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삼만 살
제가 좋아하는 8화 입니다.
이번 화엔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요.
무엇보다 동훈을 생각하는 지안의 감정이 커져 갑니다.
술집 건물의 안전진단을 해준 동훈입니다.
그 후 집으로 걸어오며 얘기하는 장면.
아! 이 장면 예술이지요.
길도 예쁘고.
대화도 아름답고,
약간의 숨소리를 담고 있는 동훈의 목소리도 매력적이고.
씬. 길
걷는 지안, 동훈.
지안 공짜로 안전진단도 해줘요?
동훈 그럼 한 동네 살면서 돈 받냐?
지안 건축산거 소문나면 여기저기서 다 봐달라고 그럴 텐데.
동훈 건축사 아니고 구조기술사. 여태 무슨 회산지도 모르고.
지안 비슷한 거 아닌가?
동훈 달라. 건축사는 디자인하는 사람이고 구조기술사는 그 디자인대로 건물이 나 오려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야 안전한가 계산하고 또 계산하는 사람이고. 말 그대로 구조를 짜는 사람.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거보다 세 게 내력을 설비하는 거야. 아파트는 평당 삼백킬로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나 강당은 하중을 훨씬 높게 설비하고, 한층이라도 푸드코트는 사람들 앉는 데랑 무거운 주방기구 놓는 데랑 하중을 다르게 설비해야 되고.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쎄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지안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동훈 몰라.
지안 나보고 내력이 쎄보인다면서요.
동훈 내 친구 중에 정말 똑똑한 놈이 있었는데, 이 동네에서 정말 큰 인물 하나 나오겠다 싶었는데
근데 그 놈이 대학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뜬금없이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버렸어. 그때 걔네 부모님 앓아누우시고 정말 동네 전체가 충격이었는데, 걔가 떠나면서 한 말이 있어.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돼보겠다고.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 하면서 난 어떤 인간이다란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원하는 걸 갖는다고 해도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거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무의식중에 그놈 말에 동 의하고 있었나 보지. 그래서 이런저런 스펙 줄줄이 나열된 이력서 보다 달리기 하나 써있는 이력서가 훨씬 쎄어 보였나보지.
지안 겨울이 싫어.
동훈 좀 있으면 봄이야.
지안 봄도 싫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싫어요. 지겨워. 맨날 똑같은 계절 반복 해 가면서.
동훈 스물 한 살짜리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지안 내가 스물 한 살이기만 할까? 한 번만 태어났으려고.
내 생애에 육십살씩 살았다 치고 오백번쯤 환생했다 치면 한 삼천 살 쯤 되려나.
동훈 삼만.
지안 어, 삼만. 왜 자꾸 태어나는 걸까?
동훈 가라.
지안 내일 봬요.
골목으로 들어간 지안, 다시 뛰어 나온다.
지안 파이팅.
얼마쯤 걸어간 동훈, 지안을 본다.
지안도 동훈을 보다 골목안으로 들어간다.
이번 화가 재밌어지는 가장 이유 중 하나는 박동훈이 상무로 추대되는 겁니다.
이는 곧 동훈이 도준영을 내려앉힐 수 있다는 것이기에 긴장감을 더해가죠.
하지만 동훈은 아직 상무가 될 의지가 없습니다.
씬. 정희네
동훈 어떤 애가 자기가 삼만 살이래.
정희 삼만 사리가 뭐야?
동훈 나이가 삼만 살이라고. 수없이 태어났을 테니까 모든 생을 합치면 삼만 살 쯤 되지 않을까?
왜 자꾸 태어나는지 모르겠다는데 난 알아. 왜 자꾸 태어 나는지.. 여기가 집이 아닌데 자꾸 여기가 집이라고 착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자꾸 여기로 오는 거야. 어떡하면 진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지 않고.
정희 야 이 바보야. 너 진짜 몰라? 어떡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몰라?
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씬. 길
술취한 동훈이 거리에 쭈구려 앉는다.
동훈 (스스로에게) 파이팅.
씬. 지안 방
동훈의 거친호흡 소리에 이은 '파이팅.'
그의 숨소리가 안타깝다.
지안의 나이가 삼만 살이라니.
그리고 지구가 고향이 아니라잖아요.
동훈도 지구에 잘못 태어난 거라고 하잖아요.
