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by 이게바라

死월 이야기(트리트먼트)





> 등장인물 <

나, 유수연. (34세) 전업주부. 전 상담원.

그, 이시온. (32세) 수연의 남편. 그림동화작가.

은아. (5세) 수연과 계석의 딸.

연수. 곧 태어날 수연 배속의 사내아이.

차분홍. (34세) 수연의 고등학교 동창.

승영상. (56세) 분홍의 남편.

신누리. (17세) 소녀보살

방계석. (35세) 수연 전남편.

신만식 형사. (40대 초)

이호민 형사. (30대 초)

그 외.



- 1 -

책장을 넘겨본다. 그림동화책이다. 털 한가닥한가닥까지 가는 선으로 그려진 생쥐의 모습은 동화속 주인공으로는 다소 징그러워 보이나 보다. 효연이가 인상을 쓰니 말이다. 언제나 책의 첫 독자는 나와 효연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권에서 끝나는 것에 비해 이번 이야기는 상, 하 두 권 두 권으로 기획된 이야기다. 그 중 첫 권이 오늘 나왔다. 물론 내용전개는 늘 함구에 붙이는 그이기에 책장을 열고서야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됐다. 이번 그림동화는 그림체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도 그렇지만 주인공 생쥐가 겪는 이야기가 그의 어린 시절과 흡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주인공 생쥐, 나비는 - 생쥐의 이름이 나비라니 역시 그답다. - 엄마쥐에게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왜냐하면 나비는 동네의 악으로 대변되는 괴물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생쥐 나비가 태어난 것이란다. 지금 막 생쥐 나비가 사명을 갖고 탄생했다는 엄마쥐의 설명이 이어지는 대목이다. 일테면‘매트릭스’의 토마스 앤더슨에게 모피어스가 찾아와 그가 곧 메시아, 네오임을 말해주는 상황인 거다. 어린 시절 수녀님 밑에서 신부수업을 받으며 자란 그의 일상을 재구성한 얘기리라. 그래서 그런지 사뭇 내용이 궁금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책장을 덮기로 한다.

책장을 덮으니 표지가 드러난다. 제목 ‘나비의 사명’ 커다란 제목 밑 하단에 글, 그림 양연호라 적혀있다. 양연호, 이 세 글자로 표기되는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다. 맘 같아서는 이름 옆에 잘 생긴 그의 사진이라도 박아두고 싶은 심정이다. 앗! 지금 동화책을 전해준 택배기사가 나를 재촉한다. 요금을 계산한 나는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선다. 이제 산달이 다 되어서인지 몸이 무겁다. 효연은 동화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엎드려 책장을 펼친다. 이번만큼은 효연이에게 첫 독자자리를 양보해야 할 듯하다. 나는 이삿짐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담달이 산달인데 이사라니. 하지만 포장이사가 이렇게까지 정리를 잘해주는 줄은 몰랐다. 하긴 그가 웃돈을 올려주며 특별히 부탁했을 터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고맙다. 자신의 작업실까지 정리하며 방이 네 개나 되는 넓은 새 아파트를 마련했으니 말이다. 분양이 한참인 이 아파트는 새로 시공된 아파트로 분양가가 너무 비싼 대다가 동이 달랑 한 동인 아파트라 쉽사리 분양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몇 가구 되지 않는 이웃주민들이 무척 친절하게 우리 식구를 반겨주신다. 거기다 세심한 것 하나하나 신경을 써주는 모습이 그냥 인사치례가 아님을 알겠기에 적잖이 감동을 했었다. 참! 그의 팬이라 자처하는 독자분이 도움을 줬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시세보다 훨 낮은 전세가로 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대출을 다 갚는 3년 후면 이 집은 우리 집이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물론 그때 또 대출을 받아야 되겠지만, 어찌됐든 바로 이 집이 어쩌면 평생을 살아야 될 우리 집인 것이다. 그랬기에 독자의 호의가 부담이 되었지만 이렇게 이사를 감행한 것이다. 하긴 이 모든 일의 진행에는 그의 의지가 컸다. 그는 이제 한시도 가족과 떨어지지 않겠단다.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도 함께 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내 친애하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 자주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대사를 인용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거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미안하다, 고맙다, 라고 예를 갖춘 말따윈 필요 없어요. 왜겠어요? 사랑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를 의미해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가족이구요. 그러니 가족끼리는 더더욱 그런 말이 필요 없죠.”

그는 아직도 나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럼 나는 이렇게 받아친다.

“그런 당신은 왜 나한테 존댓말을 해서 예를 갖추는데?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그럼 그는 늘 존댓말로 말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며 시무룩해한다. 그 누구에게도 반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그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단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가 혼잣말로 ‘시발 좆도’ 라고 말하는 것을 수녀님이 들었단다. 그 후 그는 육일 밤낮을 수녀님과 기도실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때 반말과 욕을 모조리 기도실에 두고 나왔다는 것이 그의 얘기다.

전화벨이 울린다. 그다. 오고 있는 중이란다. 너무너무 미안하단다. 이삿날 옆에 없어서. 이번 ‘나비의 사명’이 예정보다 일찍 출판되면서 급하게 잡힌 인터뷰 때문이라며. 거듭 미안하단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는데도 미안하다는 말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허밍으로 ‘러브 스토리’의 테마송을 불러 본다. 눈밭에서 눈싸움을 하며 사랑을 나눌 때 흘렀던 바로 그 음악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미안하다는 말 하는 거 아냐. 특히 가족끼리는.”

웃는 그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이 동네 전체에 벚꽃이 피었다. 조그맣게 보이는 텅 빈 놀이터에 금방 주인을 잃은 그네만이 흔들흔들 아쉬움에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속을 확 뚫어주는 느낌이다.

‘우리 집은 나름 팬트하우스잖아’라며 그가 이 아파트를 처음 소개한 설명인 것처럼 지대도 높은데다가 맨 꼭대기 층에서 전망이 근사하다. 지금 거실에서는 그가 효연에게 ‘나비의 사명’을 읽어주고 있다. 표정까지 일그러트리며 구연동화에 여념이 없는 그. 하긴 그가 동화작가가 된 사연도 자신의 아이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라고 말했었다.

띵똥~ 벨소리다. 그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연다. 요즘 그는 모든 일에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내 몫까지 일을 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그를 이렇듯 자대에 막 배치된 이등병처럼 만든 것이다. 벌써 몇 번째 그가 이렇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첫 방문은 신문을 보라는 보급소 사장님이 돈이 든 봉투를 들고 찾아왔다. 신문을 보면 현금을 주겠다니. 나는 얼마 들어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하고 문을 닫았다. 다음은 교회에서 전도사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이 역시 여지조차 주지 않고 문을 닫았었다. 이번엔 또 누가 찾아온 걸까? 그가 문을 열자 내 또래의 여인이 바구니에 딸기를 들고 서 있다.

“이사하셨다구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 임산부한테는 과일만한 게 없죠.”

“네 안녕하세요. 저희가 먼저 인사를 드려... 어..!!”

딸기를 든 여인은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어디서 봤더라? 내 머릿속 기억을 헤집고 있는데 딸기를 든 여인이 바구니를 그에게 맡기고는 나를 와락 껴안는다.

“유연수! 나 알아보겠니?”

동창 차분홍. 나의 존재감 없던 학창시절 돋보였던 아이.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는데 서로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아이다. 그녀의 자리는 늘 창가 맨 뒷자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다.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긴 생머리를 날리는 모습. 그 모습이 내 머릿속에 각인 된 것이 올바른 기억일 거다. 이쁘다기 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행동이 와일드 했다. 입도 걸었고. 하지만 상스럽게 소리치는 욕이 아니라 비웃듯 상대를 내리까는 그런 욕이었다. 그렇게 낮은 목소리를 내뱉는 욕이 그리 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분홍일 나는 왜 먼저 알아보지 못 했을까? 지금 보면 생김새는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글쎄 그게 뭔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아줌마 집에 놀러 갈래?”분홍이 효연을 안아들고 볼에 뽀뽀를 한다. 얼굴을 뒤로 빼는 효연은 지금은 독서중이라며 정중히 사양한다. 독서중이라는 말이 귀여운지 분홍은 효연의 입술을 찾아 뽀뽀하려고 하지만 효연은 아예 손으로 분홍의 얼굴을 밀어낸다. 저항을 무릅쓰고 뽀뽀에 성공한 분홍이 내 손목을 잡아챈다.

“양작가님~ 저녁은 저희 집에서 드셔야 하니까 좀 있다 내려오세요.”

분홍이 태교에 좋은 음악이라며 리모콘 버튼을 누르자, 한정판 뱅앤올룹슨 스피커에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가 흘러나온다. 분홍의 집은 같은 아파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어디 강 건너 타워팰리스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본적도 없는 북유럽 풍의 빈티지가구와 집안 구조 자체를 리모델링해 정말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느낌이다. 방하나를 터서 만든 서재분위기의 공간에 넓은 책상을 본다. 그에게도 이런 책상이 있으면 좋으련만. 널찍하지만 아기자기한 느낌마저 나는 책상을 꼼꼼히 살펴보는데, 책상 밑면에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뭐라 발음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이름.. 아마 이 가구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이름일 것이다. 또한 이름을 새겨 넣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점자를 읽는 시각장애자처럼 나는 손가락 끝 감각으로 디자이너의 이름을 읽으면서 불쑥 이렇게 집구조를 바꾸는 거 불법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분홍은 대형냉장고에서 얼려진 음식봉지를 꺼낸다. 일주일 두 세 번 오는 가사도우미 아줌마 요리솜씨가 꽤 괜찮다는 설명과 함께. 요 근래는 남편이 출장 중이라 혼자 저녁 먹기 싫었는데 잘 되었다고. 자연스레 분홍의 이야기는 남편, 승영상박사 자랑으로 이어진다. 분홍은 자신의 남편을 승박사라 칭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남편 호칭에 박사라는 직위가 따라붙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 학창시절 판타지 속 분홍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나는 승박사가 즐겨 듣는다는‘니벨룽겐의 반지’을 피해 양장본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꽂이 앞에 선다. 물론 책을 보는 건 아니고 책꽂이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빈티지 장신구를 보는 것이다. 여전히 대형스피커서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잘난 척이 이어지고 있다. 더 듣다가는 태교에 안 좋을 것 같다. 리모콘을 찾아 음악을 끄려는 찰나 책꽂이 사이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분홍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 그들의 배경으로는 동유럽 거리가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국적인 배경이 아닌 남자의 헤어, 더 정확히는 헤어스타일이 아닌 머리색깔. 백발이 성성한 남자의 머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누구?”

