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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게바라 Jul 13. 2022

6월 21일  화 _ 2022년

> 3화 _ 해방클럽     


소주를 사러 밤길을 걷는 구씨는 어제 일을 생각합니다.     

 

미정  

왜 매일 술 마셔요     


구씨  

아니면 뭐 해   

  

미정  

할 일 줘요술 말고 할 일 줘요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개새끼개새끼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가득 채워지게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공장에 일도 없고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사랑으론 안돼추앙해요     


이 말을 들은 구씨는 술병이 다 빈 것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구씨  

들어가들어가 자     


미정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구씨  

내가 뭐 하고 싶은 인간으로 보여너 내 이름 알어나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고

내가 왜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이름도 말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있겠냐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오늘따라 집에 가기 싫다는 미정은 직장동료와 술 한잔을 하면서 구씨 얘기를 하며, 
 구씨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남자가 우리 집에서 밥 먹어불편해.”

미정도 어제 구씨와 했던 대화를 생각하네요.      


구씨  

너 남자한테 돈 빌려줬지사내새끼들도 여우야

돈 빌려 가고도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들 여자 알아본 거라고

뚫어야 될 문제를 뚫어엉뚱한 데로 튀지 말고     


미정  

그 자식이 돈을 다 갚으면 아무 문제없을까? 그래도 똑같을 거 같은데

한 번도 채워진 적 없고거지 같은 인생에 거지 같은 인간들 다들 잘난 척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     


구씨  

미안하다나도 개새끼라서.      


막차를 놓치고 술 먹자는 직장동료를 뒤로하고 기어코 막차를 타고 온 미정이 길에 돌을 움켜쥡니다. 

바보 같은 게 맨날 술만 마시는 게.”

순간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가 생각이 나네요. 저 돌로 구씨 집의 유리창 하나쯤은 작살을 낼 거 같아요. 

그런데 그녀 앞에 껄렁해 보이는 남자 둘이 눈에 띕니다. 

다가오는 미정을 유심히 보는 껄렁해 보이는 남자 둘. 

그때 마침 소주를 사 오던 구씨가 미정 뒤를 따라붙습니다. 

구씨가 멋지게 미정을 구해줄 줄 알았는데 껄렁남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사라집니다.

저의 값싼 예측이 계속 빗나가며 

창희의 말대로 노인네 돌아가시고 물난리 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정이 동네의 밤은 깊어만 갑니다.     


창희  

엄마제발 에어컨 좀 켜요어머니제발요     


엄마가 에어컨을 켜자 얼른 마루로 나와 눕는 창희입니다. 

에어컨을 켰으니 창문을 닫는 엄마 시선으로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구씨가 보입니다. 

이를 본 엄마의 대사입니다. 

아휴왜 세상을 등지고 돌아앉았을까?” 

구씨에 대한 궁금증은 시청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면서, 

미정의 ‘나를 추앙해 이슈’는 일단락이 되어 갑니다.      


한편, 

행복지원센터에서 눈물을 터트린 일이 동료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미정처럼 계약직이며 동료들이 모여가는 괌여행에 끼지 못한 보람이 미정을 챙깁니다.      

보람  

저랑 같이 사진 동호회 안 할래요술 마시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 다 괜찮아요

괜히 별거 아닌 걸로 자꾸 불려 다니는 거 그렇잖아요     


미정  

배우는 거 그만하고 싶어수영을 배우는데 자유형이 안 됐어근데 여럿이 하는 거니까 배영으로 넘어가고 평영으로 넘어가고학교 수업이랑 같애난 구구단을 떼지 못했는데 분수로 넘어가고 그 뒤로 난 그냥 앉아있는 거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그냥 앉아있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분위기를 바꿔 기정이 소개팅하는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소개남  

정수가 기정 씨를 핸드폰에 받는 여자라고 저장해 놨던데그게 무슨 뜻이에요     


기정  

그거요     


소개남  

전화 잘 받는 여자그런 뜻이냐니까 아니라고 기정 씨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던데 무슨 뜻이에요     


