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영화기자
고등학교 때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니 좁은 방안이 비디오테이프에 잠식당했다. 좀 과장하자면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우에노 주리의 잡동사니 더미 방처럼, 누울 자리 빼고는 비디오테이프가 점령한 꼴이었다. 실화다. 훗날 내가 영화를 연출했다면 원 없이 B급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던 그 시절이 내 창작의 원천이라 뻐겼을지 모를 일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쿠엔틴 타란티노 어쩌고 이러면서. 어쨌든 감독이 안 되어서 지금까지 효과적으로 써먹지 못한 에피소드다.
우리 집이 비디오 가게를 운영을 앞둔 건 아니었고 사정인즉 이랬다. 당시 청년이었던 외삼촌 둘이 집에 함께 살았었는데, 둘 중 큰삼촌이 비디오테이프 중간 도매업 일에 종사하면서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도 아르바이트로 끌어들인 거였다. 한 집에 둘이나 같은 일을 하는 구성원이 있었건만, 삼촌들은 들어오면 피곤에 지쳐 자기 바빴지 쌓여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콘텐츠로 기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집까지 온 테이프들은 각 대여점으로 가기 전 잠시 거치는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졸지에 우리 집은 비디오테이프의 임보처가 되었다.
어떤 유통 라인에서 일했는지 삼촌들이 가져온 구색에는 <영웅본색> <천녀유혼> 같은 그럴 듯한 화제작은 거의 없었다. 제목도 모를 B급 영화가 대다수라 그 당시 우리 삼남매만 아는 영화 제목 리스트가 단기간에 수두룩하게 쌓여갔다. 어쩌다 <강시> 시리즈가 집으로 납품되는 날이면, 계 탄 거다. 그래도 가끔씩 <최가박당> <폴리스 스토리> 같은 유명 시리즈물이 꾸준히 업데이트 된 게 다행이다. 삼촌들이 일하러 나간 사이 우리 남매는 제목이 제법 그럴듯한 영화를 빼내서 데크에 걸었다. 자칫 잘못 빼냈다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다 보니, 마치 젠가 하듯 조심스럽게 원하는 영화를 정확히 하나만 꺼내는 게 관건이었다. 그때 제일 많이 본 게 이려진 배우가 나오는 홍콩 십대 청춘물 <귀마교원>이었다. 홍콩 고등학생들이 나와서 커닝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시리즈물이었는데, 하여간 우리 삼남매가 대사를 다 외울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그들과 학교를 다니는 만큼 돌려 본 것 같다. 지금 말하지만 이려진 배우님, 장면 하나하나를 외우던 우리 삼남매에게 당신은 왕조현, 장만옥을 능가하는 최애 배우였습니다. 이후 삼촌들이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는 등 변화를 맞으며 집을 떠나기 전까지 이 ‘신선한’ 비디오 공급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종로가 극장가였던 시절, 영화를 먹고 자란 세대다. 그땐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피카디리 옆에 피카소, 건너편에 단성사. 길을 길게 건너면 극장의 메카 서울극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충무로의 중앙극장, 명보극장까지 더하면 맛집 지도 부럽지 않은 주요 극장 지도가 완성되었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개봉작을 섭렵하였고. 1997년 개봉에 맞춰 <접속>을 함께 본 소개팅남과 3년 후 같은 날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고(안 만났다), 영화 잡지사에서 일하는 기자가 된 후에는 서울극장 옆 2층 파스타집 소렌토(지금은 사라졌습니다)에 가서 일을 했다. 요즘 같은 대규모 취재진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그땐 그 좁은 곳에서 감독, 배우, 기자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했다.
어쨌든 종로는 내게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이었고, 그 길에 종로서적과 교보문고도 들르며 세상의 모든 감성과 지성을 소비하는 척 뿌듯함을 누렸다. 그때는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안 팔리고 남아 있는 오래된 책 사는 걸 꽤나 큰 수확으로 여기던 아이였다. 개봉작 신문 광고는 꼭 미리 스크랩 해뒀다가 영화를 보러 갔는데, 혼자 영화 보러 갈 용기가 생기기 전까지 늘 같이 갈 친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온갖 감언이설로 홍보 마케팅을 열심히 해 친구를 데리고 가면 영화 보는 내내 내가 그 영화를 만든 제작자도 감독도 아닌데 그렇게 신경이 쓰여 영화에 집중이 안 됐다. 혹시 친구가 재미없어하면 어쩌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볼 때는 아이들이 책상 위에 올라서는 순간 소름이 끼치면서 함께 호응했는데, <시실리아>를 볼 때는 친구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땐 끝나고 우동 값을 내는 걸로 대략 만회.
학교에서 시험 후 가는 단체 관람은 같이 시내까지 같이 가줄 친구를 구할 필요도 없고, 교육 명목의 참여라 영화를 보기 더없이 좋은 찬스였다. 다만 단체 관람은 작품 선정이 대부분 형편없었다. 예를 들면 한창 홍콩 영화 붐일 때 본 <우연>은 당시 <천녀유혼>으로 뜬 ‘왕조현 주연’ 홍보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지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왕조현은 지나가는 역할로 고작 한 컷 나오는 식이었다. 정말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차에 매달려 “어! 왕조현이다!” 하는 사이에 화면에서 사라졌다. 거의 사기 마케팅이지만 댓글 창도 SNS도 없으니 불평도 그날로 사그라들었다.