“승영상박사지. 누구겠니.”

지금껏‘니벨룽겐의 반지’를 들으며 남편, 승박사의 자랑을 듣고 있던 내게 이 사진은 작은 반전이었다. 아니다. 그러고 보면 전혀 반전이랄 게 없다. 분홍이 말했던 설명과 맞아 떨어지는 결말이다. 많은 재산에 비해 겸양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 학식, 그리고 교양. 무엇보다 나무랄 데가 없는 성품. 이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나이가 이 정도는 돼야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지.. 승영상박사님 나이가..?”

난 결국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만다.

잠시 말을 멈춘 분홍이 입을 뗀다. 그 말이 내게는 진정한 반전이었다.

“너네 전셋집 우리 승박사 꺼야.”

그러고 보면 분홍은 일찍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학창시절 존재감 없던 나를 그리도 빨리 기억해 낸 거다. 그렇담 왜 첨부터 아는 척을 하지 않은 걸까? 이 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분홍은 남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쏟아 놓는다. 자신은 재혼이고, 승박사는 초혼이었다고. 심지어 남편은 숫총각이었다는 내가 알 필요도 없는 사실까지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나는 숫총각이라는 말에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승박사의 성기능까지 걱정해야 했고, 그런 의구심을 눈치 챈 분홍은 승영상박사는 자신과 결혼하기 전까지 성직자였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자신과 승박사는 영혼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자신의 영혼은 결혼과 함께 승영상박사에게 바친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분홍은 마치 간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감동에 겨워 눈물까지 그렁그렁 거린다. 조금 당황스럽다. 하지만.. ‘개그프로’의 한 장면처럼 당황하지 않고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다. 마침 바람이 분다. 3층인 분홍의 집 베란다로 벚꽃잎이 날아든다.

“아~ 이뻐.”

날아오는 꽃잎을 손바닥을 벌려 받아 본다. 손바닥에 사뿐히 앉는 벚꽃잎이 내 온 몸을, 내 심장을, 내 마음을 감싸주는 느낌이다.

내 앞에서 눈물을 떨어트리는 분홍이. 14년 전 그녀의 긴 생머리는 항상 하늘거리는 바람에 휘날렸고, 학교 앞에는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더라도 오토바이 탄 오빠들이 줄을 섰었다. 주로 가죽옷을 입은 오빠가 건네는 헬멧을 쓸 때나 벗을 때 항상 고개를 젖혀 긴 머리를 휘날렸던 것 또한 기억에 생생하다. 분홍이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을 때 나는 뭐하고 있었던가? 바람에 머리라도 휘날릴까 항상 반듯하게 귀 뒤로 머리를 넘기던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집에서, 10대라는 나이에서, 아버지에게서.

그때의 기억은 신화 혹은 농담, 웃기지도 않은.

비닐에 담긴 얼려진 음식이 해동되어 식탁에 오르자 본연의 위용을 드러낸다. 나와 그, 효연은 동네 중국집 짜장면과 탕수육을 저녁으로 생각했던 터라 만족감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만족감은 포만감으로 이어지고. 디저트까지 내어놓은 분홍은 저녁을 배불리 먹였으니 나와 그의 사랑 얘기를 이실직고 하지 않으면 집에 보내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와 그를 본다. 나는 분홍에게 그를 얘기한다. 그와 어떻게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털어 논다.

그와 만난 것은 내가 ‘희망의 전화’에 상담원으로 봉사하던 시기다. 그는 내게 상담을 받던 사람이었다. 딱히 고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는 외롭다 했다. 그랬기에 그는 늘 가족을 원했다. 그의 어머니는 수녀였다. 율리아나라 불리는 수녀는 그의 어머니일 때 이미 수녀의 직분은 아니었다. 그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 수녀의 직분까지 버렸다기도 하고. 그를 임신하여 수녀 직분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지금도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녀는 늘 수녀의 복장으로 사셨고, 심지어 그녀를 따르는 신도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공동체 생활 속에 자란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갈망하며 자란 것이다.

분홍에게 이 모든 얘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얘기를 들으면 궁금증만 더 해갈 것이기에. 그저 상담원에게 속내를 터놓다가 만나게 된 거이라고 말할 밖에는. 그렇게 자주 나라는 상담원만 찾아 상담을 하던 그가 하루는 핸드폰을 들고 희망의 전화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상담을 했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상담을 했으니, 그 당시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퇴근하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다. 저녁이나 하면서 상담하자고. 전화비 좀 아끼자면서.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엔 늘 깍듯한 존댓말이 좋았다. 조금 저어 된 것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는 거. 한편으론 그게 뭐 대수냐 생각되었다. 그러다가는 그냥 저녁이나 먹는 거 같고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싱글맘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그래서 다시 상담원의 자세로 돌아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마주 보고 있어서인지 친구같다는 생각, 차라리 친동생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친절하고 착한 남동생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효연이에게 그 같은 삼촌이 있다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물론 이 모두를 분홍에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분홍은 나와 그가 저녁을 먹는 순간까지만 알면 될 것이다. 내가 분홍의 남편 성기능을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 2 -

병원에는 이미 분홍이 와 있다한다. 학창시절 가까이 하기 힘들었던 친구가 지금은 나를 끔찍이도 챙긴다. 아! 생각난다. 그 시절 분홍이 내게 말을 걸었던 유일한 기억이.

“생리대 있니?”

맞다! 이것이 분홍이 내게 유일하게 걸었던 말이다. 생리대 있냐고 물은 분홍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에서 생리대를 빼갔다. 생리대를 들고 교실문을 나가는 분홍의 뒷모습을 보고 혼자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분홍은 내가 생리중인걸 알고 있었던 거다. 이 사실이 왠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새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서는데, 박영찬이 서 있다. 나는 순간 숨이 멎는다. 박영찬이라는 내 앞을 가로막는 이자는 나의 전 남편이다. 그렇다. 효연이의 친 아빠다. 영찬은 내게 봉투를 내민다. 나는 그 봉투가 무엇인지 안다. 무엇인지 알기에 받지 않는다. 영찬의 인상이 구겨진다.

“니 앞에서 사지가 갈라져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뭘 바라는데? 효연이라면 안 돼!”

“나 아빠야. 아빠가.. 그래 좆도 자격 없는 거 나도 알아. 씨발 근데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는데 그게 안 돼~ 씨발. 얼굴이나 함 보게 해달라구. 아빠라는 거 밝히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박영찬. 잘 생각해봐. 니가 나하고 배속의 효연이한테 어떻게 했는지. 근데 어떻게 니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지... 하긴 너란 인간 이제 알 필요도 없으니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 지금 병원 가야하니까 비켜~”

“야이~ 씨발년아 넌 또 있잖아! 다 가졌잖아!! 다 필요없고 니 남편한테 나 왔다고 말해.”

박영찬에게 붙들린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영찬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찼다. 분노..? 아니다. 그건 외로움일 거다. 외로움이 가득 찬 눈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그가 번 것이다. 것도 아주 부지런히.

“왜? 번번이 봉투에 돈 넣어주니 좋니? 좋아?”

영찬의 손아귀에 힘이 가해지면서 나에게 고통이 전해온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도 영찬의 눈을 똑바로 직시한다. 이제 너 따위가 휘두르는 폭력이 무섭지 않다는 걸 나의 시선이 확고하게 말한다. 영찬은 나의 시선에 굴복당해 손아귀 힘이 풀려간다. 그러다 돌연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린 영찬이 나를 때리려 한다. 돌덩이같은 주먹이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손이 풀려 한결 평온해진 나는 영찬을 보며, 가족을 잃은 유기견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때 누군가가 영찬의 어깨를 잡는다. 영찬이 뒤를 바라보면서 영찬의 넓은 어깨에 가렸던 남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백발의 머리를 한 남자, 승영상박사다.

승영상박사는 조용한 어조로 영찬을 자제시킨다. 승박사의 조용한 어조에 기가 눌린 영찬은 대뜸 승영상의 멱살을 움켜쥔다. 기가 눌려 오히려 폭력을 앞세우는 영찬이 나는 차라리 불쌍해 보인다.

“이 씨발 늙은이가 죽고 싶나?”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는 영찬에 전혀 기가 눌리지 않는 승영상이 지그시 눈을 감자, 어느새 나타난 수위아저씨를 비롯한 이웃사람이 영찬을 둘러싼다.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악에 바쳐 욕을 해대는 영찬은 승영상의 멱살을 놓는다. 자기가 물러나는 표시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 봉투를 건넨 영찬은 돌아선다. 영찬이 준 봉투는 안 봐도 안다. 유서다. 유서의 내용은 죽기 전에 효연이를 만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영찬은 수차례 이러한 유서를 남겼고, 그때마다 그는 유서를 남긴 봉투에 돈을 채워 영찬에게 건넸다. 그것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아니면 영찬의 말처럼 자신의 죽음을 알릴 사람이 나와 효연이 밖에 없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다시는 도움 따위는 주지 말라하였다. 그럴수록 영찬은 쥐새끼처럼 우리가족 주위를 얼씬 거릴 거라고 말이다. 나는 봉투를 쥐고 영찬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승영상박사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미 승영상박사는 보이지 않는다. 출장에서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는가 보다. 나는 병원 예약시간에 늦어 발걸음을 서두른다.

