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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Feb 10. 2021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

우리의 반려견과 굶어 죽은 개

우리나라 4가구 중 1가구 정도가 반려동물을 기르는 현대에는 동물들의 존재가 친숙합니다. 우리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는 보조의 역할도 척척 해냅니다. 수많은 종의 반려동물은 많지만, 그중에서 특히 개는 인간과 함께하며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개는 인간의 각별한 애정을 받아오며 역사에 자연스레 스며들었습니다. 


대중매체에서도 인간과 함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개는 우리를 절대 떠나지 않는 충직한 존재입니다. 당장 산책 나온 개들을 보아도, 영화 속에 출연한 개들을 보아도, 예술 속에 담긴 개들을 보아도 인간과 오랜 유대의 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반려견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렘브란트, 에드워드 마네, 폴 세잔, 에드워드 호퍼…. 과거의 예술가부터 현재의 예술가까지.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은 친구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개를 사랑했고 수많은 개를 키운 유명한 애견가이기도 하지요. 파블로 피카소는 주변 지인들에게 강아지를 선물로 준 적이 종종 있는데, 이는 자신이 친구들 집을 방문했을 때 강아지가 항상 곁에 있기를 바란 마음이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에게 가장 사랑받은 주인공은 ‘럼프’라는 닥스훈트입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헌정한 파블로 피카소의 <시녀들>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럼프를 볼 수 있습니다.      


<시녀들>, 194x260cm, 1957 /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의 애정 담긴 그림을 보니 럼프는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럼프는 신기하게도 파블로 피카소가 생을 마감하기 10일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또한, 파블로 피카소는 아프간하운드 종을 좋아했는데 ‘카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카불을 모델로 한 작품도 흥미롭습니다(ⓐ).      



<Femme au chien>, 146x114cm, 1962 / 파블로 피카소


인간처럼 동물도 감정이 담긴 그림들을 낱낱이 들여다보면 시간 가는지 모른 채 즐거워집니다. 충실하고 듬직한 개, 나긋나긋 졸음이 몰려온 개, 주인 품에 포근히 안겨있는 작고 소중한 개…. 

그림 속 반려견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모든 것을 함께했습니다.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풍경화에 개들을 그려 넣은 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반려견들의 단독 초상화 작품도 다수 남겼을 정도였습니다.      



<Pomeranian Bitch and Puppy>, 83.2x111.8cm, 1777년경 / 토머스 게인즈버러


털의 흩날림, 오뚝 솟은 뾰족한 귀와 코, 건강한 혀와 빛나는 눈동자의 활기는 몇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생동감으로, 내 귀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그림 속 작고 앙증맞은 강아지와 늠름한 개 모습을 보면 과거나 현재에도 개들은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 1912 / 자코모 발라


개라는 주제에 많은 예술가가 매료됐습니다. 그림 속에 반짝이는 눈망울을 고정하기도 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자코모 발라는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고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화가입니다.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이라는 작품을 보면 대상의 움직임을 속도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다중노출 기능을 이용한 것처럼 개를 겹쳐 그린 것입니다. 그림이 가진 구조에서 벗어나 비 재현적 회화를 탄생시킴으로써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설득합니다. 흔들거리는 꼬리와 주인의 발걸음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네 다리가 저절로 연상되어 흐뭇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멈춰 있는 그림에 운동성을 부여하니 닥스훈트와 개 주인이 그림 속에서도 리드 줄을 흔들며 산책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일부 그림만 살펴봐도 친근한 개의 소재를 곧잘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는 이 친근한 개의 소재를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현재까지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상어와 나비, 금붕어와 돼지 같은 온갖 동물이 대상이 되는 작품을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미술이 대중에게 주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와 일말의 여지를 줍니다. 

현대미술이라는 명목으로 동물이 대상인 작품은 항상 논란과 함께 전시됩니다.      



<굶어 죽은 개>의 전시장, 2007 / 기예르모 베르가스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2007년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유기견을 전시장에 ‘작품’이라 명명하고 논란의 화두에 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물단체를 비롯한 시민들까지 경악하며 전시를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서명자만 약 4백만 명에 이르렀던 이 전시는 취소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전시는 정상 운영되었고 관객들은 니카라과의 한 갤러리 구석에 묶여있는 유기견을 결국 만나게 됩니다(ⓑ).      



<굶어 죽은 개>의 전시장, 2007 / 기예르모 베르가스


전시장의 한쪽 벽에는 개 사료로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다(Eres lo que lees)”라는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기예르모 베르가스가 데려온 전시회 작품인 유기견은 다음날 죽었고 그는 이 작품을 <굶어 죽은 개>로 작명했습니다. 


반발에도 강행한 논란의 전시에 대해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사회 문제를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니카라과 출신의 부랑자가 자동차 수리점에서 도둑질하다 로트 와일러 종인 큰 개 두 마리에게 물려 죽은 사건을 보고 이 작품은 그 부랑자에 대한 헌정 물이다.”라고 밝히며 대중의 위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의도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공분할 대로 공분한 일부 대중들은 기예르모 베르가스의 자택에 찾아가 해까지 가했다고 합니다. 


많은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다음 해인 2008년 같은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팻말과 다른 개 열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시오.”

관객들은 작가가 준비해온 굶고 야윈 개를 다퉈 서로 데려가고자 했고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개 열 마리를 관객들에게 모두 나누어 완성되지 못한 채 <굶어 죽은 개>의 전시를 마쳤습니다.      

전시회가 각종 보도에 소개되고 유명해지자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이제부터 일어날 사건을 기대하라 말과 함께 점차 잊히는 듯했습니다. 


몇 개월 후 각지의 공원에서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시오.”라는 팻말과 함께 야윈 개들이 나타났습니다. 


전시회에서 정의감으로 개를 데려온 관객들은 사회적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일 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예르모 베르가스의 방법을 따라 하며 자신들이 전시장에서 직접 거둔 개를 외면했습니다. 

전시회에서 완성되지 못한 <굶어 죽은 개>는 몇 개월에 걸쳐 관객들이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왜 이런 전시를 기획한 것일까요? 이미 위에서 밝힌 바로 첫째, 대중의 위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의도와 둘째, 니카라과 출신의 부랑자가 로트 와일러 종인 큰 개 두 마리에게 죽임을 당했던 일입니다. 부랑자가 죽은 사고의 현장에는 언론사와 경찰, 소방대원, 안전요원들이 있었습니다. 언론사는 촬영하기 바빴고, 요원들은 현장을 수습하는데 정신이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고통받은 인간을 보고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던 인간들이 굶어 죽어가는 유기견이 전시장 안에 묶여있고 화제가 되니 그제야 평소 관심 없던 유기견에게 동정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굶어 죽은 개>는 이런 인간들의 위선을 꼬집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어느 형태로든 현재를 존재합니다. 예술가는 좋은 취지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해도 생명을 도구로 전락하는 행위는 우리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자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나의 견해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겨우 시선을 받고 경각심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가 있는 작품일지라도 같은 한 생명체인 지구의 일원으로서 존중하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갖는 생명윤리에 대해 앞으로 더 빈번하고 더 자극적인 소재로 다가오겠지만, 그때마다 의도를 제쳐두고 비난만이 난무한다면 더 나은 사회를 만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건 사고에 대해 모든 시간을 할애하며 경각심을 갖고 바라볼 순 없습니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내가 부적절한 행위를 하진 않았는지 의식을 갖고 한 번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상과 시선에 익숙해져 무감각해지려 하지 말고 항상 존재하는 형태에 감사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참고

위 본문은 예술 플랫폼 아트렉처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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