기정  

또 이게... 갑자기 울컥하네요얘기하려니까예전에 친구들끼리 그러니까남녀 사이의 최고의 경지랄까뭐 그런 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어려서 학교 때 역사책에서 봤던 참수당하는 남편의 머리를 달려가서 치마폭에 받아 낸 여자가 예생각이 나더라구요어려서는 너무 끔찍했고 이해도 안 됐는데 뭐나이가 드니까 지금은 받겠다.’ 아니, ‘받아야 한다.’ ‘딸에 떨어지게 두지 않겠다’ ‘달려가 치마폭에 받아 내겠다.’ 이게 그렇지 않나요받아 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그리고 또 예전에 잠깐 여름 성경 학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던 얘기를 듣는데 희한하게 저는 마리아한테 마음이 가더라고요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가 여섯 시간 정도거든요그 여섯 시간을 쭉 쫓아가요마리아가그리고 그 예수의 시신을 내려요. ‘멋지다.’ ‘나도 옆에 있어 줘야지.’     


기정에게 소개팅 얘기를 들은 창희는 대번에,      


창희  

그딴 걸 왜 받냐고누가 오냐너 같은 여자한테목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누가 오냐고.     


이 술자리의 끝은 구씨얘기로 마무리되는데요,  

술을 마시며 기분 전환용으로 술잔을 수시로 바꾸고, 자세도 이렇게 저렇게 바꾸며 마신다는 구씨 얘기를 두환에게 들은 창희는 구씨를 찾아갑니다. 

그랬다가 구씨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구씨  

니 눈에도 내가 한심해     


구씨는 아마도 미정이 자신을 한심하게 보고 있다고 판단하는 거 같아요. 

구씨와 미정의 만남에 앞서 일상적인 남녀간의 만남에 대해, 로또의 설렘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박진우이사의 입을 통해 알아보는 시간이 마련됩니다.      


기정  

절 아무도 안 건드려요다들 절 건너뛰어요이사님처럼

왜 다들 절 건너뛸까요이게제가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자존심의 상처를 견뎌 가며 듣겠습니다왜 그럴까요     


진우  

일단제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자면요남자는 좋아하는 스타일이 안 변해요친구 놈들 새로 사귀는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나가서 보면 전에 사귀던 여자들이랑 똑같아요취향이 안 바뀌어요대개 그코미디언은 코미디언이랑 배우는 배우랑 결혼하잖아요     


기정

자주 보니까...     


진우  

으응 자주 봐서가 아니고 좋아하는 인간상이 다른 거예요만나면 신나고 유쾌한 걸 좋아하느냐아니면 두근거리고 설레는 멜로를 좋아하느냐저는 멜로.     


기정

저도 멜로     


진우

연애 경험이 많은 사람은 자기 취향을 정확히 아는데 경험이 적은 사람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스타일인지 잘 몰라요다들 멜로멜로 하니까 멜로가 하고 싶은 거뿐이지막상 그 상황이 되잖아요달달하고 간질간질한 걸 부끄러워서 못 견뎌해요.      


기정

부끄럽지만 좋아요     


진우

부끄러운 거는요불편한 거예요그러니까 어팀장님은 다른 장르에서 훨씬 자연스럽고 매력적일 수 있어요남녀 간의 장르가 멜로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코믹도 있고 엽기스릴... 스릴러스실러좋다그러고 뭐생활서스펜스 얼마나 많아요이 중에 염팀장님은 어떤 장르에서 가장 파워풀해질까요

(기정이 못 알아듣자염팀장님의 장점은     


기정

... ... 전 진돗개 같은 여자예요배신 안 때리고 쭉 가요남자를 지켜요그리고 그 남잔 남자여야 돼요그러니까 막 우락부락해야 된다는 게 아니고 내가 아는 그 남자다움이 있어요남자.

 

진우

(손가락 튕기며생활이네요살짝 스릴러로 갈 뻔했는데 생활취향인 사람이 많아요이벤트니 뭐니 달달한 그런 거 별로 관심 없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가 제일 중요해요중심을 보는 거죠     


기정

중심태도     


진우

뭐 그런 쪽으로 염두해 두고 보시면 얼추 맞을 거예요그리고 아무나 사랑하겠다는 막무가내식 결심보다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꼭 먼저 대시해 보겠다는 결심이 훨씬 건설적일 거예요.