병원에 늦은 터라 분홍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바로 검사실로 향한다. 앞장서는 분홍을 간호사가 제지한다. 이곳은 임산부만 들어가 검사를 받는 곳이라고. 그럼에도 한사코 들어오는 분홍이다. 나는 분홍의 손을 잡는다. 근래의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아직은 우리집이 아니지만 곧 스위트홈이 될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배속에는 그렇게 바라던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거기다가 내 학창시절 판타지인 분홍이 지금 내 옆에 있다. 나는 분홍에게 승영상박사 만난 이야기를 한다. 벌써 출장에서 온 거니? 언제 다 모여 식사해야지 등. 가랑이를 벌리고 검사를 받으면서도 나와 분홍의 수다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 심연 속에 꽁꽁 숨겨놓고는 말이다.

병원에서 나온 나는 분홍을 이끌고 미아리로 향한다. 미아리 점집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냥 점집이 아니다. 최근 블로그에 용한 점집으로 한참 뜨는 그야말로 핫한 집이다. 분홍은 점집이 달갑지 않은 눈치다. 하지만 곧 소녀보살을 마주한 분홍의 눈빛이 달라진다. 분홍의 소소한 것까지 톡톡 맞춰나가는 소녀보살. 분홍은 점점 소녀보살의 신통력에 빠져든다. 사실 소녀보살, 민영이는 나에게 상담을 받은 인연으로 그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당시는 중학생이었으나, 이제 어엿한 소녀보살로 10대의 나이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실 나에게 상담을 받은 사람 중에서는 남편이 된 그보다도 민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내게 상담한 내용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자신의 몸 안으로 웬 아저씨가 들어왔다는 말에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그 아저씨가 일제강점기에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내라는 말에는 장난전화인줄 알았던 것 하며. 그지만 지금의 민영이는 일제강점기의 억울한 아저씨가 있을 때 보다는 없을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어쩌면 영영 떠나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민영의 설명이다. 현재 민영은 그 일제강점기의 아저씨와는 접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분홍의 고등학교 남자관계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전적으로 나와 접선을 했기 때문이다. 카톡으로. 이 사실을 안 분홍은 분해하기보다는 재밌었다고 깔깔 웃음 짓는다. 약속이 있다는 민영은 장삼을 벗어버리고 스커트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신고는 우리를 따라나선다. 장삼을 벗은 민영의 모습이 새롭다. 분홍도 옷을 그리 입으니 영락없는 학생이라며 귀엽다는데. 민영이 분홍을 보며 한 마디를 한다.

“언니, 근데 언니한테 뭔가 업혀 있어. 근데.. 귀신은 아닌 거 같어.”

“어머.. 장난 하지마, 얘~”

분홍이 웃으며 민영을 툭 치는데, 민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모르겠어.. 암튼 못된 기운이야. 조심해.”

민영은 남친을 만난다며 총총히 사라진다. 나와 분홍은 집으로 향한다. 그는 ‘나비의 사명’마감을 맞춰야 하기에 작업에 푹 빠져있을 터이다. 그는 이번 ‘나비의 사명’을 끝내고는 당분간 작업을 하지 않는다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몸을 풀 때까지는 내 옆에만 있는다 했다. 나도 모르게 집에 오는 내내 분홍에게 그의 이야기만 한 것 같다. 분홍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분홍이 말하기를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남편을 통해서도 꽤 들은 바 있다고.

“아~ 맞다. 팬이라 하셨지.”

“하긴 그 나이에 동화작가 팬이 뭐니?”

“고맙지 뭐야~ 이제 출장에서 오셨으니 같이 저녁 먹자~. ”

분홍의 차를 타고 집에 온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방문이 열려져 있다. 그는 없다. 그때 화장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레 문을 연다. 그가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놀란 나는 그에게 다가가는데, 욕조에 사람이 누워 있다. 언 듯 보기에도 백발이 성성한 남자다. 욕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남자는 다름 아닌 분홍의 남편, 승영상이다. 방금 전, 분홍과 그녀의 남편 얘기를 하며 헤어졌는데... 지금 분홍의 남편이 내 집 욕조에 누워 있다.

죽었다. 분홍의 남편이.

죽어있다. 내 집 욕조에.

“왜 죽였어요?”

“......”

“왜 죽였어?”

“효연이 올 시간이에요.”

“왜 죽였는데? 죽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뭐라구 말 좀 해봐!!”

일어난 그가 신발을 신는다.

“효연이 데리고 올게요.”

그는 동화책을 읽는다. 그의 동화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효연이 잠든다. 효연을 재운 그는 톱과 공구박스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가 곧 무엇을 할 지 상상할 수 있다. 방금 먹은 감기약을 하나 더 입안에 넣고 잠을 청한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면서.

“캠핑 가요~”

눈을 비비며 잠을 떨쳐내는 나는 생각한다. 캠핑? 오늘 가기로 했었나? 맞다.. 그런 거 같애. 가기로 했어. 그런 거 같아.

“여보.. 악몽을 꿨어.”

자고 일어나 입이 잘 안 떨어짐에도 난 그를 향해 꿈 얘기를 해준다. 꿈속에서 고생했음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곧 잠을 떨쳐낸 내 시야로 방안의 사물이 들어온다. 내 시야 정중앙에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꿈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미안하다고 하면 안 되죠.”

그가 나를 보고 나지막이 내뱉은 말. 그 말을 듣고 나는 퍼뜩 묻는다.

“당신이 죽였어? 진짜로?”

결국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왜?”

“왜? 왜?”

“왜? 왜? 왜?”

나는 계속 묻는다. 마치 꿈속에서는 도망치려 해도 발이 안 떨어지는 것처럼 나는 계속 묻는다. 그는 말이 없다. 거짓말처럼 그의 입에서 ‘니벨룽겐의 반지’가 흘러나온다. 그가 미안하다며 무겁게 입을 열자, ‘니벨룽겐의 반지’는 더욱 크게 울려 퍼진다.

바비큐판 위에 돼지목살이 먹음직스레 익어있다. 그는 정성스레 구운 목살을 나와 효연이에게 분배한다. 이곳은 그와 내가 가끔 오는 곳으로 저수지를 끼고 있는 숲이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은 곳이다. 여름 한철과 단풍이 한참 물든 때를 제외하면 사람 한 명 보기 힘든 곳이다. 숲엔 밤이 일찍 찾아온다. 효연은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 피곤했는지 안 골던 코까지 곤다. 그가 내 손목을 잡고 텐트 밖으로 이끈다. 내게 담요를 덮어준 그는 서둘러 모닥불을 피우고 버너로 따뜻한 물을 끓인다. 라벤더 차를 건넨 그가 내 옆에 앉는다. 담요로 내 몸 구석구석을 덮어주던 그의 손이 내 배에 머문다. 그의 손이 안쓰럽게 내 배를 쓰다듬는다. 자신의 아이를 쓰다듬는다.

“자수해야 되나요? 어떡할까요? 저..”

아무 대답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 사랑해요?”

“.......”

“사랑하는 사람끼리 미안하다는 말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나봐요.”

“.......”

“결국 사랑은 변하니까. 그때 미안하나는 말을 써야 하니까.”그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근데요.. 사랑은 변해도 가족의 믿음은 변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가족 맞죠?”

역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한다.

“왜 죽였어?”

“가족이니까.. 말해줄게요.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그는 사체를 묻고 와서 차차 얘기해주겠다고 한다. 조금은 긴 얘기라면서. 트렁크에 가방과 삽을 꺼낸 그가 차키를 내게 준다.

“여기 핸드폰 잘 터져요. 전화로 신고해도 되고. 차를 타고 나가서 신고해도 되요. ”

그는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위치를 알려주는 후레쉬 불빛이 차츰 멀어지더니 급기야 사라진다. 나는 모닥불에 불을 쬔다. 불길이 약해지면 그가 옆에 마련한 마른 장작을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손안의 핸드폰과 차키를 만지작대본다. 잠이 온다. 들어가 자야겠다.

날이 밝았다. 나와 효연은 그가 요리한 아침을 먹는다. 어제 먹다 남은 목살을 이용한 김치찌개에 어제 굽다가 남긴 소시지를 볶아 내논다. 효연이는 배가 볼록해지도록 먹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아빠~ 최고!”



- 3 -

나는 아직 그에게 죽인 이유를 듣지 못 했다.

새벽녘 번쩍 눈이 뜨인다. 배를 만져본다. 요 며칠 내 배를 만져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자다가도 예외는 아니다. 침대 옆자리엔 그가 없다. 일어난 나는 거실로 나간다. 식탁에 그가 엎드려 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묻었던 고개를 든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다. 두 손으로 세수하듯 눈물을 훔친 그가 나를 바라본다.

“여보.. 나 신고하면 안 돼요. 그럼 안 돼요.”

나는 그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나는 아직 그에게 살인의 이유를 듣지 못 했다.



- 4 -

분홍이가 내 앞에서 웃고 있다. 분홍이는 아침부터 우리집을 찾았다. 출산일이 임박했으니 자신이 보살펴야지 누가 보살피냐며. 이상한 일은 분홍은 자신의 남편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차마 나도 분홍에게 출장 다녀온 승영상박사에 대해 물을 수 없다.

분홍이 오니 그는 나갈 채비를 한다. 분홍과 같은 공간에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 내가 그의 외출을 유도하기도 했거니와, 그도 분홍이 와 있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 집을 나서는 그에게 분홍이 격려의 말을 건넨다.

“곧 아이도 나오니까 좀만 힘내세요~”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은 그는 바쁘게 집을 나선다.

“힘내라니, 분홍아..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이 나라에서 두 아이 아빠가 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나는 분홍이의 태도가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남편이 사라졌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잖은가!

뭔가 더 큰 위험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단 분홍의 행동거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즈음 민영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언니, 내가 왜 그때 그 분홍언니한테 안 좋은 기운이 있어서 조심하라고 했잖아~ 근데 말야, 아저씨가 그러는데 말야, 내가 잘 못 봤대. 분홍언니 어깨에 걸쳐져 있던 그 기운 말야. 언니한테서 나온 거야. 내가 봤던 그런 귀신하고는 다른 거야. 완전 다른 거야. 그 기운 말야.. 언니 뒤에 있던 기운... 아니다. 언니 애 언제 나온다 했지?”

