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
“너 커서 뭐 될래?”
초등학교 저학년쯤 된 나는 이 질문을 곱씹어 생각해보다가 답을 포기한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질문의 전제 조건이 <커서> 이다.
<커서> 즉 어른이 된 후의 일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 질문을 생각하다가 늘 답을 내지 못하곤 했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른이라 하면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뜻한다.
실상 어른들의 질문은 어른이 되는 것은 기본값으로 정하고 대개는 직업을 묻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직업은 고사하고 기본값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나는 아빠 혹은 남편이 되기 싫었다. 아빠인 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직업은 더더욱 갖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나마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놀고 싶었다.
여기서 <논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논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참으로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상태다.
일 예로 나는 체력장에 오래 달리기를 완주해 본 적이 없다. 늘 뛰다가 기권을 하고는 했는데, 생각해보면 힘들어서가 아니라 지루해서였던 거 같다.
“너 커서 뭐 될래?”의 질문을 듣고 내가 어른이 되는 상상을 할라치면,
질문한 친척쯤 되는 어른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용돈을 쥐여주거나 다른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황급히 끝내고는 했다.
결국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어른이 되는 상상 그 어디쯤에서 지쳐 주저앉고 만다.
어린 시절 꿈이 없었다.
대신 나는 모든 성장을 멈추고 어두운 영화관을 찾았다.
그곳에 착석하는 순간 미래의 직업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꿈도 없이 무기력한 나에게 극장은 참으로 걸맞은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에 한 눈이 팔리고 만다.
‘영화’에 한 눈 팔린 나는 어느새 ‘영화’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그 꿈이 영화감독이 되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척 무기력하고 쳐지는 엔딩.
똥 싸고 밑 닦지 않은 지저분한 엔딩.
하지만
영화감독이 되지 않는 바람에 나는 무척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너 커서 뭐 될래?” 물음에 답하지 못한 덜떨어진 아이는 영화관으로 쏙 들어간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아이는 눈을 부비며 영화관을 나왔다.
이제 아이에게 더 이상 “너 커서 뭐 될래?” 같은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그런 질문 따위는 필요 없게 다 커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제야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컸냐? 다 컸냐? 어른이 되었냐?”
내가 컸다면, 그때 정식으로 내게 묻겠다.
“너 뭐 할래?”
내가 무엇을 할지는
어린 시절 내가 구름 위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어른인 내가 땅에 발을 딛고 선택해야 할 무엇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