 

기정

... (박수 짝짝역시역시 전문가다우시네요맘에 드는 남자 나타나면 꼭 먼저 들이대 보겠습니다     


진우

들이대지 말고고백     


기정

고백은 부끄러워서     


진우

저희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 ‘집하고 짝은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때 되면 온다.’ 때 되면 옵니다내게 옵니다     


기정

올까요?     


진우

옵니다     


기정

이거 복채라도 드려야 될 거 같은데하하...      


돌아오는 길에 기정은 창희의 전 여친 예린을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는데요. 

집에 돌아온 기정에 창희에게 묻죠.      


기정

너 왜 니가 차 놓고 차인 척 해이예린 니가 찬 거잖아

같이 보기로 한 영화 혼자 보고 같이 가기로 한 식당 혼자 가고 그런 경우를 당하고 안 헤어질 여자 있어     


창희

걔가 먼저 시작했어내가 봤어걔 눈빛. ‘이놈 별거 없구나’ 하는 그 재수 없는 오만 정 떨어지는 눈빛여자들 만나다 보면 보이는 눈빛 있어. ‘이놈 별거 없구나이제 어떻게 헤어져야 될까뭐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어떻게 족칠까?’ 처음엔 나도 무지 기어기어야지그래 나 벌거 없는 놈인 거 안다근데 나 만나면 재미는 있다심심하진 않다그렇게 어르고 달래도 뭐 안 되면 뭐그럼 별수 있어끝내자는데 끝내는 수밖에 그럼 그때부터 죽어라 싸우는 거야내가 영화를 혼자 봐서 헤어진 걸로 만들고 걔가 새벽에 딴 놈이랑 톡해서 헤어진 걸로 만들어야 돼절대로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인 거 그게 들통나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나도 알아걔가 쥘 수 있는 패 중에 내가 최고의 패는 아니라는 거더 좋은 패가 있겠다 싶겠지나도 알아     


이 대사 참 공감이 가는 대사예요.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현실에서는 듣기 쉽지 않죠.

이 말에 미정이 공감하며 가상의 당신에게 이야기합니다.      


(미정)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불쑥 구씨의 대사가 삽입되네요.  

    

구씨

너는넌 누구 채워 준 적 있어     


구씨의 대사가 미정이 찾는 답에 힌트가 되는 것 같아요.

지금 미정의 독백은 참 중요한 대사입니다. 다시 한번 음미해 보세요.      


출근한 미정에게 행복지원센터에서 동호회를 추천하겠다고 합니다. 

동호회에 들지 않은 세 사람이 모였습니다. 

태훈과 상민. 그리고 미정 이렇게 셋.

태훈은 셋이서 가짜 동호회를 만들자고 제안을 합니다. 

상민과 태훈이 어떤 동호회를 만들까 고민하는데,      


미정

우리 진짜로 하는 건 어때요해방클럽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진 모르겠는데 꼭 갇힌 거 같아요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상민

해방좋다!     


그렇게 셋은 행복지원센터 상담팀장(향기)에게 신고합니다.      


향기

해방이 뭐 하는 거예요?     


상민

대한민국은 1945년에 해방됐지만 저흰 아직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상담사

아니그래서 세 분이 뭘 하시겠다는.....     


상민

해방... 할 겁니다     


이렇게 질러놓고 세 사람은 다시 모입니다.      


상민

근데 우리 진짜 뭐에서 해방돼야 되는 거야뭐 해야 돼?     


태훈

그것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죠뭐에서 해방돼야 되는지.      


헤어지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이상하게 결연해 보입니다. 

마치 2월 29일 가슴속에 태극기를 숨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독립투사 같습니다.      


일요일입니다. 밭일을 돕던 미정이 쉬고 있는 구씨에게 툭 말합니다.      


미정

혹시 내가 추앙해줄까요     


구씨

(고개 돌려 보는)     


미정

그쪽도 채워진 적이 없는 거 같아서필요하면 말해요.     


툭 던져놓고 걸어가는 미정입니다. 

다음날 출근하는 미정을 모른 척 지나치는 구씨에게     


미정

인사는 하고 지내요     


구씨

(걸음 멈추고 보는)     


미정

인사는 하고 지내요     


구씨

마을버스 와뛰어뛰라고     


인사만으로 둘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미정과 구씨가 서로 ‘알로하(인사)’ 하면서 3화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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