내 뒤에 있는 기운? 그 기운이라는 것이 뭔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과 같은 것일까? 나와 민영은 상대의 패를 보지 않고 죽는 갬블러처럼 안부만 묻다가 전화를 끊는다. 내가 민영의 패를 들춰봐야 옳았으나 더 이상 민영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민영이가 든 패를 보고 싶지 않았다. 민영이가 무슨 말을 할 지 들을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민영이는 무당이니까.

민영이와 내가 이리도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내게 상담을 받아서만이 아니었다. 민영이가 신내림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때.. 그 일제강점기에 억울하게 죽은 아저씨가 늘 민영이 옆에 붙어 있을 때 나는 민영을 처음 만났다.

민영이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나를 토닥였다. 아버지한테 미안해하지 말라 했다. 아버지, 더 이상 언급하기 싫은 나의 아버지. 하긴 나의 아버지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흔한 스토리처럼 나를 때린 적도 심지어 나에게 욕 한마디 한 적 없다. 차라리 나를 욕하고 때리더라도 뭔가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여자라도 데리고 와서 잠자리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모습이 나를 튕겨내기라도 할 것 같았다. 10대의 나는 분노하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폭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늘 텔레비전 앞에 있었다. 항상 막걸리에 김치를 옆에 두고. 딱히 보려는 프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한 프로가 끝나면 늘 기계적으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가는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이 든다. 눈을 뜨면 일어나 막걸리를 마시고는 텔레비전을 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텔레비전을 뚫고 어딘가에 고꾸라지기를 반복 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아버지의 눈은 그렇게 텅 비어갔다. 텅 빈 내 아비의 눈동자는 서글펐다. 지금 와서 구구절절하게 나의 아버지의 일생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기억에 나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는 뒷모습뿐이었다. 텔레비전 속 어딘가를 보고 있던 아버지의 시선을 두 번 다시 확인하지 않은 탓이이라.. 그렇게 나의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서 텔레비전과 같이 돌아가셨다. 늘 켜져 있던 텔레비전에 합선이 되어 불이 났고, 나는 막걸리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깨우지 않고 집을 빠져나왔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 사실을 심지어 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 사실을 민영이는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민영을 통해 내게 말을 붙인 거였다. 그렇게 텔레비전만 보던 아버지가 죽어서야 내게 말을 건 거였다. 다만 아버지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나는 아버지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다는 거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버지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도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불타버린 집으로 인해 보상금을 받아 생활하면서도 아버지를 떠올린 적이 없다. 그랬던 내게 민영은 아버지의 존재를 말한 것이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민영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 것이다. 민영이를 통해 나는 무당의 존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민영이의 신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행이도 초창기 몇 년에 걸친 신기어린 소녀보살의 명성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현금을 꼬박꼬박 갖다 주고 있다. 그럼에도 민영인 영험한 무당이다. 그런 민영이가 본 기운은 뭘 말하는 걸까?

나는 아직까지 그에게 살인의 이유를 듣지 못했다.

“우리 아들 이름은 연수로 해요. 당신과 내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왔어요. 연수. 여보이름을 거꾸로 한 것이기도 하고요. 어때요?”

이름이 빼곡이 적힌 노트를 흔들며 그가 말한다. 마치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고 난 사람처럼 희열에 차 있다. 연수. 사내아이이름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양연수. 양연호.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차례로 되뇌어 본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왜 죽였어? ”

그가 조용히 내 옆에 와 앉는다.

“내가 말 안 해줬었나... 말해줄게요.”

그리고 그는 주절주절 자신이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들을 늘어놓는다.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가족이라고. 그게 나고 효연이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족을 완성시켜줄 자신의 아들이 내 배속에 있다고. 그러면서 그는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게 프러포즈를 한 이유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를 만나던 시절 그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했었다. “당신은 내가 왜 좋아?”

불쑥 늘 껌을 씹으며 상담을 했던 희정이라는 동료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내게 이 말을 하면서도 껌을 씹었다. 짝.짝.. 희정은 말한다. 그를 조심하라고. 희정은 나란 사람의 현실을 말해준다. 애가 딸린, 고아고, 연상인 나를 사랑한다고 달려든다는 건. 그것도 그처럼 꽤나 괜찮은, 희정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아이돌 뺨치는 외모에 소유자인 그가 나한테 이러는 것은 필시 돈 때문이라고. 그러며 내게 은근히 물었다. 땅이나 건물 같은 거 가지고 있냐고. 나는 분명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 희정의 질문에 나는 답하지 못 했지만 그에게도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사랑하니까’였기에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건에 맞춰 누군가를 사랑하리라 결정한다면 그것은 거래다. 지극히 자신의 이득을 따지는 거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겼다. 그렇기에 사랑은 다른 거라 믿었다. 그렇기에 그의 프러포즈가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왜 살인을 했냐?’는 질문에 현실적인 그의 프러포즈 이유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은 엄마였어요. 이미.. ”

그랬다. 그는 내가 엄마여서 좋았다. 나의 재산은 땅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었다. 효연이었다. 효연이는 딸이니까. 그럼으로 효연이는 결혼에 있어 절대 필요 요소였던 것이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결혼과 동시에 아빠, 엄마, 딸이라는 번듯한 가족구성원이 이뤄진 것이다.

거기다 나는 온전히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기에 적격이었다. 나는 고아였으니까.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있었듯이 그는 온전히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철저한 조건에 내가 캐스팅된 느낌이 든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건 가족을 지키려는 거에요. 그것뿐이에요.”

가족밖에 없다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지나쳐 어딘가에서 휘발된다.

나는 그의 정신을 깨우려는 듯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그 사람이 우리가족을 뭐 어쩐다고? 뭘 어쩐다고 분홍이 남편을 죽인거야?”

“그냥 잊어요. 말하면 힘들어. 우리 가족 다 힘들어져.”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비어 간다.

나는 사라져가는 그의 눈동자를 잡으려고 소리친다.

“말해~!”

띵동~

누가 왔다. 액정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민영이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는 민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작업방으로 들어간다. 민영은 들어오자마자 현관에 부적을 붙인다. 저번에 본 것이 아무래도 찜찜해 써왔다면서.

“그날 네가 본 게 뭔데?”

부적을 붙인 민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민영의 눈빛이 떨린다.

“아직도 있어...”

“..........”

마른 침을 삼킨 민영이 입을 꾹 다문 채 곳곳에 부적을 붙인다. 마지막으로 그이 작업방에 부적을 붙인 민영이 방문을 두드린다.

“형부 저 가요.”

배웅을 하기 위해 그가 민영 앞에 선다. 그러자 민영의 이빨이 미세하게 부딪친다. 민영이 그의 눈을 보고 있다. 그의 비어가는 눈동자를.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어 보인 민영이 신발을 신고 현관을 벗어난다. 그에게 민영을 배웅하겠다고 한 나는 민영을 따라나선다. 앞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민영의 어깨를 낚아챈다.

“니가 본 게 뭐야?”

민영은 대답은 않고 계속 1층 버튼을 반복해서 누른다. 아직 1층이 되지 않음에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어폰을 꽂은 고등학교 남학생이 탄다. 남학생이 힐끔 민영을 쳐다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튀어 나가는 민영. 나는 몸이 무거워 민영을 쫓을 수 없다. 대신 남학생이 민영을 쫓는다. 앞서 가는 민영의 옷깃을 붙잡는 남학생 머리 위로 벚꽃잎이 떨어진다.

“저기... 몇 학년이야? 핸번 좀 알래줄래?”

남학생을 뿌리친 민영이 뛰어간다. 정말 빠르게 뛰어간다. 민영의 옷깃을 잡았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남학생이 이어폰을 꽂으며 나를 힐끔 본다. 그리고는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걷는다. 조금 전 일은 금방 툴툴 털어 잊어버리고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뚫고 걸어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나는 어느새 경찰서 앞에 와 있다. 경찰서 앞 벚꽃나무에도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경찰서 와 벚꽃나무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 5 -

경찰들이 집으로 들어온다. 사복경찰 두 명과 정복 경찰 두 명이다. 그에게 수갑을 채운다. 수갑을 찬 그가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내 눈을 그냥 통과해 빠져나간다. 분명히 그러하다. 저 시선.. 맞다.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과 닮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쫓아간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닿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나를 통과하여 어딘가에서 곤두박질친다. 그의 시선을 보는데..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의 눈 안은 텅 비었다. 분명 그러하다. 텅 빈 안구가 나를 본다. 알 수 없는 무엇이 지켜보는 기분, 바로 이러하다. 이 더러운 기운을 민영은 본 것이다. 더러운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아 배를 자극하니 아래쪽이 찢어지게 아파온다. 돌연 아랫도리가 따뜻해져 보니 양수가 터졌다. 시야가 좁아온다. 점점 내 시야가 어둠속에 갇히는데... 문이 열리며 분홍이 들어선다.

눈을 뜬다. 실내가 어둡다. 하지만 병실임을 알겠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걸까? 아~ 배속이 허전하다. 이불을 들치고 환자복을 올려 배를 본다. 아직 붓기가 빠지진 않았지만 배가 잘룩해졌고 수술자국에 붙여진 붕대가 보인다. 근데.. 아이는? 내 아이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이 열린다. 문밖 빛 때문에 누군지는 알 수 없는 검은 실루엣이 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문이 닫히고 누군가가 실내등을 키면. 그다. 그가 아이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우리 연수 좀 봐요. 연수야~ 엄마야~”

뒤이어 분홍과 의사, 간호사가 들어온다. 그들의 축하 메시지가 내 귓가 언저리에서 파도처럼 부서져 들리지 않는다. 그 사이 그가 내 품에 연수를 안긴다.

“봐봐요. 이뻐.”

나는 연수를 본다. 그런데, 연수의 눈이, 내 아가의 눈동자가 싱크홀처럼 텅 비어있다.

나는 비명을 지른다.

있는 힘껏 절규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꿈이다.

기분 나쁜 꿈이다. 다시 꿈이 달라붙을까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실내는 어둡다. 하지만 병실임을 알겠다. 이불을 걷고 배를 보면 이미 수술이 끝났음을 알겠다. 문이 열린다. 꿈처럼 검은 실루엣의 누군가가 들어오는데, 꿈과는 다르게 누군지 알 겠다.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 그다. 그가 꿈처럼 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그를 뒤따라 분홍과 의사, 간호사가 들어온다. 그들의 축하 메시지는 귀 언저리에서 불꽃놀이 하듯 크고 작은 소음으로 부산하게 터질 뿐, 들리지 않는다.