그 과정에 있어 나는 베트남으로 간 한국 병사와 베트남 여성의 아픈 사랑을 그린 <푸른 옷소매>의 몇 안 되는 유료 관람객 중 한 명이다. 영화가 영화가 하도 어이없을 만큼 수준 이하라 도대체 학생들에게 이 작품을 굳이 왜 보여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내 작품을 선정한 주임 선생님이 베트남 참전 용사였다는 그럴싸한 이유가 다음 날 학교에 퍼지기도 했다. 당시 <뮤직 박스>나 <킬링 필드> 같은 전쟁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은 단골 단체 관람작이었다. 그중 731부대의 인체실험을 다룬 <마루타>(1988, 국내 개봉은 1990년이었다) 경우 같은 재단의 남고는 단체 관람작으로 선정했지만, 여학생에게는 수위가 높다는 이유로 여고는 자체 금지시켰다. 여고는 <크로크다일 던디> 같은 지금은 뭘 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코믹 영화를 봤는데, 부당한 선정에 씩씩거리고서 막상 영화는 낄낄거리며 재밌게 봤다. 강조하지만 프로그래밍에는 외압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나마 대중 영화면 아이들이 집중이라도 할 텐데 꾸역꾸역 ‘버텨야’ 하는 작품도 꽤 됐다.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작품들은 대개 이렇게 섭렵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했을 때는, 불교 재단 학교에 이만한 단체 관람작이 없었다. 그날 영화 상영 내내 캄캄한 극장 안에서 시험지 답안을 채점 하던 소리와, 아이들이 던진 지우개가 총알처럼 스크린 앞을 날아다니던 광경이 떠오른다. 나는 그 난리통에 꿋꿋이 달마의 행적을 궁금해하던 전교 유일의 관람자였을 거다. 내 씨네필로서의 자질은 아마 그때 생긴 게 아닐까. 훗날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같은 난이도 높은 아트 영화를 무이자 할부금 납부하듯 여섯 번에 걸쳐서 끝끝내 보기까지 지루함을 버티는 마음 근육은 예술을 이해하기 앞서 일단 예술을 버텨야 했던 시절, 그때 이미 형성되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나는 씨네필이기 전에 언제나 개봉작은 빼놓지 않고 가장 먼저 섭렵해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영화광’이었다. 그때 나 같은 팬들을 움직이는 촉매제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굿즈 전성시대의 원조 격인 굿즈 마케팅이었다. 영화가 개봉을 하면 신문 하단에 개봉일, 선착순 선물을 준다는 광고가 게재됐다. 영화의 제목이나 이미지를 새겨 넣은 티셔츠, 그리고 영화 스틸과 작품 개요를 망라한 총천연색 브로셔가 주요 굿즈였다. 좋은 굿즈 순서로 선착순 인원이 1명, 5명, 20명 이렇게 나뉘어졌다. 개봉일 아침이면 영화도 보고 굿즈도 받겠다는 계획 아래 기를 쓰고 아침잠을 설쳐가며 극장을 찾았다. 아직 움직임이 깨어나기 전 텅 빈 시내. 이른 아침 공기를 맞으며 서울극장, 단성사, 명보극장 앞에 늘어선 줄은 모두 이렇게 영화를 먼저 보고, 굿즈를 받겠다고 몰린 또래 영화 팬들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초대형 화면의 감동과 함께 세계 영화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 신작 영화를 재빨리 보고 나면 그렇게 상쾌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 킵해둔 굿즈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 개봉 당시 나눠줬던 파리 티셔츠다. 인간과 파리가 교배된 파리 인간의 출산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일대 충격의 영화. 명성에 걸맞게 굿즈도 충격이었다. 화이트 셔츠에 파리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하필 그 파리가 자연 과목 시간 도록에서 본 곤충 세밀화처럼 털 하나까지 세세해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민소매 셔츠였다. 아쉽게도 굿즈는 잃어버렸지만 중학생이었던 내가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보겠다고 고등학생이라 나이를 속이던 바로 그 순간, 매표대에 가서 까치발을 올리고 “고등학생이에요.” 하고 침착하게 대처했던(잘했어!) 그때의 쿵쾅거림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레어템인데. 타임워프가 가능하다면 대만 청춘물의 주인공처럼 수만 개의 타임라인을 지나 첫사랑 대신 그때 받았던 굿즈들을 싹 다 수거해 오고 싶다.
그러고 보니 첫 영화 관람의 순간이 언제였나,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돌아 돌아 가보면, <드라큘라>였던 것 같은데 이건 확신이 서지 않는다. 흑백 화면에 낯선 형체가 나타날 때마다 너무 무서워 아빠한테 고개를 파묻고 하나도 보지 못했던 기억이 우세하니, 봤다는 말이 무색하지만 그때가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극장 방문이었다. 대학생 때는 <씨네21> 맨 마지막 장에 있던 선착순 무료 관람권을 오려서 줄 서는 게 일이었다. 이걸 얻으려고 잡지를 사고 정기구독도 했다. 좋은 영화를 가장 빨리 접할 기회를 부지런히도 찾아다닌 셈이다. 90년대 들어 그렇게 예술 영화 붐에 합류했다.
훗날 기자 시사회에서 상영 내내 팝콘 대신 볼펜 들고 메모하며 영화를 보고, 마감 노동에 시달리는 직업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던 시절의, 천진하고 순수했던 한 영화광의 영화 섭렵 경로를 잠시 소환해보았다. 어제 일같이 생생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너무 옛날이야기.
<계속>
이화정
前 「씨네21」 기자
前 「필름2.0」 기자
前 「무비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