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탁 음악평론가
인생은 ‘어쩌다 보니까’의 연속이다. 지난 45년을 돌아보건대 삶의 터닝포인트마다 끼어든 건 거의 예외 없이 ‘어쩌다 보니까’ 선생이었다. ‘어쩌다 보니까’ 선생은 참 능글맞기도 하다. 예의 그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면서 스윽 한 자리를 꿰차더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 삶의 궤도를 수정했다. 과연 그렇다. ‘어쩌다 보니까’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선생은 수시로 내 삶의 경계를 침범했다. 인간 관계에서도, 내 직업 커리어에 있어서도 기실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건 내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어쩌다 보니까’ 선생이었다. 우리는 착각을 하고 산다. 나는 자유인이며 내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확신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한번 곱씹어보길 바란다. 내 자유의지로 결단했다 생각하더라도 뒤돌아보면 늘 외부의 힘에 의해 결단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 어쩌면 우리가 결단할 수 있는 건 지극히 사소한 영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쩌다 보니까’ 선생의 노예다.
영화 관련 일이 특히 그랬다. 심지어 이때 ‘어쩌다 보니까’ 선생은 아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이름까지 버젓이 달고 나타났다. MBC 라디오국 프로듀서인 송명석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10년 말이었을 거다. 송명석 PD가 (가뜩이나 덩치도 큰데) 성큼 나에게 오더니 다음과 같은 제안을 던졌다.
“순탁 씨, 정엽이랑 영화 얘기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일주일에 한 번씩.”
처음에는 ‘저 사람이 미쳤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진지했다. 자기 나름대로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이후 경험 삼아 해보자는 심정으로 1년 넘게 당시 푸른밤 DJ였던 정엽과 방송을 했다. 아마 당신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 대해 별다른 공부도 한 적 없는 내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덜컥 수락을 할 수 있는 거냐고. 그거 좀 무책임한 거 아니냐고. 혹시 돈을 너무 밝히는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나 그렇게까지 뻔뻔한 놈 아니다. 일을 할 때 나만의 대원칙이 하나 있다면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한다”이다. 가히 비트겐슈타인 뺨칠 만큼 이 원칙, 지금까지 제법 잘 지켜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행여 가끔씩 힙합 관련한 인터뷰가 들어오면 백 퍼센트 거절한다. 나는 힙합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저 방송 들어본 라디오 청취자라면 알겠지만 영화 문법에 대해 설명하는 코너가 아니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곁다리, 영화에 삽입된 음악 얘기를 주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영화를 주제로 삼는 건 이 코너로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전화가 또 온 것이다. 전화를 건 쪽은 KBS 영화 소개 프로그램 <영화가 좋다>였다. 요약하면, 나에게 코너 하나를 부탁하고 싶다는 거였다.
이후부터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건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확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영화 관련한 일이 들어오면 일단 각도기부터 쟀다는 거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인지 아닌지, 견적을 철저하게 점검했다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도 ‘어쩌다 보니까’ 선생께서 잠시 침입해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공해줬다. 김세윤 작가와 함께 영화가 끝난 뒤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를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김세윤 작가는 영화 전문지 「필름 2.0」 기자 출신이다. 이후 <출발! 비디오 여행>과 <FM 영화음악> 작가를 거쳐 현재는 라디오 DJ까지 맡고 있다. 요컨대 영화 전문가란 소리다. 이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김세윤 작가와만 대략 50번이 넘는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김세윤 작가가 영화 얘기를 하면 내가 음악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식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 둘, 제법 잘 어울린다고 한다. 꿍짝이 내가 봐도 나쁘지 않다. 내가 그를 ‘영혼의 파트너’라고 부르는 바탕인데, 요즘 이를 주성철 (전) 편집장으로 바꿀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주성철, 그의 매력에는 정말이지 한도 끝도 없다. 가히 악마와도 같은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이제 당신도 어느 정도 감 잡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무비건조>에 출연할 때마다 다음처럼 강조한다. “저는 영화 전문가가 아닙니다”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적어도 내 일에 관한 한 나는 사짜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주위의 도움은 필수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 한 명에게 유튜브 영화 채널 하나 파자고 의뢰가 왔다면 장담할 수 있다. 조금의 여지도 없이 “전 능력 부족으로 인해 못 합니다”라고 거절했을 거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는 김도훈, 이화정, 주성철 이 세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방구석 1열>에 출연해서도 마찬가지다. 바로 옆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변영주 감독님이 있는 덕에 나는 음악 관련한 얘기만 해도 출연료 받는 만큼은 하는 셈이 된다.
함께 써질 이 글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줬으면 한다. 나는 철저하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쓸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끝끝내 침묵할 것이다. 아무리 ‘어쩌다 보니까’ 선생일지라도 이것만큼은 훼손하지 못한다. 내가 바로 비트겐, 아니 ‘배’트겐슈타인이다.
<계속>
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B사이드] 진행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비사이드>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