그가 운전하는 차안엔 ‘니벨룽겐의 반지’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가 운전하는 승용차 뒤에 연수를 안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신고한 것이 꿈인지를. 혹은 그가 분홍의 남편을 죽인 것조차 꿈인지를. 아니다. 분명 아니다. 난 그를 신고했다. 확실히 그는 분홍의 남편을 죽였다. 그랬기에 신고했다. 신고하기까지 그 힘겨운 고민이 꿈 일리 없다. 승영상박사의 시신을 보고도 나는 신고할 수 없었다. 내 남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리고 연수의, 효연이의 아빠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편으로는 그를 믿었다.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은 아니리라. 세상엔 별일이 다 있잖은가. 툭 밀었는데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혹은 제 풀에 쓰러져 공교롭게도 그의 앞에서 죽은 것일 수도 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그의 팬이라는 분홍의 남편과 어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차라리 그가 악당을 죽이는 007 같은 비밀요원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모른 척 하는 일이 맞는 일이다. 아니 그렇다 믿으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렇게 모른 척 덮기에는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시선이었다. 그의 시선은 분명 그가 다른 무언가로 전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오직 나만 느끼고 있었는데... 민영도 그 시선을 본 것이다.

그를 신고하기 전 나는 벚꽃나무 옆 벤치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째야 하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꺼내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건다. 긴 통화대기 시간이 지나고 민영이 전화를 받는다. 나는 묻는다.

“니가 본 게 뭐니? 민영아 말해줘. 말해줘야 돼.”

“귀, 귀신은 아냐...”

“그럼?”

“아저씨가 그랬어.. 아저씨가...”

“아저씨가 뭐랬는데..”

잠시 정적이 흐른다. 대신 민영의 가뿐 호흡소리가 들린다.

“말해봐. 민영아. 니가 본 걸... 아저씨가 알려준 걸!!”

“아저씨가 도망치라 했어..”

“왜?.. 민영아!! 왜? 왜?!!”

“.....악.마! 악.마.랬.어. 그러니까 도망 가라했어.”

전화를 끊고 나는 경찰서로 들어갔다.

그랬다. 분명 기억이 난다. 그건 꿈일 수 없다. 나는 그를 신고했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갔다. 나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승영상박사, 차분홍의 남편을 그가 죽였고, 우리가 캠핑을 갔던 저수지 근처에 파묻은 것까지. 모두 다.

근데 지금 그가 버젓이 운전 중이다. 룸미러에 비친 그의 시선을 살핀다. 룸미러 속 그의 눈동자는 검은 잉크로 꽈악 차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결처럼 꿈틀꿈틀 움직이는 검은 동공은 흡사 ‘니벨룽겐의 반지’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내 이빨이 미세하게 부딪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순간 룸미러를 통해 그의 시선과 마주 닿는다. 동공의 검은자위가 눈 밖으로 쑤욱 솟아올랐다가는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의 숨도 순간 멈춘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그가 조수석 무언가를 꺼내 효연에게 불쑥 내민다. 나는 연수를 무릎에 올리고 한 팔로 효연을 끌어안으며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두 눈을 뜬다.

“짠~ 나비의 사명 그 다음 얘기~!!”

“와~ 아빠 최고~~!”

집에 온 그는 예전의 눈동자로 돌아와 있다. 그리고는 부산하게 집안일을 한다.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주고, 연수를 씻긴다. 효연 방에 모빌도 달아준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빌을 보고 너무 좋아하는 효연이를 번쩍 들어 볼에 뽀뽀도 해준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모습은 내가 늘 꿈꿔왔던 모습이다.

연수를 안고 있는 그가 효연에게 ‘나비의 사명’을 읽어준다. 나비는 고진감래 끝에 동네 괴물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았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오며 끝이 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효연은 어느새 잠이 든다.

밤이 찾아왔다. 그와 내가 한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입을 뗀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저기.. 우리 셋째 가져야죠? 이번엔 딸이었음 좋겠는데...”

순간, 나는 웃음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나의 웃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내 몸을 더듬는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다.

“잊었어? 나 당신을 살인자로 신고했어.”

“괜찮아요. 전 잊었어요. 가족인데요. 뭐..”

가족이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내 몸의 소름까지 보고 있는 그가 소름 돋은 내 살결을 쓰다듬는다. 소름이 더 뾰족이 도드라진다.

“여보는.. 내가 무섭구나?”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다가온다. 도망가고 싶다. 벽안으로라도. 침대 속으로라도. 이때, 다행히도 연수가 운다. 나는 일어나 연수에게 젖을 물린다.

“내일은 젖 좀 받아놔야겠어요. 당신 편하게 말이죠.”

말을 마친 그가 배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잠을 청한다. 그의 자는 자세는 늘 바르다. 마치 관속의 시체처럼.

젖을 다 먹인 나는 거실을 서성이다 그의 작업실로 들어간다. 컴퓨터에는 그가 하는 작업이 펼쳐져 있다. 보면, ‘나비의 사명’이다. ‘나비의 사명’은 이미 작업을 끝내서 완결본이 나왔는데, 아직까지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나비의 사명’을 훑어본다. 이건.. 전혀 다른 버전의 ‘나비의 사명’이다.

나비는 자신의 사명을 실행에 옮겨야 되는 전날 밤. 마을을 보호하는 둑을 이빨로 갉아먹어 무너트리고 만다. 마을은 물이 넘쳐 엄마와 마을에 사는 쥐들 모두가 물살에 휩쓸려 죽어버린다. 홀로 남은 나비가 괴물고양이와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멈춰져 있다. 마우스를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음습하고 있다.

날이 밝았다. 나는 그에게 효연이 유치원을 데려다 주겠다며 집을 나선다.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내 뇌를 싹둑 잘나내 들여다보고 있는 듯 서늘한 느낌이 든다. 잠시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효연의 볼에 입맞춤한다.



- 6 -

얼마 남지 않은 벚꽃잎이 내 어깨를 비켜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다. 꽃잎과 함께 내 머리도 아스팔트에 부딪쳐 빠개지는 느낌이다.

방금 전 나는 강력반 형사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다.

목이 짧고 굵어 귀가 거의 어깨에 닿을 정도의 이호민형사는 한 손엔 자판기 커피를, 한 손엔 마우스를 잡고 나에게 말한다.

“살인사건이 성립되려면요. 사람이 죽어야 되잖아요? 그죠?”

모니터를 보던 이형사가 나를 쳐다본다.

“근데 승영상이란 사람은 없어요. 없는 사람이라구요.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죽어요. 그죠? 맞죠? 그잖아요~”

“네? 그게.. 분홍이, 차분홍 남편이구요. 지금 출장에서 돌아온 지가...”

“저기 됐고요. 저희 바쁘니까 가보세요.”

이를 지켜보던 이마의 주름 세 개가 깊숙이 박힌 형사가 나에게 한 마디 툭 내뱉는다. 이 형사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고 신만식 형사다.

“승영상이라.. 성이나 이름이 그리 흔하지는 않아서, 이형사. 왜 그 자료 함 뵈드려봐.”

이형사가 신형사를 보더니 픽 웃는다.

“동명이인이잖아요... ”

“그래~ 죽은 승영상박사도 신부였다며?. 승영상신부가 살아있었다면 나이대도 비슷하고 그렇잖아. 재밌잖아. 혹시 남편은 그림동화, 아줌마는 추리소설 쓰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이호민형사는 모니터를 틀어 보여준다.

“자, 보세요. 23년 전 화재사건에 승영상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모니터 안, 금촌리 성당 화재 사건 희생자 중에 승영상이라는 이름을 클릭하니 젊은 신부 사진이 뜬다. 나는 사진에 시선이 꽂힌다. 그 신부는 분명 승영상 박사다. 백발의 머리가 검은 머리인 젊은 모습이지만 승영상박사임이 틀림없다.

“맞아요. 이 사람이에요!”

신형사와 이형사의 눈이 서로 마주 닿았다가는 실소를 금치 못 한다.

“예~ 예~ 알겠으니 나가세요. 나가시라구요~”

나는 신형사에게 매달린다. 시체유기한 곳을 수색해보라고. 문득 분홍이를 생각해낸다. 그렇다. 분홍이라면 누구보다 승영상박사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커폰에 연결된 분홍의 음성이 반가우면서 미안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음성은 나를 또 한 번 경악시킨다.

“수연아, 무슨 말이야? 나한테 남편이라니.. 지금 니네 집에 와 있으니 어서 와, 얘~ ”

분홍은 지금 그렇게 자랑하던 자신의 남편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나는 뭔가를 직감하고 질문한다.

“분홍아, 연호씨하고 있니? 지금”

“그럼 지금도 연호씨가 옆에서 핸폰 들고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데...”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분홍이 위험하다. 나는 형사들을 붙들고 외친다. 지금 분홍이 위험하다고. 내 남편이 분홍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나의 다급함이 전해 졌는지 형사들이 분홍에게 재차 전화를 건다.

그 사이 나는 이호민형사가 펼쳐놓은 모니터의 자료를 다시 살핀다. 23년 전 경기도 포천군 금촌리 성당 화재사건이 발생했고, 그 화재로 60여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다. 사망자 명단 폴더를 열어본다.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려는데 여경이 내 어깨를 잡는다. 돌아보면 여경 뒤에 이호민형사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저기, 차분홍씨가 떡볶이 하고 있다고 어서 오랍디다. 남편하구도 통화했구요. 아무 일도 없다구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집이라도 급습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죠? 맞죠?”

여경과 정복경찰이 나를 내몬다. 나는 술주정뱅이나 미친년처럼 경찰서에서 쫓겨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나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벚꽃잎 하나가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나는 풀썩 주저앉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분홍에게 다시 전화한다. 이번엔 그가 받는다.

“어디에요?”

