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건조 Aug 05. 2021

<2화> 예능 PD의 ‘슬기로운 창작 생활’

김미연 PD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슬기로운’ 창작 생활이란?


    고민 끝에 결론, PD들에게 슬기로운 창작 생활이란 불가능하다. 슬기롭게 창작할 수 있다면 이 직업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의구심이 든다. 창작이 혹시 나한테만 힘든 건 아닐까? 누구는 히트작을 빵빵 터뜨리며 스타 PD로 이름을 날릴 때 누구는 창문도 없는 회의실에 앉아 작가들의 한숨 소리만 듣고 있는 것처럼.


    창작은 어떤 꼼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루미큐브(요즘 푹 빠져 있다)처럼 앞 사람이 만들어 놓은 배열에서 내게 필요한 큐브만 쏙쏙 골라내 1등 하는 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창작이다. 흔히들 창작의 고통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고는 한다. 출산까지 10개월이 고통스럽다고 7개월 또는 8개월 만에 출산을 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저 온몸으로 그 고통스러운 10개월을 온전히 견뎌내야 탄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PD에게 슬기로운 창작 생활이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에 오른 예수님처럼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끝까지 가는 거죠”라고 교과서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다. 그 ‘슬기롭다’라는 개념을 프로그램 창작이 아닌 창작 생활에 맞춰 이야기해볼까 한다. 


    영화 인문학 프로그램인 <방구석1열>은 사실 그 잉태 자체가 드라마틱했다. 열 명의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 예능 버라이어티 <전체관람가> 이후 곧바로 기획에 들어간 <방구석1열>은 <전체관람가> 종영 5개월 만에 온에어되었다. 보통 시즌물을 마친 PD들은 한 달 정도 자체 정비(몸과 마음을 리셋하는 과정)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 GV에서 배우들이 “촬영이 끝나고 연기한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는데 PD들도 마찬가지다. 


    반년 이상을 하나의 프로그램에 푹 빠져 살고 나면 종영 이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PD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동시에 다음 프로그램은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에 대한 고민과 조사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3개월 정도의 기획 기간을 가지고 다시 새 프로그램을 연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이 보통 1년 정도다. 그런데 <방구석1열>은 <전체관람가> 종영과 동시에 기획되어 곧장 3개월 만에 녹화를 하고 방송하게 되었으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 프로그램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인 가장 큰 이유는 <전체관람가>를 통해 영화 예능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JTBC에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PD가 있나 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실 조금 민망하긴 하다. 왜냐하면 내 주변만 해도 영화를 나보다 더 좋아하고 많이 아는 PD들이 수두룩 빽빽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매체다. 모든 창작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열광하고 들이파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단지 그런 영화의 힘을 방송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접점을 찾은 것뿐이다. <전체관람가>에서 모습을 보여준 영화의 탄생 과정이 단 12회 만에 정리되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 아직 보여줄 것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았는데! <방구석1열>은 그렇게 ‘더 보여주고 싶은 흥미진진한 영화 이야기‘라는 콘셉트에서 시작되었다.


    <방구석1열>이 좀 더 대중과 가까워지면 좋겠다는 마음에 영화와 인문학을 엮었다. 영화는 결국 우리의 인생이 담긴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 안에 담겨 있는 감동과 재미를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으로 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방구석1열>의 시작은 12회짜리 시즌물이었다. 시즌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단지 12회로 한정된 프로그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불었던 인문학 열풍과 출연해주신 많은 영화인들의 도움으로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고, 그 덕에 200회를 향해 달려가는 장수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보통 방송 회 차가 정해진 시즌물의 경우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PD들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무작정 직진 돌진하게 된다. 하지만 정규 프로그램은 다르다. 종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기에 호흡을 고르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방구석1열>은 일주일에 한 편씩 제작된다. ‘러닝타임 70분 방송을 하나 만드는데 일주일이면 꽤 넉넉한 시간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 심지어 내 직업이 방송 PD라는 것을 알게 된 분들 중에 “어떤 어떤 프로그램을 하시나요?”라고 묻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만약 일주일에 프로그램을 두 개 이상 만들어야 한다면 나는 당장 전우치의 분신술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하면서 가장 갖고 싶은 초능력은 분신술과 순간이동이라고 수만 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 두 가지 능력만 있어도 더 완성도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사실 조연출 시절에는 눈 뜨고 자는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집실에서 며칠 밤을 새우고도 시사실과 회의실에서 꼿꼿이 앉아 있어야 했던 그 시절에는 오로지 잠이 가장 절실했던 것 같다.


