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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BRIDGE Oct 13. 2018

무비 브릿지 - 스텝 바이 스텝

시련 앞에서 우리는

    시련은 생각보다 쉽게 우리에게 찾아온다. 당신이 공들여 쓴 자소설이 차가운 대답과 함께 거절당할 수도 있고, 믿었던 친구와의 우정이 산산히 부서질 수도 있다. 뭐 그렇게 거창하게 찾을 것도 없이, 시험 기간에 들어선 지금의 학생들에겐 매일매일이 시련이리라. 그 시련들 앞에서 우리는 주저앉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우리 앞에 세워진 끝없는 벽 앞에서, 어떻게든 그 벽을 넘고자 애를 쓰면서 말이다. 


    "스텝 바이 스텝" 의 주인공, 벤자민은 시련을 겪는 우리들을 대표한다. 그 시련이란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고되기는 하지만. 본인 말에 따르면, '멍청한 다이빙' 때문에 척추가 손상된 벤자민. 영화 초반부의 그는 침대에 누워 그를 살피는 간호사들과, 걱정 어린 표정을 한아름 얼굴에 담은 채 바라보는 부모님. 때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의사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눈만 꿈뻑일 뿐. 그리고 왼팔과 어깨 조금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는 재활센터로 옮겨진다. 

부럽다.

    재활센터의 첫 아침,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오는 간호사 장 마리. 방문 블라인드를 확확 제끼며 벤을 깨우더니, 그에게 아침밥을 주고, 손수 벤자민의 몸을 닦아준다. 한없이 굴욕감을 느끼는 벤.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재활센터의 일상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려 낑낑대기도 하고, 그곳에서 사귄 친구 파리드, 투생, 그리고 스티브와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 와중에 사미아라는 여자와 만나 썸을 타고, 깊은 대화도 나눈다. 누구는 사지 멀쩡한데도 몇 년째 독수공방 중인데, 참.


    에디가 느끼는 것은 오로직 희망 뿐이었다. 내 앞에 놓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 그것이 에디의 동력이었고, 당장의 가장 큰 목표였다. 매일매일 부끄러운 아침을 맞아도,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아 밥 먹기조차 힘들어도, 마치 통나무처럼 들려서 물에 띄워지는 짓거리를 '수영' 이란 이름 하에 행함에도, 에디를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 다시 나아 운동을 하고 체육 선생님이 되리라는 부푼 기대였다. 

    눈부신 희망에 취한 에디는 그래서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끔 전부 다 때려치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고 절규하는 전신마비 친구 스티브도, 그래서 보드카 한 병을 탈탈 털어넣는, 일종의 자살행위를 한 스티브를 보며 그것 역시 본인의 선택이라고, 그저 취향 차이라고 변호하는 사미아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그에게 넘을 수 없는 시련은 없어 보였으니까. 그가 노력하고 부딪힌 만큼, 그의 몸은 서서히 돌아왔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최대한 회복되더라도 다시 체육 관련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답을 듣고 나서, 그는 절망한다. 겨우겨우 작은 틈을 낸 벽 뒤에, 더 단단하고 굳건한 또다른 벽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그는 추락한다. 마치 데드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을 나불거리던 벤이었지만, 그 농담마저도 시니컬한 푸른빛으로 물든다. 

무려 '전신마비 복싱 대회' 를 주최하는 파리드

    그 때 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바로 4살때부터 휠체어에 의지하던 하반신 마비 파리드. 그는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음을 벤에게 알려 준다. 우리는 결코 전능하지 않기에, 가끔은 우리의 노오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기에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은 결코 못난 일이라거나, 실패라거나 하는 일들이 아니라고. 이미 그 고통스러운 포기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까, 파리드는 다시 쾌활하게 분위기를 띄운다. 


    영화는 그렇게 벤의 갈등과, 시련과, 이런저런 일들을 비춘 후에, 그의 퇴원과 어느 정도 회복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끝이 난다. 한없이 잔잔했던 영화에서 느껴졌던 것은 시련을 마주하는 벤자민의 모습들이었다. 비록 그가 마주한 벽이 보통의 20대가 마주하는 그것보다 다소 높긴 했지만, 그 앞에서 취하는 태도들이나 행동들은 결국 우리가 취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시련을 극복한다는 것은, 눈 앞의 벽을 시원하게 깨부수거나 뛰어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파리드도, 벤자민도, 그리고 투생까지도 결국 그들이 껴안은 시련을 극복해 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두 다리로 올곧게 서서 편안하게 걷게 된 것은 아니다. 파리드는 여전히 휠체어 위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고, 벤은 다시는 남들처럼 농구를 하고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평생 장애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이다. 그뿐인가. 투생은 결국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지 못하다가 극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스스로로서 존재했다. 비록 어떤 벽 앞에서 그들은 주저앉았지만, 포기했다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벤과 파리드, 그리고 투생은 그들 스스로로서 존재했다. 죽음을 예감한 투생은 소탈하게 친구들에게 일탈을 권한다. 세 전동휠체어가 센터 앞 숲속을 누비고, 수동 휠체어를 탄 파리드는 헥헥거리며 그들을 뒤따라간다. 그렇게 멈춰선 한밤의 숲. 그곳에서 그들은 시원한 밤공기를 폐 가득 들이마신다. 투생은 그의 몸을 짓누르는 병마 앞에서 멈춰섰지만, 그가 맞이한 고난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결국 시련을 이겨낸다는 것은, 그 높디높은 벽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다고 한다. 감독이 겪었을 시련과, 그 고난을 영화로 승화해낸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리뷰를 마친다. 


총평 : 시련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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