나는 급히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은 나는 민영에게 간다. 지금은 달리 이 상황을 설명할 사람이 없다. 오직 민영만이 그를 봤기 때문이다. 민영에게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는다. 다시 민영에게 걸려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23년 전 죽은 사람의 명단..!! 그 중에 승영상박사 외에 또 한 사람!!!

나는 민영에게 가는 길을 돌려 PC방에 들어가 뉴스를 검색한다. 23년 경기도 포천군 금촌리 성당화재사건. 그 사건으로 60여명의 성도가 죽었다. 이 사건은 사이비종교집단의 동반자살이라는 견해도 함께 재기된다. 그리고 그 사건에 중심에 수녀가 있다. 천주교 종파에서 파문당한 수녀말이다. 그런데 그 수녀가 바로 그를 키운 ‘율리아나 수녀’다!!

또 다른 기사를 검색하니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율리아나 수녀는 임신을 하였다 한다. 그녀는 그 임신이 동정녀마리아와 같은 처녀잉태라 하였고, 이를 인정할리 없는 천주교단에 의해 파문당했다. 파문당한 율리아나는 사건이 난 금촌리에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신도들과 공동체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PC방에서 나온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잠시 벽에 기댄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분홍이가 위험하다.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박영찬! 그도 승영상박사를 봤다. 아니 영찬이 승영상박사를 못 봤어도 지금 도움을 청할 사람이 공교롭게 영찬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핸드폰을 꺼내든다. 하지만 영찬의 연락처가 내게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안에서 나는 그가 준 봉투를 뜯는다. 그 봉투에는 유서와 함께 그의 집주소가 쓰여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늘 같은 방식으로 유서를 써왔던 터였다. 주소가 곧 영찬의 시체가 있을 곳이라는 것 외에 그곳으로 돈을 보내라는 은근한 메시지였다. 나는 주소를 들고 영찬의 집을 찾는다. 현관문은 열려져 있다. 급한 맘에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데, 집안에서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린다. 집에 들어간다. 근데 죽겠다던 영찬은 노란 염색머리 여자와 낡은 침대위에서 알몸으로 뒹굴고 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낡은 침대가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나를 보고 놀란 염색머리는 영찬을 밀어내려 하지만, 한참 절정으로 치닫던 영찬은 나를 보고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내가 한심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가릴 때가 아니다. 나는 막 절정을 향해 움직임이 빨라지는 영찬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챈다.

“나랑 같이 좀 가!”

나를 뒤따라 나오는 영찬은 주섬주섬 허리띠를 졸라매며 염색녀에게 지폐를 건넨다. 지폐를 건네받은 염색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세운다. 나는 염색녀를 밀어내고 택시를 올라탄다. 영찬은 이러는 내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아저씨를 재촉하며 한편으로는 영찬에게 간단히 설명한다. ‘나 지금 내 남편 잡으러 가는 거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라고 하는데, 영찬의 말이 걸작이다.

“그 착한 사람을 왜?”

“지금 내 친구랑 같이 있어.”

영찬은 지금 그가 바람을 피운 줄 알고 있다. 영찬은 그것만으로도 혼쭐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나는 영찬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영찬은 송곳니를 보이며 피식 웃으며, 효연이는 있냐고 묻는다. 다행이도 효연이는 아직 유치원에 있을 시간이다.

숨을 몰아쉬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영찬이 보지 못 하게 비밀번호를 가리고 누른다. 삑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영찬이 나를 밀어내고 호기롭게 들어간다. 분홍인 연수를 안고 있고, 식탁에 앉은 그는 떡볶이를 먹고 있다.

“아쭈 이것들 봐라! 이 씨발새끼! 사람 그렇게 안 봤두만 개쌩양아치구만!!”

영찬은 떡볶이가 담긴 냄비를 들어 그에게 쏟아 버린다. 의자에 일어나 뒤로 물러나는 그의 안면을 강타한 영찬이 환호성을 지른다.

“우후~야! 오늘 몸 좀 풀어보자꾸나~ 야~~”

나는 분홍에게 연수를 받아들고 안부를 묻는다.

“분홍아, 괜찮아?”

“아까 경찰서에서 전화한 거니?”

“응..”

“저 사람은 형사니?”

“아니 전 남편...”

덤덤하게 묻던 분홍이 돌연 뒤돌아 후라이팬을 집어 들어 영찬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리친다.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영찬이 그대로 꼬꾸라진다. 이를 틈타 이번엔 그가 영찬의 목을 조른다. 말리려고 하지만 분홍이 내 앞을 막는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분홍이 안아준다.

“걱정마, 넌 선택받은 사람이야.”

분홍에게 안겨 있는 나는 목을 조르고 있는 그의 눈을 언뜻 봤다. 심연 속으로 푸욱 꺼져가는 그의 눈을 말이다.

영찬은 죽었다. 영찬의 시신 앞에 그가 앉아있다. 그의 어깨위엔 분홍의 손이 얹어져 있다. 곧 효연이 올 시간이다.

“나 효연이 데리러 가야 되는데...”

“응, 다녀와 연수는 일루주고.”

나는 연수를 분홍에게 맡길 수가 없다. 업고 가겠다고 하자 분홍이 연수를 억지로 빼앗으려 한다. 나는 뺏기지 않으려 물러난다.

“분홍씨,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뜻밖에 그도 분홍을 보며 설명을 요구한다.

“수연이가 놀란 거 같으니 내가 효연이를 데리고 올게요. 그런 다음에 설명해드리죠. 참, 이 시체는... 음, 아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말을 마친 분홍은 차분하게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나간다.

그와 나는 영찬의 시체를 가운데 놓고 멍하니 앉아있다. 나는 문득 두려움에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본다. 거울 속의 내 눈이 거울 밖의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가 눈치 채지 않게 그를 살핀다. 그는 천천히 움직여 작업하는 방으로 들어가 편지지 하나를 가져온다. 그 편지지를 영찬의 자켓 속주머니에 넣는다. 나는 그 편지지가 영찬의 유서임을 안다. 그가 영찬을 빈방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철컥~ 문이 열리고 신만식형사가 들어온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놀랍게도 이사 첫날 신문보라고 왔던 보급소 소장과 전도사다.

나와 그는 놀라 그대로 멈춰 선다. 지금 영찬의 시신이 신형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그의 앞에 선 신만식형사가 꾸벅 인사를 하자, 뒤에 있던 소장과 전도사도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연락 받고 왔습니다. 시신은 저희가 처리할게요.”

소장과 전도사가 영찬의 시신을 양옆에서 부축해서 끌고 나간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을 끌고 가는 형태다. 마침 분홍이 효연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효연은 소장과 전도사가 끌고 올라타는 영찬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나는 얼른 달려가 효연의 시선을 가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신형사가 분홍을 향해 영찬의 주머니에 편지지를 꺼내 보인다.

“일처리는 어렵지 않겠어.”

“부탁 좀 드릴게요. 좀 이따 뵈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분홍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한다.

“수연아, 이제 진실의 문이 열릴 때야.”



- 7 -

분홍의 집엔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들이 모여 있다. 그동안 오며가며 친절을 베풀던 이웃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물론 그 속엔 신형사와 전도사, 보급소 소장도 속해 있다. 모두가 그를 둘러싸고 앉아있다. 일상적인 담소를 나누는 것 같던 그들이 분홍의 선창으로 돌연 동시에 내뱉는 말이 있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문득 깨닫는다. 분홍의 집 가구에 새겨져 있는, 디자이너 이름인줄 알고 뭐라 발음해야 될지 몰랐던 그 언어 말이다. 분홍과 내가 있는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나를 보며 입을 뗀다.

“궁금하다 했지?”

곧 그녀의 목소리는 ‘니벨룽겐의 반지’의 음악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내 눈 앞에 소담한 성당이 서 있다. 나는 그곳이 금촌리 성당임을 직감한다.

23년 전, 성당내부엔 무슨 의식을 치러지는 듯 60여명의 신도들이 모두 모였다. 성당 끝에 불길이 치솟는 화구가 있고, 성당 단상에는 율리아나 수녀가 서 있다. 젊은 승영상 신부가 쭈뼛거리는 여섯 살 생일을 맞는 그를 단상 위로 인도하고 있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어린 그를 맞는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손을 하늘 위로 뻗고 있다.

이를 보던 어린 그는 돌연 도망친다. 도망치는 그는 신도들이 못 따라오게 문 옆에 있는 불길을 걷어찬다. 성당 밖으로 나온 그는 자전거 열쇠를 이용해 성당 문을 걸어 잠근다.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성당은 즉시 화염에 휩싸인다. 이를 바라보는 어린 그의 눈이 푸욱 꺼져간다. 싱크홀처럼 꺼진 눈 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온다. 화염에 휩싸인 성당 주변의 세상은 그가 그린 동화책 세상이다. 안개 속을 헤치고 집채만한 고양이가 그를 향해 어슬렁 걸어온다. 그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고양이는 어느새 작은 고양이로 전락했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그가 나를 쳐다본다.

퍼뜩 정신이 들면, 분홍의 집은 이웃들이 모여 반상회를 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화기애애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은 애들 사교육 얘기며 이 동네는 좋은 고등학교가 없다 등의 얘기를 하고 있다. 과일을 깎아 내려놓는 분홍이 일상적인 어투로 아무렇지 않게, 이제 양연호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말한다. 분홍의 말이 끝나자 이웃들이 가구에 새겨진 그 언어를 다 같이 외친다. 분홍은 연수를 가리킨다. 연수를 구세주로 지칭한 분홍은 연수가 6세 될 때 의식을 거행될 거라는 말을 한다. 다시 가구에 새겨진 언어를 외친다. 분홍은 조분조분 얘기한다. 연수가 메시아로 거듭 나면 우리는 들림을 받을 것이요, 구원을 받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 좀만 기다리면 된다면서 말이다. 다들 끄덕이며 연수를 본다. 연수를 바라보는 이웃들의 시선이 희망과 환의.. 광기로 가득 차오른다.

분홍은 승영상박사의 말대로 됐다며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나를 껴안는다. 분홍이 말하길, 승영상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거룩한 죽음으로 인해 그토록 오래 잠들어왔던 그를 깨울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나는 분홍에게 묻는다.

