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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Jul 29. 2021

『어쩌다 영화』 프롤로그

라떼는 말이야…….


주성철




   ‘라떼인 듯 라떼 아닌 라떼 같은’ 영화 에세이를 써보고 싶었다. 비평서나 인터뷰집이 아니면서 영화애호가들이 재밌게 읽을 만한 에세이. PC통신과 동호회를 중심으로 이른바 씨네필들이 대거 커밍아웃한 90년대의 기억을 바탕으로 영화를 사랑했던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한국영상자료원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럼에도 한 자 한 자 써 나가다보니 ‘라떼는 말이야’라는 무간지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흠칫 놀라 끝내 나 혼자 쓰면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진국 라떼가 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변에서 또 다른 라떼 바리스타 희생양들을 찾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든 나의 민망함을 나누려는 의도였으나, 물론 그들에게는 영화 <기생충>의 포스터 헤드 카피로 약을 팔았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또 영화를 미래의 직업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라떼 이야기를 모아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은 주변에서 가장 ‘라떼’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찾았다. 그런 인간들이 ‘라떼’ 이야기를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라떼’라고 하면 가장 질색할 만한 사람들이 하는 ‘라떼’ 이야기가 궁금해진 것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영화 동아리 출신이면서 「씨네21」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김도훈 기자, 「필름2.0」에서 만난 인연이 역시 「씨네21」까지 이어졌던 이화정 기자, JTBC <전체관람가>로 시작해 현재 <방구석1열>을 이끌고 있는 김미연 피디, ‘마감인간’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원으로 함께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무비건조>라는 유튜브 방송을 함께하고 있는 대세 음악평론가 배순탁까지……. 쉽게 말해 그냥 ‘지인 찬스’를 썼다. 친하다면 친하고 어색하다면 어색한 이들은 사실 나부터 평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지인들이기도 했다. (일단 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정말 즐겁다.)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싶은 필자들을 섭외한 출판 편집자의 마인드라고나 할까. 거기에 더해 과거 MBC <무한도전> 예능총회에도 출연하고,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가 따로 언급까지 했던 푸른숲 출판사의 김교석 편집장은 과거 영화잡지 「필름2.0」의 동료이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는(배순탁 작가와 김미연 피디는 극구 나와 다른 세대라 우기지만 어쨌건) 비슷한 시대와 환경을 관통한 공통점이 있다. 그 시절 영화를 사랑했던 풍경을 요약하는 가장 라떼스러운 이야기는 영화와 정보를 진짜로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영화가 내 손 안에 있지 않았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처럼 들리지만, IPTV나 OTT 서비스를 통해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걸작들, 심지어 극장 미개봉작들을 손쉽게 ‘클릭’해서 볼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각 지역 시네마테크에서 수십 번 재생되고, 녹화에 재녹화를 거쳐 늘어질 대로 늘어진 VHS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나쁜 화질로 겨우 볼 수 있었던 영화들을 이제는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선명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1.85:1 이나 2.35:1 같은 극장용 화면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4:3 TV 화면비에 맞춰 화면의 양옆이 잘려 나가다 보니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누구한테 떠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DVD나 블루레이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순진한 바람도 시들해졌고, 심지어 기어코 내 몸을 움직여서 플레이어를 오픈해 DVD나 블루레이 타이틀을 끼워 넣고 재생하는 행위마저 귀찮아져 버렸다. 


   그처럼 보고 싶은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보니 ‘영화 사랑’이나 ‘영화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 대부분은 영화책이나 영화잡지를 읽는 시간이기도 했다. 볼 수 없는 영화, 그래서 보지 못한 영화를 누군가가 쓴 글로 대리만족했던 것이다.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의 대답이 “응, 그 영화책에서 읽었어!”이던 시절이었다.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와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티 톰슨의 『Film Art: 영화 예술』, 로빈 우드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그런 갈증을 채워준 필독서였다. 물론 더 손길이 많이 갔던 것은 영화잡지들이었다. 월간지 「로드쇼」와 「스크린」을 지나 「키노」와 「씨네21」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화잡지들을 다 사 보았다. 그들이 지금도 나의 영화 사랑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이제는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됐다. 


   1990년대 초반 평론가로서도 맹위를 떨치던 박찬욱 감독이 쓴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비디오드롬』도 밑줄 그어가며 봤던 책이었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외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B무비나 장르 영화들까지 포괄하고 있던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그가 언급한 영화들을 비디오 가게에서 하나씩 찾아보고, 본 영화들을 도장 격파하듯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나의 감상평을 추가해가며 완독했으니 내게 있어 일종의 교과서라면 교과서였다. 지금은 그 책이 그가 이후에 쓴 에세이들까지 엮어서 『박찬욱의 몽타주』와 『박찬욱의 오마주』라는 두 권 분량의 개정증보판으로 나왔다. 이렇듯 90년대 시네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세대의 영화 사랑법에는, 앞서 말했다시피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시간이 더 많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시네필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거기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세대 시네필들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거기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던 그 시절 풍경이 좋았다, 라고 쓰고 보니 좋고 말고 할 것 없이 오직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라떼’의 문제점이다. 과거 분명 선택의 여지가 없던 어떤 일에 대해, 마치 깊은 고민 끝에 다다른 단 하나의 선택이었던 것인 양 비장하게 환상 속에서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네 명의 다른 필자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득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의 감금 방에 걸려 있던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눈은 울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는 예수의 얼굴을 그린 그림 <슬퍼하는 남자>와 겹쳐지던 시가 떠오른다. 19세기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의 「고독」(원제 ‘The Way of The World’)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이렇게 프롤로그는 시작된다. 책 마지막에 이르러 함께 웃게 될지, 나 혼자 울게 될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우리의 이야기는 따로 또 같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계속>




   주성철

   前 「씨네21」 편집장 

   前 「필름 2.0」 기자 

   前 「키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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