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두운 삶에 밝은 형태를.’
이 문장은 조각가 최종태 분의 1970년대 소묘 전집 제목이다.
이 문장을 2018년 내가 더 이상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속에 새겨두고 새겨두었던 문장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새겨둔 문장을 잊고 살아가고 인간 누구나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나 또한 결국 다시 무너져 내렸다.
2025년.
내가 꿈꾸었던 밝은 형태는 다시 어두움으로 덮였다.
밝은 형태의 내 삶이 어두움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 어두움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혹은 인간 존재가 본디 지닌 운명이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꽃이 피면 시들고, 계절 오면 떠나듯,
내가 겨우 찾게 되리라 생각했던 그 지점은 영원이 고요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균열 속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작아졌고,
마음 깊은 곳은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하나로 엮는 길이 있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함께라면 괜찮으리라 믿었고, 그 믿음 하나로 낯설고 새로운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오래도록 숨이 막히는 작은 방 같았다.
벽은 점점 좁아지고 창은 닫히며, 바람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오고 가는 것은 칼날이 되어 서로를 베었고, 믿음은 결여로, 동행은 고립으로 변해갔다.
오직 나의 잘못과 실수만이 확대되어 단점으로 돌아왔고, 그것이 전부 내 책임인 듯 덮어씌워졌다.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고, 결국 침묵과 조급함만이 내 언어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더 작게 만들었고, 인내심 대신 조바심으로 살아갔다.
어느 순간 나는 나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왜 이렇게 무가치해진 것인지, 내 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자책을 반복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야만 했다.
살아내야만 했다.
버틴다는 건 때로 견딜 수 없는 무게였으나, 그 무게조차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더 짓눌렀다.
아릿함은 내 안의 짓눌림을 잊게 했다.
순간의 지나감은 결국 내 안의 잊음이 아니라 또 다른 허무를 불러왔다.
나는 절망 한가운데서 몸을 찢어내듯 몸부림쳤고, 그럼에도 살아야만 했다.
버틴다는 것은 때로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전부를 걸었던 그것은 나를 지켜주는 뿌리가 아니었음을.
뿌리는 늘 나 자신이어야 했다.
나는 그 뿌리를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또 다른 길이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한 길만이 유일한 답이라 믿어왔으나, 그 믿음을 내려놓자 새로운 길이 보였다.
삶은 어두운 형태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무가치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눈에 부족한 나였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었고,
나 자신에게는 다시 일어설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상처는 고통의 기록인 동시에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표식이었다.
가치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었다.
나를 끝없이 깎아내린 시간은 돌이켜보니 동시에 나를 단련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버티는 법을 배웠고, 조바심을 내려놓았으며, 이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나 자신을 작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여행, 내가 원하는 자유, 이제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그것은 내 길 위에 놓여 있으며, 내 손안에 있으니 잡기만 하면 되었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우리는 그 불완전 속에서 성장한다.
나는 여전히 상처투성이의 몸과 마음을 지녔으나, 동시에 빛을 향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언젠가 이 흉터가 완전히 아물 날이 오리라.
그날이 오면, 오늘의 고통은 결국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살아내고 있는 나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