    방송이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PD들이 가진 모든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방송을 제작하는 시간에 갈아 넣어야 그나마 한 편을 무사히 완성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일주일에 방송 한 편을 만들기 위해 PD들은 평균 한 주에 이틀 정도 꼬박 밤을 새야 한다. PD인 나도 이 정도인데 조연출들은 오죽할까. 온전히 쉴 수 있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편집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며칠을 달린다. 


    <방구석1열>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과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대본 작업이고 또 하나는 후반 작업(편집부터 온에어되기까지 전 과정)이다. <방구석1열>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한 회에 두 편의 영화를 매칭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두 편의 영화를 묶기 위해 그 외에도 수많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감독 특집을 하게 되면 작업은 더 복잡해진다. 그 감독이 연출한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모든 영화와, 영화의 원작 소설, 그에 대한 평론 다큐멘터리, 그리고 메이킹필름까지 싹 다 몰아 보고 해외 인터뷰 번역본까지 달달 읽어야 대본 한 편을 만족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할리우드 4대 감독 특집>이라는 어마무시한 부제 아래 크리스토퍼 놀란, 쿠엔틴 타란티노, 알폰소 쿠아론, 드니 빌뇌브 감독을 소재로 2회짜리 특집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이 기획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부터 이미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나의 최최최애 감독 네 명을 특집으로 다루다니! 생각만 해도 아드레날린이 뿜뿜 분비되고 홧홧 콧구멍이 확장됐다. 


    그런데 웬걸…… 2주에 걸쳐 네 명의 거장이 만든 데뷔작부터 흥행작까지 모든 영화들과, 각 영화의 메이킹필름과 인터뷰, 그리고 작가들이 준비한 논문 수준의 자료들 앞에서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10년 후에나 찾아올 노안이 들이닥쳤다. 일단 눈부터 병나기 시작했고 영화의 내용들이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회의를 하다 보면 작가들이 “그건 다른 감독의 영화인데요” 하고 지적했다. 그 뒤죽박죽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옥석을 가려 ‘아는 영화의 모르는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방대한 양을 검토했음에도 한 명당 약 15분 내외의 토크로 정리하려니 보니 아깝게 버려야 하는 내용이 속출했다.


    ‘아는 영화 모르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어떻게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고 제목 옆에 덩그러니 달아놓다니…… 이토록 엄청난 정보화 시대에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나서다니…… 그래도 ’아는 영화 모르는 이야기‘가 <방구석1열>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던가. 눈을 비비며 다시 신박한 이야기를 골라내야 했다.


    이렇듯 대본을 엮어내기 위해 차곡차곡 자료를 쌓는 일은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단축하기 가장 어렵다.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서울의 교통지옥을 뚫고 출근해 부서 간 행정 업무도 처리해야 하는 PD들에게는 이 절대적인 작업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지옥이다. 고3 때 선생님들이 이야기했던 사당오락(“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 기억나시는지? 잠깐만 누웠다가 일어나야지 “허읏차…….” 하고 편집실 소파에 꼬부리고 누웠다가 헐! 3시간 후에 눈이 번쩍 뜨여 모든 업무가 밀리는 바람에 관련 부서 사람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던 무시무시한 기억이 있다. 워낙 빡빡하게 돌아가다 보니 한 시간만 스케줄이 밀려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체 스케줄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롭게 창작하는‘ PD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저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구석1열>을 제작한 지 벌써 3년째.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푹 빠져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영화를 보는 것이 내 일이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행복이 어느새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나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매주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정해진 시간 내에 여러 편의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여유를 갖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를 모든 방해 요소가 완전히 차단된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또는 일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시간에 편안히 나만의 공간에서 즐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침에 이를 닦으면서, 머리를 말리면서, 밥을 먹으면서, 간단한 설거지를 하면서, 출근을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까지 박박 긁어 쓰지 않으면 그 많은 영화들을 녹화 전까지 다 챙겨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을 스몸비(Smombie, smartphone zombie)가 되어 걸어 다녀야 그나마 회의와 편집을 할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녹화가 끝나고 나면 3시간 정도 출연자들이 좔좔 이야기한 내용을 영화의 장면들과 잘 섞어가며 토크의 기승전결을 만들어야 하는데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바로 여기서 엄청난 위기와 마주하게 되니 어떻게 해서든 봐내야만 했다.