“도대체 뭘 깨웠다고 그래?”

“아까 못 봤어? 본 줄 알았는데..”“아까 뭘..?”

“봤잖아. 니 남편이 악마인거.”

분홍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한낱 미물인 인간을 말야 신이 구원하는 게 아냐. 신은 인간을 버렸어. 아! 뭐 버리고 뭣도 없지. 그냥 무관심한 거야. 뭐랄까? 우리가 개미가 줄지어 기어 다니는 거 보는 뭐 그런 거.. 하지만 아직 비관하긴 일러. 인간에게 관심을 두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으니까. 인간에 관심을 두는 건 오로지 말야.. 악마야. 악마.. 악마야 말로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니깐 말야. 그래서 말이지 인간을 구원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결국 악마야.”

어느새 내 눈에 승영상이 다가온다. 나를 지나친 승영상은 그의 앞에서 얘기한다. 한 손에는 딸기 바구니를 들고.

“우리는 순수한 악을 기다리고 있네. 그게 자네의 자식이 될 거야. 오롯이 순수한 악이 세상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 자네를 도와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네. 그때 비로써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중에 선택받은 우리만이 구원받을 걸세. 버려지는 게 있어야 구원이 성립되니 당연한 이치일세. 그 막중한 일을 자네와 연수가 하게 될 거야.”

“왜 저와 연수가 해야 되는 겁니까? 왜?!!”

그가 승영상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승영상은 눈이 푸욱 꺼져가며 무표정하게 변해간다.

“왜냐고? 자네와 연수의 고리가 바로 나와 자네의 고리와 같았으니깐. 내가 결국 못 한 일을 자네는 할 수 있어. 자네가 23년 전 보여준 능력은 무척 상징적인 태동이었지. 진짜 악을 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네였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지.”

“당신과 나의 연결고리가 나와 연수의 연결고리라니요...?”

“너는 네가 정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가? 악은 말일세. 그리 복잡하지 않다네.”

그가 승영상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른다. 승영상은 푹 꺼진 눈에 동공이 떠오르며 울긋불긋 울렁이다 가라앉는다. 나는 그를 말리려고 어깨를 잡아챈다. 그럼에도 그는 승영상의 숨통을 조인 손에 힘을 풀지 않는다.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승영상의 손에 힘이 풀려 바닥에 떨어진다. 승영상은 죽은 거다. 그도 스스로 놀라 뒤로 물러나 앉는다.

그런데 죽은 줄 안 승영상은 일어나 그를 향해 빙그레 웃는다.

“세상의 선도 다 악마가 만들어 논 신호등 같은 거지.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악은 더 신나게 앞으로 달려나갈 거야. 이제는 자네 안의 신호등은 꺼졌네. 내 할 일은 여기까지네.”

말을 마친 승영상은 그가 토막 낸 순서대로 차츰 사라진다.

퍼뜩 정신이 들면, 우르르 일어난 사람들이 나와 그를 둘러싸고 있다. 저마다 밝게 웃으며 연수에게 덕담을 말하면서 분홍의 집에서 나간다. 집 밖에 이웃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신형사와 전도사, 보급소 실장이 들어온다. 이웃들 이들에게도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집에 들어온 신형사와 전도사, 보급소 실장은 식탁에 앉는다. 분홍은 이들에게 과일과 커피를 내놓는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신형사는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고 하면서 나를 보며 찡긋 윙크를 한다. 딴에는 지난 일에 대한 가벼운 사과를 한 것이리라. 그는 내게서 연수를 안아들고 분홍의 집을 나선다. 배웅을 나선 분홍이 내 어깨를 잡는다.

“수연아, 이제 알았으면 받아들여.”

“뭘?”

“너도 선택받은 사람인 걸.”

지루한 ‘니벨룽겐의 반지’가 최고조로 치닫는다.

나와 그는 분홍의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그는 맨 꼭대기층을 누른 뒤 나를 본다.

“이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지요. 내가 말할 수 없던 이유도.”

그의 말은 이어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어디까지나 우리 가족을..”

그는 동의를 구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맘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당신, 효연이.. 우리 연수 내가 지켜요.”

이제 승영상을 죽인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그저 이 아파트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문 앞에 민영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난다. 민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내 안부를 묻는다. 나는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데, 큰 가방을 든 민영은 자고 가도 되냐고 먼저 집에 들어선다. 집으로 들어가는 민영이 이를 악무는 모습을 나는 봤다. 집에 들어선 그는 아무 말 없이 물 한 잔을 들고 작업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연수를 효연이 자는 방에 재운 뒤 거실로 나오다 깜짝 놀란다. 민영이 작두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양 손에는 부채와 무령(무당방울)을 든 채로 말이다. 민영이 서 있는 작두가 부들부들 떨린다. 나와 민영의 입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실내 온도가 떨어져 있다. 돌연 민영의 손이 그의 작업실을 가리킨다. 나는 그의 작업방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는데, 차갑다. 문고리에 성에가 낄 만큼 차갑게 식어있다.

그럼에도 나는 방문을 연다. 방안에 펼쳐진 광경은 내 눈을 의심케 한다.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젖히고 앉아있다. 그런데... 그의 싱크홀처럼 푹 꺼진 눈에서 동공이 해초처럼 흐물흐물 늘어트려져 솟아올라 있다. 천정까지 흩어진 그이 동공이 모여 나를 본다. 나는 문을 쾅 닫는다. 내가 문을 닫는 동시에 민영은 작두에서 떨어진다. 민영의 가랑이를 보니 생리가 터졌다. 너무 급작스레 터져 피가 바닥에 튀었다. 나는 민영을 부축해 화장실로 데리고 간다. 민영이 매우 고통스러워하기에 내가 생리대를 채워준다.

민영과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니 작업방 문이 열려져 있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얼른 효연의 방을 열어 확인을 한다. 효연과 연수 다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민영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민영의 소리를 따라 그의 작업방으로 간다. 민영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다. 민영을 따라 모니터를 보면, 그가 ‘나비의 사명’ 다른 버전의 작업을 끝내놓았다. 동료 쥐들을 수장시킨 나비가 고양이와 맞닥트린 데서 멈췄던 장면 다음이다. 스크롤을 내리니 나비가 고양이를 뜯어 먹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의 눈알을 파먹고 있는 모니터 속 나비가 살아있는 듯 나를 쳐다본다. 주춤 뒤로 물러나는 나를 민영이 잡아준다.

그는 어디 갔을까?

거실에 나온 민영이 다시 작두위로 올라간다. 민영은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빠르게 뇌까린다. 무령을 든 민영의 손은 점차 빨라지고 부채는 그와 반대로 하늘하늘 펄럭인다. 거실의 기온은 다시 낮아지고 베란다 유리문에 성에가 끼더니만 그 유리문을 통해 그가 보인다.



- 8 -

그는 지금 홀로 아파트 정문 앞에 있다. 커다란 자물쇠를 들고 출입문을 봉쇄한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문도 봉쇄하고 있다. 그의 발밑에는 경비아저씨의 모자가 밟혀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경비아저씨는 골수가 밖에 나온 채 쓰러져 있다. 출입문을 모두 봉쇄한 그가 망치를 손에 쥔다. 이 망치는 이사 후에 효연이 방에 모빌을 달아줄 때 쓰던 바로 그 망치다.

나는 소리친다.

“아악~! 막아야 돼!!”

나는 전화를 하려 하지만 핸드폰도 되지 않고, 전화선도 끊겼다. 심지어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정말 악마의 기운이 이 아파트를 집어 삼킨 것은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영이 작두에서 넘어진다. 넘어진 민영의 발바닥에 금새 피가 배어나온다.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는 민영의 온 몸에 실핏줄이 돋아난다. 민영은 숨을 토해내며 작두를 움켜쥐다. 동공에도 실핏줄이 터질듯 몰려있다. 막힌 숨을 토해낸 민영은 알 수 없는 말을 더욱 더 빠르고 크게 뇌까린다.

민영의 상태가 안 좋아지자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그의 모습도 마치 전파방해를 받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보이는 그의 형체는 이미 빠르게 움직이며 살육을 시작했다. 아래층부터 한 층, 한 층 올라가며 말이다. 무슨 일인지 분홍이 있는 층은 건너뛴 채이다.

민영이 자신의 피가 맺혀있는 작두를 들고 일어난다.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선 민영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민영의 모습이 아니다.

민영과 나는 분홍의 집으로 내려간다. 신형사와 전도사, 보급소 소장은 보이지 않고 분홍만이 소파에 앉아있다. 우리를 발견한 분홍은 민영의 작두를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깟 귀신의 힘을 빌려서 뭘 어쩌려구. 하늘이 열리는 걸 어떤 귀신이 막아.”

“하늘이 열리는 게 아니지. 악마라구. 악마! 지금 악마를 불러내려는 거라구~!!”

민영이는 핏발선 눈을 부라리며 일갈하지만 분홍의 미소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 그게 하늘이야. 악마가 하늘이고 하늘이 악마지 뭐가 달라. 신이면 달라질 거 같으니? 잘 지켜봐. 이게 승박사가 말한 2막의 시작이니까.”

분홍은 ‘니벨룽겐의 반지’를 틀면서 소파에 길게 눕는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열리는 차임벨 소리가 들린다. 민영과 내가 밖에 나가보면, 엘리베이터 안에 신형사와 전도사, 보급소 소장이 널브러져 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핏물이 줄줄 넘쳐 흘러나온다.

그의 살육을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다. 민영은 이 광경이 보이는지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 상황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파트 내부의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고 연이어 들려오는 비명소리로 살육의 현장을 알 수 있다. 민영은 동공에 돋은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을 흘리더니 급기야 번쩍 눈이 돌아간다. 이제부터는 민영이라 말할 수 없는 민영이 작두를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나도 민영을 쫓아 올라가지만 엄청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터라 따라갈 수 없다. 각층에 벌어진 참사가 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살육의 현장을 보고 눈물범벅이 된다. 널브러진 시체 중에는 이어폰을 꽂고 민영을 쫓았던 남학생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고 있다.

