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영화기자
잡지를 받았다. 「키노」였다. 당시 나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부모의 돈을 탕진해가며 어학연수라는 값비싼 유랑을 즐기고 있었다. 「키노」를 보낸 건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동아리 출신이면서 지금 이 책을 함께 쓰고 있는 주성철이었다. 1995년 창간한 「키노」는 「씨네21」과 함께 90년대 영화광들의 바이블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샀다는 점에서도 바이블이었다. 끝까지 읽어내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것도 바이블이었다. 주성철은 「키노」의 기자가 됐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주성철의 글을 찾아서 읽었다. 이게 뭔 소리래. 편집장이 대체 얼마나 뜯어고친 거야. 그래도 타국에서 한글로 된 영화잡지를 읽는 건 정말이지 기쁜 일이었다.
나는 199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학과는 행정학과였다. 내가 행정에 관심이 있었을 리가 만무하지. 그저 수능 점수가 꽤 잘 나왔다. 부모님은 안전한 학과를 선호하셨다. 나는 입학원서를 넣는 날까지도 어떤 과를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원서를 넣는 입구에서야 “니 점수면 가능하다네”는 엄마의 말을 듣고 행정학과에 지원했다. 어차피 나에게 대학은 별 상관없었다. 학과도 상관없었다. 1994년이었다. 4년제 대학만 나오면 취직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호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호시절은 호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결심했다.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야겠어. 온갖 동아리가 교정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테이블을 내놓고 회원을 모집했다. 영화 동아리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영화연구회’였고 하나는 ‘새벽벌’이었다. 영화연구회라니 너무 게으른 작명이 아닌가 고민하면서도 나는 영화연구회에 지원했다. 새벅벌 선배들은 뭐랄까, 입은 옷의 색이 너무 침침하고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해 보였다. 나는 진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연구회 선배들은 엑스세대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엑스세대처럼 옷을 입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하여간 나는 가벼운 쪽을 선택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선택은 옳았다. 새벽벌은 ‘민중을 위한 영상 제작 동아리’였다. 그들은 시위 현장에 엄청나게 무거운 캠코더를 들고 뛰어다녔다. 영화연구회는 ‘놈팽이들을 위한 영화 감상 동아리’였다. 영화를 그렇게 진지하게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빌린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산꼭대기에 있던 학생회관의 동아리방으로 갔다. 주성철은 홍콩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홍콩 영화는 영 당기지가 않았다. 대신 존 카펜터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을 들고 갔다. 주성철의 홍콩 영화 상영회가 끝나면 나는 <비디오드롬> 같은 영화를 담배를 뻑뻑 피우며 반복적으로 봐댔다. 하여간 호시절이었다. 누구도 토익이나 토플 공부를 하지 않았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노는 게 대학생이야.” 선배들이 말했다. 나는 매일매일 영화를 먹었다. 폭식이었다.
제대하자 IMF 사태라고 불리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었다. 한국은 망했다. 나는 도피하듯이 캐나다로 갔다. 1999년이었다. 주성철이 「키노」를 매달 보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약간의 질투를 느꼈던 것도 같다. 내가 캐나다식 영어 발음 따위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부모의 돈을 매일매일 스타벅스 프라푸치노에 바치는 동안 친구는 영화 잡지사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구나. 그때부터 나는 영어 학원이 끝나면 곧바로 밴쿠버 시내에 있는 극장으로 갔다. 거기서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을 보며 환호했고 리들리 스콧의 <한니발>을 보며 구역질을 했다. 로버트 제메키스의 <왓 라이즈 비니스>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갓 개봉한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는 함께 간 러시아 친구와 함께 꺼이꺼이 울었다. 친구는 슬퍼서 울고 나는 영화에 관한 일이 너무 하고 싶어서 울었다. <빌리 엘리어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화인지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아니,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왔더니 어럽쇼, 한국은 심지어 더 망한 상태였다. 누구도 동아리방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모두가 도서관에 있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다시 영국으로 도피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쯤 ‘이 글은 무슨 중산층 엑스세대 낑깡족의 해외 도피 기록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영국에서 취업을 했다. 학교에서 잘린 아이들을 위한 2차 교육기관에서 보조 교사로 일을 했다. 맞다. 나는 도피했다. 내 의지라고는 전혀 없이 행정학과를 선택했다. 대학에 머무는 시간을 벌고 싶어 캐나다 어학연수를 선택했다. 그리고 망해버린 한국을 피해서 영국을 택했다. 나는 그냥 영국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 없이 그저 타국에서 익명성을 즐기며 주말에는 클럽에나 가는 현재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현재는 언젠가는 미래가 된다. 영원히 현재에 머무르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인생은 두 시간짜리 영화가 아니다.