이쯤 되면 둘 사이 24살 차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지안과 동훈의 일종의 데이트 장면을 광일이 목격하고,
광일은 동훈의 정보를 얻고자 그의 지갑을 훔칩니다.
이를 눈치 챈 지안이 광일에게 쳐들어가죠.
이 장면에서 아주 멋진 지안입니다.
씬. 영광대부 사무실
광일 둘이 짜고 회사돈 삥땅치냐? 그 사람이 너 거기 취직시킨 거지? 둘이 같이 작업할라고?
그 사람은 아냐? 너 살인잔 거?
지안 너는 아냐? 나 살인잔거? 너는 나 못 죽여. 난 너 죽여. 거기서 받는 게 백십.
다달이 너한테 갖다 받쳐야 하는 돈이 백이십. 밤마다 두 세시간씩 접시 닦아 월세 내고 먹고 살아. 다 너 죽이지 않으려고 하는 짓이야. 회사 짤려서 그 돈도 벌지 못 하게 만들면 나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광일 썅년이 어디서....
경찰 사이렌 소리.
지안 (창문 열어 보는) 왔네. 경찰에 신고했어. 니가 소매치기하는 거 봤다고.
그 지갑 갖고 나가달라고 하면 갖고 나가주고.
광일 박동훈. 이름도 알았고, 회사도 알았고. (지갑 창문으로 던지는)
지안 그 사람 근처만 가. 진짜 죽어 너.
광일 그 새끼 좋아하냐?
지안 어.
광일의 좋아하냐는 질문에,
쓱 돌아선 지안이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어. 어. 어. 어. 어. 어. 어. 어."
좋아한다고, 어, 어, 어. 알았냐?
씬. 사무실
지갑을 찾아준다는 카페 주인의 전화를 받은 동훈,
때마침 출근한 지안에게.
(지안이 지갑을 찾아주려고 늦은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동훈 할머니 어디 아프시냐?
지안 아니요. 늦잠 잤어요.
결국 동훈은 상무로 추대되고,
이에 도준영은 지안을 호출하죠.
씬. 바
준영 그 뒤로 두 사람 어때?
지안 말 안 해요.
준영 박동훈 괜찮지 않나? 많이들 좋아했는데. 희한해. 그런 인간을 왜 좋아하나 몰라.
진짜로 사겨 볼 마음 없어?
지안 지금 날...
준영 직장 상사의 권위를 이용한 부적절한 관계. 넌 따로 보상도 받을 수 있어.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당장 짜를 건 아니고. 그냥 사귀고만 있어. 천만원. 선불로 줘야할 것 같아서. 나도 뭐 하나는 쥐고 있어야지. 뭐 하는 지 계속 도청하고 누구 만나나? 누구한테 무슨 얘기 하나, 감시도 하 고, 연애도 하고. 열심히 하라고 선불로 주는 거야.
지안 열심힌 어떻게 해야 되지? 옷 벗고 달려들어야 되나?
준영 그건 초 치는 거고. 그럼 그 인간 기겁 한다. 너 도청하니까 그 인간 어디서
뭐하는지 다 알 것 아냐. 슬쩍 접근해. 우연인 척.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 있을 법하게. 조졌을 때 박동훈 완전 발뺌 못 하게. 아니라고 펄쩍 뛰지 못 하게. 알아들어?
지안 어떤 남자가 미쳤다고 나 같은 여잘 좋아할까?
준영 그냥 밥 먹고 술 먹고 그것만 해.
지안 밥 먹고 술 먹고 그럼 좋아하는 건가?
준영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야. 어떤 남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밥 먹 고 술 먹고.
지안 많이들 그러지 않나? 뭐 바라는 거 있을 때.
준영 박동훈은 안 그래. 밥 먹고 술 먹으면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절대 발뺌 못 해.
거기까지만 가봐. 어려운 거 아니잖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준영의 제안이 오히려 지안을 설레게 합니다.
왜냐하면 밥먹고 술먹는, 거기까지 가면 박동훈을 발뺌을 못한다잖아요.
그게 좋아하는 거라잖아요. 지안은 이미 거기까지 갔잖아요.
지하철 역에서 동훈을 우연히 보는 지안.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훈을 보는 지안의 시선이 8화의 엔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