돌연 위층에서 민영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와 함께 아파트 전체에 전기가 소멸된다. 나는 핸드폰의 후레쉬 기능의 도움을 얻어 위층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는 난간에 성에가 끼어있다. 다시 온도가 낮아진 것을 봐서는 민영의 영험한 기운이 퍼져있다. 사방이 어두워 내 입에서 나오는 입김만이 보였다가 사라질 뿐이다.

후레쉬를 통해 드러나는 살육의 현장은 더욱 처참하다. 또다시 민영의 비명소리. 전기가 모조리 나갔음에도 엘리베이터가 작동된다. 얼른 뛰어 엘리베이터를 확인하니 엘리베이터가 선 층은 3층, 분홍의 집이다.

나는 서둘러 3층으로 다시 뛰어 내려간다. 너무 어두워 다리가 겹질려 계단을 구르기까지 한다. 일어나려 하지만 발목을 삐끗했는지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아픈 발목을 절룩거리며 3층으로 내려가는데 밑에서 ‘니벨룽겐의 반지’가 흘러나온다. 3층에 내려가 보니 문 앞에 민영이 주저앉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민영은 피를 토하며 말을 내뱉는다.

“언니.. 들어가지마.”

깜깜한 어둠 속에 분홍의 집에서만이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민영을 부축해 일으키는데 분홍의 집을 바라보는 민영의 시선이 일그러진다. 분홍의 집에서는 그가 한정판 뱅앤울룹슨 스피커를 들어 그대로 분홍의 머리를 내리찍는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분홍의 머리가 코까지 쪼개진다. 스피커는 그대로 분홍의 머리에 박혀있지만 ‘니벨룽겐의 반지’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 분홍의 시신 앞의 그는 두 팔을 벌려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의 눈은 싱크홀 처럼 푹 꺼져 있고, 검은 동공은 싱크홀 밖으로 해초처럼 흐물흐물 늘어졌다가는 천정까지 솟아올라간다. ‘니벨룽겐의 반지’음에 맞춰 춤을 추는 형상이다. 그의 시선이 모든 악의 기운을 끌어당기는 의식을 치루는 듯 하다.

민영이 깊은 호흡을 끌어당겨 숨을 들이 마신다. 민영을 부축하고 있던 나는 민영을 놓고 만다.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차갑다. 아니 얼음보다 더 싸늘하다. 민영은 두 손으로 모아 잡고 선다. 그녀의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른다. 뜨거운 것에서 나는 연기가 아닌 차가운 것에서 나는 연기다.

“악마가 죽인 사람들.. 분홍이 언니까지 다 내게 있어.”

말을 끝낸 민영이 기합을 내지른다. 정말이지 민영이 내지르는 기합소리가 여러 명이 울부짖는 소리로 들린다. 작두를 치켜세운 민영이 분홍의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대로 그에게 달려드는 민영이 붕 날아가 사방에 펼쳐진 그의 동공을 작두로 잘라낸다. 그와 동시에 분홍의 집 거실을 밝히던 불빛마저 싹뚝 사라진다.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나는 꼼짝 없이 그대로 서 있다. 어둠도 어둠이지만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어떤 진공상태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그때 내 앞으로 그가 스쳐지나갔다. 어떤 형체가 아니라 혼령이라고 해야 하나, 그저 스윽 나를 스쳐간 기체 같은 느낌이었다. 불현듯 효연이와 연수가 걱정이 된다. 정신을 차리고 움직여 본다. 벽이 손에 잡힌다. 계속 나아간다. 계단이다. 계단을 오른다. 미친 듯이 올라간다. 오르고 또 오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르려니 더욱 힘들고 두렵다. 하지만 효연이와 연수가 있다.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정강이에 부딪혀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나지만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삔 발목도 나았다. 나는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오른다. 간혹 시체가 걸리지만 거칠 것이 없다. 밟고 뛰어 올라간다.

마구 뛰어 올라오다 보니 옥상까지 뛰어 올라왔다.

근데... 이럴 수가 있나! 도심의 불빛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멀리 휘청거리며 택시를 잡아타는 술 취한 아저씨가 보인다. 정말 한가로워 보인다. 무척 일상적이며 지극히 당연한 풍경을 보는 나는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가 된 기분이 든다. 잠시 밤공기를 마셔본다. 공기마저 새롭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다시 옥상으로 이어진 문을 따라 나의 집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만 다리가 풀려버린다.

그가 연수와 효연을 양손에 안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아파트에 전원이 들어온다.

나는 사자 아가리에 내 아이가 있는 것 같은 두려움에 그에게 조심조심 다가간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왜 이랬냐고 묻지 마세요. 전혀 복잡하지 않아요. 그저 우리 가족 지키려고.. 지키려고....”

끝내 그의 볼에 눈물이 흐른다.

마침 효연이가 눈을 뜬다.

“아..빠?”

나는 소리를 지른다.

“가만 둬~!”

그는 효연을 달랜다.

“괜찮아, 효연아, 아빠야 괜찮아..”

그는 내게 다가와 효연이와 연수를 건넨다. 효연은 잠에서 깬지라 걸어서 온다.

“여보, 이거 받아요. 이거면 출입문 열수 있어요. 어서 나가야 해요.”

“당신은?.. 왜 빨리 나가야 되는데..?”

그는 대답 없이 열쇠를 내게 내민다.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그가 어서 타라고 재촉한다.

“이 아파트에서 우리 가족 외엔 아무도 살아나가서는 안 돼요.”

나는‘당신이 이미 다 죽였잖아.’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참는다. 그는 서두른다. 엘리베이터에 우리를 태운 그는 당장 연우에게 필요한 기저귀며 젖병이 든 가방을 효연이에게 준다.

“효연아 들 수 있지?”

그러고 보니 그는 효연이에게는 반말을 한다. 길가는 어린 꼬마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그가 말이다. 그의 말에 효연은 끄덕인다. 그는 무릎을 꿇고 효연의 볼에 입맞춤을 한다. 일어난 그는 연우의 이마에 뽀뽀를 한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본다. 예전의 그의 시선 그대로다.

“우리 연우 잘 부탁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다.

“어서 나가야 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그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하강하는 굉음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간다. 1층에 내린 나는 연수를 들쳐 업고 서둘러 1층에 걸린 자물쇠를 열고 밖으로 나간다. 마침 우유 배달 아저씨가 지나간다. 하늘은 퍼렇게 동이 터오고. 거짓말 같은 일상이 펼쳐져 있다. 순간 민영이는 아직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나는 효연이에게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편의점 심부름을 시킨다. 심부를 해야만 내년에 학교 갈 수 있다는 말로 효연을 독려한다. 효연은 입을 꼬옥 다물고는 꼭 해내겠다며 편의점으로 뛰어간다. 나는 효연에게 놀이터에서 보자고 소리친다. 효연이 뒤돌아 알았다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편의점을 향해 내달린다. 나도 다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파트가 기울어 간다. 나는 그럼에도 아파트로 들어간다.

새벽하늘만큼 아파트 내부도 퍼렇게 시야가 확보된다. 3층으로 뛰어 올라간 나는 분홍의 집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스피커에서는 신음소리처럼‘니벨룽겐의 반지’가 흘러나오고 있다. 거실 불을 켜본다. 불이 들어온다. 거실 끝에 쓰러진 민영에게 달려간다. 눈을 뜬다. 살아있다. 민영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언니.. 내가 끝냈어. 저기...”

민영의 손끝을 따라가면 서재 구석에 그가 반으로 쪼개져 각각의 의자에 걸터앉아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는 얘기인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민영의 말이 나를 내리친다.

“연우, 연우 어딨어? 연우말야.. 언니?”

쓰러져 있는 민영은 내 등에 연우가 업혀있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민영에게 물 한 잔 먹이며 등 뒤에 쿠션을 받쳐준다.

“민영아, 여기 가만 있어. 곧 올게. 곧 올게.”

민영은 피곤한지 두 눈을 감는다. 나는 일어나 민영의 얼굴을 보며 뒷걸음질 쳐 분홍의 집을 벗어난다. 나는 서둘러 아파트를 나온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이터로 향한다. 그곳엔 효연이 딸기 우유를 빨면서 시소에 앉아있다. 나는 맞은 편 시소에 앉아 효연에게 웃어 보인다.

“우리 효연이 이제 다 컸네. 혼자 편의점도 갔다오고.”

효연도 해맑게 웃는다. 그러다 두 눈이 똥그래지며 나를 부른다.

“엄마..! 저기.. 우리 아파트..!!”나는 뒤도 뒤돌아보지 않고 효연이를 안심시킨다.

“괜찮아. 효연아.. 괜찮아...”

나는 시소에서 일어나 효연을 안아 시선을 가려준다.

천둥소리와 같은 땅이 갈라지는 굉음이 들린다. 그럼에도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효연을 부둥켜안고 있는 나의 어깨를 작은 손이 만지작댄다. 돌아보면, 언제 일어났는지 연우가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 9 -

아파트가 있던 자리엔 커다란 싱크홀이 그 끝을 알 수 없게 뚫려있다.

이번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가족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대하다. 하지만 나는 모든 관심을 밀어낸다. 여론은 나를 가만 내버려둬야 된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관심 대신 나에게 주어진 것은 거액의 보상금이었다. 나는 또 보상금으로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무엇보다 나에게는 필요한 돈이다. 효연이와 연수.. 나에게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빨래를 널며 바라보는 이곳 전망은 앞집 빌라의 벽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촌이니 당연하다. 마침 앞집 창문이 열린다. 넉넉한 볼 살에 입술이 얇은 아줌마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간단하게 인사를 받고는 혹여 말이라도 걸까 얼른 집안으로 들어온다.

거실엔 효연이 엎드려 만화로 된 위인전을 읽고 있다. 효연이 옆엔 연수가 빈 젖병을 애타게 빨다 성에 안차는지 내던진다. 젖병을 던져놓은 연수는 몸을 뒤집더니 엉덩이를 하늘로 세우고는 낑낑댄다. 나는 똥이라도 쌌나 싶어 새 기저귀를 찾는데, 효연이가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와~ 우리 연수 일어났다!”

뒤돌아보니 연수가 벌떡 일어나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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