어느 날 영화 개봉 정보가 있는 주간지를 샀다. 그런저런 영화들이 개봉 중이었다. 한 개봉작의 정보가 눈을 잡아끌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국말로 해석하자면 “필립 K 딕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레이건 시절의 시간 여행 판타지”라고 쓰여 있던 것 같다. 그걸 보려면 시내가 아니라 시외의 쇼핑몰로 가야 했다. 나는 몇 달 전 닛산 스카이라인이라는 오래된 스포츠카를 헐값에 사서 매일매일 닦아대던 하우스메이트에게 말했다. “일주일간 네가 좋아하는 볶음밥을 해줄 테니까 오늘 밤에는 쇼핑몰에 같이 가서 이 영화를 봐줘야겠어.” 요리라고는 일본산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붓는 행위말고는 할 줄 모르던 친구는 대번에 오케이를 했다. 우리는 30분을 차를 몰아 겨우 쇼핑몰에 도착했다. 친구가 그제야 물었다. “헤이. 근데 영화 제목이 뭐야?” 나는 티켓을 보면서 대답했다. “도니…다르코?”
맙소사. 이건 그냥 ‘시간 여행 판타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도니 다코>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리처드 켈리라는 신인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정말이지 기묘한 영적 체험이었다. 한 번도 영화에서 본 적 없던 신인 배우 제이크 질런홀이 밤마다 꿈에서 토끼 가면을 쓴 인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세상은 곧 멸망할 참이었다. 레이건 시절의 미국은 번드르르하게 미쳐 있었다. 교외의 고등학교는 끔찍한 호르몬의 소굴이었다.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영화관에 불이 켜지자 친구는 “XX 이거 XX 센 대마를 핀 느낌이네”라고 말했다. 나는 XX 센 대마를 피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그 말이 이해가 됐다. 닛산 스카이라인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똑같이 생긴 재미없는 주택 단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영국 교외의 풍경은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XX 이런 게 영화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건 불운의 결과였다. 영원히 영화처럼 도피하고 싶은 삶은 영국 정부가 나의 취업 비자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끝이 났다. 나는 짐을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키노」는 2003년에 망했다. 주성철은 주간지 「필름 2.0」의 기자가 됐다. 나는 매주 「씨네21」과 「필름 2.0」을 사 보며 매일매일 극장에 갔다. 엄마의 눈은 ‘너는 4년제 대학에 캐나다, 영국까지 보내줬는데 대체 뭘 하고 살 작정이냐’라고 매일매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하고 극장의 안락한 어둠 속에 현재를 맡겼다. 집에 돌아오면 온갖 예술 영화들을 다운로드 받아서 삼키고 또 삼켰다. 나는 도무지 영화라는 환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놈팡이로 몇 개월을 살던 어느 날 ‘다음 취업 정보 카페’의 글들을 검색하다가 기막힌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영상 주간지 「씨네21」이 취재, 편집, 산업 기자를 모집합니다.” 원서 마감은 모레였다. 나는 스칼릿 조핸슨이 특유의 몽롱한 눈으로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는 백수의 영혼’을 연기하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마침 본 참이었다. 밤새도록 그 영화의 리뷰를 썼다. 고치고 또 고쳤다. 고친다고 좋아질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원서를 합격과 불합격으로 분류하는 「씨네21」 기자들의 눈에 띄도록 고쳤다. 나는 자기소개서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리뷰를 프린트해서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직원에게 나는 입으로는 “최고로 빨리 가는 걸로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눈으로는 ‘당신의 일 처리 속도에 제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국 우체국의 일처리 속도는 놀라웠다. 며칠 뒤 나는 시험을 보러 오라는 「씨네21」 직원의 전화를 받고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건 바로 그 주 주말이었다. 직원이 말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실 수 있나요?”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서울에 월셋집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일주일만 시간을 더 주실 수 있나요?’라는 말이 도무지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다음 날 나는 급하게 홍대에 에어컨도 안 달린 일곱 평짜리 원룸을 구했다. 그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선배 기자와 장동건 인터뷰를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동아리방에서 영화를 주워 삼키던 90년대는 끝났다. 2000년대가 시작됐다. 누군가가 “취미는 뭐예요?”라고 물으면 “영화 감상입니다”라고 20년간 답하던 나에게 영화는 마침내 업이 됐다. 취미가 업이 되는 순간 취미는 좀 재미없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나에게 취미였던 적이 없었다. 영화는 선생이었다. 친구였다. 연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인생이었다.
2009년의 어느 날 나는 40매짜리 원고를 토하듯이 마감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김도훈 기자님. 저희가 이번에 새로 DVD를 출시하는데요, 해설지를 좀 써주실 수 있나요?” “무슨 영화인가요?” 그는 말했다. “<도니 다코> 감독판입니다.” 나는 소리 내 웃었다. 운명이었다.
<계속>
김도훈
前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前 「GEEK」 피처디렉터
前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