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관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져갔는지만 기억한다.
좋을 땐 호의고, 나쁠 땐 회수 가능한 물건이 된다.
기억 속에 그것은 늘 임시적이다.
늘 아주 작은 계산에 능숙하다.
크게 소리 내지 않았고,
대놓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부탁한 적은 없었지만 끝난 뒤에야
물건들은 갑자기 주인을 되찾았다.
그 방식이 너무 조용해서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상함은 늘 나중에 드러난다.
기울기 시작할 무렵,
기억은 선택적으로 작동한다.
스스로 선택했던 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이미 손에 쥔 것들은
갑자기 자신만의 오래된 권리가 된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듯 다뤄진다.
설명도, 허락도, 미안함도 없다.
그 태도는 이상할 만큼 담담하다.
흥미로운 건
자신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완벽한 침묵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말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고,
기억하지 않으면 책임도 생기지 않는다.
그 침묵은 이상할 만큼 능숙해서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미 사용 중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당당하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맥락에서 건네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자리에 있고,
지금 자신이 쓰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아무 말 없이 흡수된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의 세계에서 관계란
함께 만든 기억이 아니라
정산되지 않은 항목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그 정산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빠지는 건
대개 타인의 시간과 노동,
그리고 아주 사소한 예의다.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런 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감정이라는 것을.
분노는 최소한
상대가 같은 언어를 쓸 때 성립하고
최소한의 존중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남은 나의 것을 조용히 가져가는 쪽을 택했다.
지질함은 그래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지질함은 대체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히 드러난다.
이미 차지한 것을
마치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놓아두는 방식으로,
선물의 의미를 상황에 따라 갈아 끼우는 태도로,
타인의 삶을 정산표처럼 다루는 얼굴로.
그 여지 속에서
사람의 품위는 조금씩 마모된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묻는 순간,
같은 계산표 위에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기록한다.
이상한 계산법을 가진 한 사람의 태도를.
그리고 그 계산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이미 가진 것에는 유난히 익숙한 태도를.
어떤 사람은 관계가 끝나면
빈손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품위를 잃는다.
나는 이제 둘 중 어느 쪽이 더 회복하기 어려운지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