    인문학 토크에 따르는 영화 장면과 대사 인서트가 딱 맞아떨어져야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감동을, 그리고 무릎을 탁 치는 신박함을 주는 것인데 이쪽이 시원찮으면 영 편집이 밍밍하고 맛이 없다. 미지근한 콜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나는 ‘피유우―’ 탄산이 올라올 때 얼음을 대략 네 개 정도 쏙쏙 넣고 한바탕 저어준 뒤 빨대로 세 번 정도 시원하게 빨아먹는 콜라를 좋아한다. 그런데 밍밍하고 미지근한 콜라라니…… 목이 쓰린 탄산 맛은 있어도 얼음 콜라의 청량감은 없는 것이다. (이야기가 얼음 콜라라는 산으로 더 올라가기 전에 다시 데리고 내려와야겠다…….)


    ⛰⛰⛰⛰


    이렇게 매주를 버티며 꼬박 3년을 <방구석1열>을 만들어온 지금, 제일 아쉬운 것은 영화를 보느라 좋아하는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예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대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하나하나 아껴가며 꺼내보던 영화를 이제는 의무적으로 보고 있다니 왠지 서글퍼진다. 하지만 모든 것에 양날이 있듯 <방구석1열>을 하며 고치게 된 악습관도 있다. 바로 영화를 편식하는 습관이다. 좋으나 싫으나 일 때문에라도 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그간 편식하며 놓쳤던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날이 많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다. 아마 <방구석1열>을 만들지 않았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방구석1열> 담당 PD는 엄청난 영화 박사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좀 겁이 난다. 나는 오히려 영화 블로거나 유튜브 쪽에서 난다 긴다 하시는 분들과 붙으면 1분도 안 돼서 KO 당할 수준이다. 좋은 영화를 많이 봐서 <방구석1열>을 만든 것이 아니라 <방구석1열> 덕분에 나도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나에게도 참 특별한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을 오롯이 영화광으로 살아야 하는 영화 프로그램 PD로서 실감한 슬기로운 영화 프로그램 창작 방법은 영화를 틈날 때마다 성실하게 꾸준히 보는 것이었다. <방구석1열> 1기 회장인 윤종신 선배가 그 바쁜 일정에도 잠도 자지 않고 녹화 당일까지 영화 네 편과 관련된 다큐멘터리까지 모두 챙겨보고 녹화를 했듯이 말이다. 나 역시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영화를 보려 애쓰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짬짬이 그리고 부분부분 나눠서라도 끝까지 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 그리고 명장면과 명대사를 메모하며 기억해두고 있다.


    ‘슬기롭게 시간을 쓴다’라는 것이 요령처럼 해석되는 것이 나는 싫다. 꾸준히 노력하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시간을 쓰는 것이 바로 슬기롭게 사는 것이고 또한 PD들에게도 슬기롭게 창작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겠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내일도 시간에 쫓겨 어쩔 줄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뛰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나의 지향점은 오직 하나다. 


    “꾸준히 노력하고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마라.”


    그것이 바로 예능 PD의 슬기로운 창작 생활일 것이다.




    <계속>




    김미연 PD

    JTBC <방구석1열>

    JTBC <전체관람가>




매거진의 이전글 <1화> 어디까지나 너무 옛날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