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번 주 수요일이었습니다. 약속이 있어 오목교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전화는 저의 사촌 여동생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례적인 일인데요, 왜냐하면 사촌 여동생과 일상적으로 통화하지 않는 사이였기에 그랬습니다.
그녀와의 통화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사촌 여동생에게는 나이 차이가 꽤나 나는 오빠가 있었는데요.... 저에게는 사촌 형이 되죠. 그 사촌 형은 지금의 저보다 어린 나이인 십몇 년 전에 이미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당시 사촌 형은 결혼도 하고 막 아들도 낳은 터였습니다. 한참 미래를 설계할 때라 주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는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지요.
저에게는 사촌 형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실은 이 추억이 그 형을 기억하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그 하나의 기억은 지금도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어있습니다.
참으로 잊을 수 없이 강렬한.
그것은 그 형이 난생 첨으로 저를 데리고 극장을 간 사건이었습니다. 맞아요, 저에게 그 일은 하나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어두컴컴한 곳에 모여 앉아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큰 스크린에서 본... 그때 난 생 첨으로 본 스크린은 정말로 웅장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둠 속에서. 그렇게 본 그 영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정무문>입니다. 그 큰 스크린에 괴조음의 기합을 질러대는 이소룡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에게 극장이란 공간을, 이소룡이라는 사내를 소개해준 사촌 형.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사촌 형.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죽음이 나에게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찢겨 나감과 동시에 고스란히 박제가 되어 각인되어 있는 경험입니다.
너무도 강렬했기에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다시 오목교로 향하는 지하철 안, 사촌 여동생의 전화는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여동생에게 그저 알았다고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례식장에서 부의금 받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부의금을 받는 일을 하던 제가 마지막 발인하는 날, 사촌 형의 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촌 형의 아들은 영정사진을 들기 위해 온 것이지요. 사촌 형이 돌아가시고 친가와는 관계가 소원해졌는지 어머니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그 아이는 덩치는 컸지만 제가 보기엔 아직 어린아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 온 터라 뻘쭘해하는 아이에게 나는 말동무가 되어 줍니다. 흔히 어른들이 하는 말로 “공부는 잘 하니?” 따위의 폭압적인 질문보다는 그저 제 얘기,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와 저의 경험담을 얘기했습니다. 다행히 이소룡을 아는 터라 설명이 쉬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그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저는 참으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됩니다. 그 기분을 저는 지금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아이에게 들은 얘기에 앞서 저는 먼저 다른 얘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찍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영화는 <정무문>처럼 근사한 영화였습니다. 그야말로 이소룡과 같은 대스타가 나오고 신나고 재미있어 정말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그런 영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을 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저는 EBS에서 아동용 드라마를 찍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원시가족 뚜따패밀리>라고 존 굿맨이 나오는 ‘플린스톤 가족’ 비슷한 포맷으로 제목 그대로 원시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총 26부작으로 만들 예정이었지만 16부작으로 막을 내린, EBS 방송국 개국 이래 최초의 조기종영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씁쓸하게 막을 내린 드라마였습니다. 물론 아무도 기억을 못 하니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하는 저의 동료들도 이 드라마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업영화나 공중파 드라마에 비하면 퀄리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 말입니다. 이 드라마를 하게 된 경위나 제작 과정이 순탄치 않아할 말이 많지만 이런 말을 들어줄 사람조차 제 주위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 동료인 영화인들에게는 관심 밖의 소외된 작업이었습니다. 이제 그 작업을 한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시 장례식장 발인 날로 돌아옵니다.
저는 사촌 형의 아들에게서 뜻밖에 말을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원시가족 뚜따패밀리>를 봤다고 제게 말합니다.
........!!
저는 <원시가족 뚜따패밀리>를 봤다는 사람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그것도 저를 첨으로 극장에 데려간 사촌 형의 아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운구만 하고 화장터까지는 동행하지 않아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오랜만에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 때문이라 둘러대겠습니다.
이제 한동안은 술을 먹지 않을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