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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게바라 May 29. 2022

4월 26일  화 _ 2022년

그제 본 영화 <올드>에서 그 해변에서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이 반려견이었습니다.
인간보다 수명이 짧은 반려견이 해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거였습니다.
저도 기억나는 반려견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반려견을 마당에서 키웠습니다. 딱히 사료도 있지 않아 사람이 먹는 잔반을 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참, 옛날 일이네요. 이름은 ‘해피’ 였습니다. 암컷이었고요. 새끼도 몇 번인가를 낳았습니다. 새끼를 보면 대충 아빠가 누군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옛날엔 골목에 발정 난 개들이 시침 뚝 떼고 붙어있고는 했던 그런 시절입니다.
‘해피’는 할아버지를 주인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이 막 난 새끼도 할아버지가 만지려고 하면 정중히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제가 다가가기라도 하면 으르렁댔으니깐 말입니다.

‘해피’는 충직하기도 했고, 매우 지능이 뛰어난 개였습니다. 그 당시는 사람 말을 알아듣고 앉고, 엎드리고, 발을 내미는 등의 기초훈련을 받은 개들이 없던 시절인데, ‘해피’는 달랐습니다. 할아버지 말하면 뭐든 다 알아듣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해피’를 일컬어 ‘개만도 못한 사람이 많다’는 관용어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 ‘해피’에게 큰 시련이 닥쳐옵니다.

그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겁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는데, ‘해피’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할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오고 며칠 후 멀쩡하던 ‘해피’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명백히 ‘해피’는 할아버지를 따라갔습니다.

저는 지금도 할아버지를 끝까지 따른 개라고 ‘해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해피’ 이후 맘 아픈 죽음에 직면합니다.
제 여친이 키우던 ‘곱단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저를 참 좋아했던 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랑 산책하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개입니다. 제 여친은 ‘곱단이’의 달리기 스피도를 따라갈 수 없었고, 산책 도중에 잔소리가 무척 심했습니다. 하여 저는 저랑 산책하는 동안만큼은 ‘곱단이’가 자유롭길 바랬습니다. 맘대로 움직이길,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제 속도에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곱단이’와 산책이 저에게도 신나게 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슬리퍼를 신어도 되게 되었습니다. ‘곱단이’ 달리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곱단이’는 뒷다리부터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앞다리까지 모든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곱단이’는 매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유모차에 몸을 고정시키고, 뛰지도, 짖지도 못하고 조용하게.... 그런 곱단이를 갓 태어난 강아지라고 말하는 사람, 유모차에 어떻게 그렇게 조용하게 가만히 앉아있는지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곱단이는 잘 싸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곱단이를 여친은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으로 마사지하듯이 해서 오줌, 똥을 빼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곱단이는 씹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사기에 갈아 만든 음식을 곱단이 목구멍에 넣어서 식사를 도왔습니다. 이 모든 케어를 제 여자 친구가 했습니다.

곱단이가 떠난 오늘까지 오줌, 똥을 누이고 밥을 먹이고 산책을 했습니다.

죽은 곱단이를 안은 여친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계속 계속 웁니다.

저는 차마 울지 마라, 진정하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실컷 울다 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https://youtu.be/LEioOQ90y_o
 

떠난 곱답이의 표정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습니다.

곱단이 유골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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