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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Jun 10. 2021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라스 폰 트리에, 유디트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피터 스완슨의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사연 있는 두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서 살인도 마다치 않을 위험한 계획의 여정으로 안내합니다. 


겨우 가슴이 봉긋해진 잠든 아이 옆에서 끈끈한 눈빛을 보내며 자위하는 늙은 화가, 영원히 나만 사랑할 줄 알았던 상대방의 끊임없는 외도, 배우자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음습한 음모를 꾸미는 아내까지. 세상 어딘가에 꼭 존재하고야 마는 이기적이고 행티 있는, 용서할 수 없는 그들을 계획적인 살인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요? 쳐다만 봐도 죽이고 싶을 혐오감과 치달아 오르는 미움의 감정이 앙진한 사람 말입니다. 나를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순간 갑자기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한 번쯤 손찌검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마치 타인의 무게를 저울질하면서요. 생각해보면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지만, 죽여 마땅한 사람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은 살인에 대한 합리적인 모순과 아이러니한 믿음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세상은 인간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터부시하는 살인이라는 소재를 예술은 신화나 성서 일부에서 가져오기도 하는데요.   

   

영화 <살인마 잭의 집> 스틸 컷, 2018 / 라스 폰 트리에


단테의 <신곡:지옥>을 일부 차용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살인마 잭의 집>을 빼놓을 수가 없겠습니다. ‘살인도 예술이다.’라며 자신을 교양 살인마라고 칭하는 연쇄 살인마에 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살인마 잭의 집> 영화 공개 당시 20분 만에 아동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와 당시 100여 명의 관객이 야유를 보내며 중도퇴장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논란으로 인해 아동 살해 및 선정적인 장면은 삭제된 채 개봉되었습니다. 논란된 장면들은 감독판으로 따로 개봉했고요. 이런 감독을 고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들여다보노라면 위험한 장면이었을 뿐, 평소 감독이 늘어놓았던 수위보다 낮은 편이었습니다. 살인마 잭은 살인을 창작의 자유에 빗대며 철학적 궤변론자가 되는데요. 


일장일단한 주제를 철학의 이론으로 종교적인 은유로 예술로서 표현하며 인간의 속성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표명하듯 보입니다. 잭은 자신의 집을 정상적으로 짓지 못하고 비정상적으로 지어나가는데 그 과정 또한 포장하며 완성해 갑니다.           



구약성경 외전인 유딧에 등장하는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를 그린 그림 또한 인상적입니다. 서양 화가들이 즐겨 그린 이 이야기는 같은 주제이지만 작가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화가의 그림 속 주인공이 여러 차례 되어선지 대중에게도 인지도가 있는 인물입니다. 유디트는 유대 산악도시 베툴리아에 사는 아름다운 과부입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지휘하는 아시리아 군대가 베툴리아를 침략하게 됩니다. 유디트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아시리아군 진영으로 찾아가 거짓으로 투항하고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삽니다. 홀로페르네스가 만취하여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유디트가 그의 목을 칼로 베어 하녀 아브라와 함께 달아납니다. 

보티첼리, 루벤스 등 많은 서양 화가들이 그렸지만,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있습니다.     




<유디트 1>, 1901 /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유디트 1>은 서양 화가들이 그려온 유디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납니다. 드러난 젖가슴, 분노가 드러나지 않은 표정과 화려한 장식성까지. 관능적인 실눈과 그녀의 온몸은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이 관능에 집중하다 보면 가끔 등잔 밑을 못 볼 때가 있는데요. 오른쪽 아래를 보면 남성의 머리가 있습니다. 바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입니다. 클림트는 홀로페르네스를 강조하기보단 유디트를 강조한 구도를 사용하면서 마치 유디트의 팜므파탈만을 강조하듯 보입니다. 화려한 유디트를 가득 담은 구도가 신비스러우면서 클림트의 핵심인 장식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품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145x195cm, 1599 /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1599)>는 어딜가도 많이 접하는 작품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확연히 대비되는 명암 속에서 홀로페르네스는 고통으로 점철되어가고 그 눈빛이 주저하는 유디트와 마주칩니다. 하녀 아브라는 머리를 담을 자루를 들고 소극적인 자세로 응시할 뿐, 두 여성이 살인을 주저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가 잠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구도는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99x162cm, 1612~21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1612~21)>의 유디트는 다른 작가들의 유디트보다 더 결연합니다. 유디트의 얼굴에서 분노와 증오가 보이며 하녀 아브라도 유디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듯 적극적인 자세로 돕습니다. 젠틸레스키는 유망한 예술가로 인정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아버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웠고, 나중에는 아고스티노 타시의 작업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기간에 타시가 그녀를 겁탈하고야 말았고요. 그녀의 아버지는 젠틸레스키가 17살이 되던 해 타시를 고발하며 길고 긴 재판이 이어졌습니다. 타시는 처벌받기야 했지만, 젠틸레스키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은 그녀의 그림으로 번졌습니다.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홀로페르네스=타락한 남성성’, ‘유디트=성폭력에 대항하는 자신’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타시의 얼굴이 홀로페르네스에게 투영하며 더욱 결연하게 살인에 임하는 유디트를 보게 됩니다.

젠틸레스키는 자신을 유디트에 몰입하여 타시의 목을 베는 모습을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이 말이 다시금 상기되면서 유디트를 그린 수많은 화가 중 젠틸레스키의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현실 속에선 불가능한 예술 속 살인마에게 빠져드는 현상은 예리하고 사연의 사소한 부분으로도 냉정한 악의 본질을 탐구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위 본문은 예술 플랫폼 아트렉처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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