한다. 오로지 그들의 시선만으로 말이다. 그렇게 흔들리던 유리정원은 깨져 버리고, 뒤늦게 찾아온 이의 후회만이 그 터에 외로이 남는다.
주인공 재연은 12살의 순수를 간직한 인물이다. 그녀는 한쪽 다리의 성장이 열두 살에서 멈추었고, 그녀의 마음 역시 열두 살에서 멈춘 듯하다. 깊은 이야기들을 툭툭 던지는 직선적인 화법, 산학협력 포럼에서 순수과학에 가까운 아이템을 발표하는 그녀의 모습은 순수하기 그지없다. 특히 나무에 기대어 나무의 말이 들린다 말하는 모습은 아릿하게 사랑스러울 정도로 해맑다. 또한 모든 것들이 끝났다 싶은 뒤에도, 그녀는 순수하게 그녀의 연구에 매달린다.
그녀가 바랐던 것은 세상의 찬사를 받는다거나, 노벨상을 탄다거나 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저는 자신과 보폭을 맞춰 줄 사람, 치마를 입었을 때 그녀의 왜소한 한쪽 다리를 바라보기보단 그녀의 눈을 마주보는 사람을 원할 뿐이었다. 자신의 순수를 알아주기를, 투명한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봐 주기를 바랬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각자의 색안경을 쓴 채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믿곤 하니깐.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 지훈은 어딘가 재연과 많이 닮아 있는 남자다.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도, 표절과 관련된 아픔도, 신체적 장애를 겪고 있는 것까지도 지훈은 재연과 유사한 인물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훈은 완벽히 순수하지는 않다는 점이랄까. 돈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좇기도 하고, 집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고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역시 글쟁이라는 자신의 천명에 있어서는 순수함을 추구한다.
이토록 비슷한 둘이 서로 교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비록 세상의 기준에선 다소 어긋난 방식이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인지하고, 공감한다. 자신의 연구를 빼앗긴 재연은 표절이나 하는 작가가 무슨 대가냐면서 소리치는 지훈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지훈은 한쪽 다리를 저는 재연에 이끌린다. 그렇게 그 둘은 대화 한 마디 없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투명한 스스로를 내비친다. 영화 소개처럼, 동물적 욕망의 세계에서 나무와 같은 삶을 사는 재연에게 지훈은 보폭을 맞춘다. 그리고 재연은 그런 지훈에게 스스로를 보여 준다.
*해당 부분부터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의 절정은 둘의 관계가 역전됨으로써 나타난다. 그녀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갈구하던 지훈에게, 재연이 글을 끝마쳐 달라고 애원할 때, 그녀의 삶을 훔쳐보고 비틀어 글을 쓰던 지훈의 이야기가 '진짜' 그녀의 삶이 될 때,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뒤집힌다. 그리고 그 역전의 순간에서 지훈은 갈등한다. 처음으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훈은 나무와 같은 재연의 삶과 스스로의 동물적 욕망 사이에서 고뇌에 빠진다. 하지만 지훈은 자신이 본 것만을, 그리고 주변인이 본 것만을 믿고서 동물적 욕망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 순간 완벽하게 그녀의 삶을 훔쳐 낸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이 비틀어 버린 그녀의 삶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들의 눈으로 본 거짓만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는 다시 깨닫는다. 자신이 본 것 역시 거짓일 수 있음을. 자신 역시 그녀를 색안경을 낀 채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말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는 동물적 욕망 대신 재연과 같은 식물적 삶을 택한다. 그리고 그 때서야 온전하게 재연과 공감한다. 뒤늦게 찾아간 유리정원에서 그는 재연의 연구가 성공하는 환상을 보고, 재연과의 대화를 그린다. 하지만 재연은 이미 늦어버렸다는 말을 남긴 채, 숲 속으로 사라진다. 나무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온전한 두 다리로 걸어서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흐른 후, 지훈은 상당히 달라진 삶을 산다. 고급 세단과 명품 시계. 그리고 굳어 버린 반쪽 몸까지. 그리고 불편한 몸을 질질 끌며 재연의 연구실이 있던 숲을 찾아가, 그녀를 닮은 나무를 어루만진다. 반쯤은 굳어 나무와 같이 변해 버린 지훈의 몸과, 그럼에도 움직이는 나머지 반쪽의 몸, 그리고 그의 옷차림에서 느껴지는 물질적 풍요는 그가 여전히 동물적 욕망을 좇으면서도, 순수한 식물적 삶을 견지하려 함을 내비친다.
그런 면에서도 지훈은 재연과 닮았다. 재연은 벌목꾼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베어넘기던 숲의 나무들을 치료해 준다. 동물적 욕망이 남긴 상처에서 태어났지만, 그녀 자신은 식물적 삶을 사는 존재들을 치료하면서 살아간다. 지훈 역시 동물적 욕망으로 재연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인생의 2막을 열었지만, 결국에는 본인 역시 식물적 삶을 견지하며, 다른 나무들을 어루만진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유리정원 속에서 사는 듯한 이들이 종종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보같을 정도로 착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바보같음을 이용하려 든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그 유리정원에 흠집을 내더라도, 그들 자신이 투명해질 수는 없다. 그 투명한 기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때에서야 자신의 눈에 씌워진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그 순수를 마음 한켠에 간직할 수 있다. 마치 지훈이 그랬듯이. 그렇게 영화는 식물적 삶을 사는 세상의 순수를 어루만지며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