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그늘 시원한 바람
해가 뜨거운 일요일 오후.
여친과 곱단이랑 산책을 하다가 테라스가 있는 중화요리집을 발견했다.
새로 생긴 곳이다.
테라스에 반려견과 함께 자리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테라스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여친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여 내가 먹을 짜장면 한 그릇에 멘보샤 두 조각을 시켰다.
날씨가 좋아 맥주 한 병도 주문했다.
그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맥주 한 잔을 마시는데, 짜장면이 나왔다.
짜장면을 먹는데, 집에서 한 짜장면 같은..... 그래 맞다. 지수엄마가 해준 짜장면이 이 맛이었다.
지수엄마. 그러고 보면 그때 본 것이 마지막인 아줌마. 그 아줌마가 해준 짜장면 맛을 이렇게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수엄마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이 있는 대전집으로 놀러 갔던 때다.
태어나서 첨으로 어머니가 계신 집에 놀러 간 것이다.
언 듯 별나 보이지만 그리 별날 것도 없는 것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웠다.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서울에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태어난 이래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 적어도 지금 내 기억으로는 그러하다. 아무리 그러해도 공부를 조금은 하지 않았겠냐고 묻겠지만, 나는 공부를 한 적이 없다. 하는 모습을 봤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는 척, 100프로 시늉일 뿐이다.
여튼 아버지가 다니는 직장 본사가 대전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대전에 살았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지수엄마는 아버지 직장동료 부인이었다.
같은 회사 관사에 살고 있었던 터라 이웃들과는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의 눈으로 보기에 확실히 그러하였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서울 집에서는 그런 친밀도는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수엄마와도 참으로 친하게 지냈다. 지수엄마에게는 당연하게도 지수라는 아들이 있었다. 사내 관사이다 보니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과 어울려 난생 첨 야구란 것도 해보았다. 그때 한 야구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초등학교 내내 야구를 즐겨했다.
또 기억나는 스포츠는 지수엄마네 집에서 한 레슬링이다. 서로 부둥켜안고 힘겨루기를 하고는 했는데 나는 늘 몸이 붙기도 전에 항복을 외쳤고, 이 모습 때문에 그 애들은 나를 가리켜 서울에서 온 겁이 막고 약해빠진 서울 촌놈이라고 나를 떠올리고는 했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아마 레슬링을 한 그날 지수엄마가 해준 짜장면을 먹었던 것 같다. 지수엄마라는 분은 걸걸한 목소리에 시커먼 피부를 갖고 계신 아주머니였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이일화배우처럼 손이 커서 짜장면을 많이도 했다. 그때 먹었던 짜장면 맛이 바로 오늘 먹은 이 짜장면 맛과 같았다. 그날 먹은 짜장면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 짜장면이란 음식을 집에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중국집에서 먹던 짜장면 맛이 아니라 더더욱 기억이 또렷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수영장을 가보았다. 수영장도 처음으로 가본 것이다.
그냥 물 안에만 있었을 뿐인데 너무 재밌어 시간이 금방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기억나는 건 엄마가 입었던 그다지 이쁘지 않은 감색 원피스 수영복.
수영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해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건 피아노를 치던 엄마의 모습. 헤어밴드를 해 반듯한 이마를 내놓고는 하늘하늘거리는 얇은 원피스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던 엄마의 모습이 참 이뻐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체르니도 못 간 바이엘 수준의 실력이었지만 나의 눈에는 피아니스트 다름 아니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은 할머니가 해준 음식과 다르지만 그럼에도 내 입맛에 맞았다. 그러나 맛있다고 하면서 먹지 않았다. 왠지 맛있다고 하면 할머니를 배신하는 행위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날이던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어머니가 내가 자면서 본인의 젖가슴을 만지며 잤다고 말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상당 기간 할머니 젖가슴을 만지며 잠이 들고는 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젖가슴을 만졌다는 말에 나는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쏜살같이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할머니가 계신 서울 집으로 향해야 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어머니가 계신 대전에서 살고 싶었다.
그 당시 그런 맘을 품는 것은 변절 행위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늘 누구랑 살고 싶냐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묻고는 했고,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엔 진심으로 할머니랑 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대답은 할머니에게 자랑거리가 되어 고모들이며 삼촌에게 항상 내 대답에 자랑처럼 옮겨지고는 했다. 그 후 내 맘은 변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늘 원하는 대답을 해드렸다.
서울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나에게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잘 가라고 하는데, 나는 돌아볼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손을 세게 잡고 그저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심지어 이 모습까지 용맹한 행적처럼 할아버지의 입으로 할머니에게 전해졌고,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나를 무척 대견스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너무나도 엄마와 살고 싶었기에 돌아볼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이별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며 잘 가라고 소리쳤고, 나는 외면하듯 앞만 보고 걸어갔던. 그때 할아버지 손을 꽉 쥔 것은 돌아서 가지 않기 위한 다짐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모르는 비밀이 있다.
난 늘 할머니에 대해 꼭꼭 숨겨놓은 원망이 있었다.
할머니 때문에 나는 엄마와 함께 살지 못했다는.
이 원망이 훗날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죄송함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 꺼내어 얘기할 수도 없는 소소한 상처
너무 소소해 꺼낼 수 없는 상처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짜장면의 맛과 함께 고스란히 생각이 났다.
오늘 짜장면은 유달리 맛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이 집을 오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