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누구 일 잘한다고 하는 소리 내 못 들어 봤는데 구씨는 아주 이뻐 죽어. 똑 부러지게 잘한다고. 뭘 해도 잘했을 거라고. 우리 미정이 말고 누구 칭찬하는 소리 처음 들어 보네. 어려서부터 얘만 마음에 들어 했잖아. 응? 내가 만든 서랍 보고는 맨날 눈 흘기는 양반이 얘가 만든 건 두말 안 해. 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몰딩도 하고 못 돌리는 기계가 없었어. 작은 게 얼마나 야무졌는데, 응, 조기, 조기, 조기, 조거, 조게 얘 어릴 때 공장에서 찍은 거, 응.
구씨는 어린 미정의 사진을 힐끔 바라봅니다.
엄마의 입을 통해 구씨는 어린 미정과도 알로하 인사합니다.
이번엔 창희를 통해 미정일 만나는 구씨네요.
창희
미정이 걔 조심해야 돼요. 갑자기 욱해요. 욱할 때 보면 무서워요. 무서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 뭐라 그래야 되나? 왜, 싸움 못하는 애들 특징이 이렇게 차면 큰 사고인데 그걸 모른다는 거 우린 뭐, 맨날 치고받고 싸워도 사실 진짜 큰 사고는 안 나게 죽어라 계산 때려 가면서 싸우는데 미정이 걘 그냥 자기가 열받으면 여기 앞에 뭐 낭떠러지에 서 있잖아요? 그럼 냅다 발로 차버릴걸? 얘는 그냥 머리가 없어요. 생각이 없어. 이거 앞뒤가 없는 거야.
미스테리한 남자, 구씨에게 창희가 속시원하게 질문을 합니다.
창희
에어컨 마음껏 트는 집에서 혼자 살고 싶어요. 사람 목소리 안 들리는 곳에서. 형은 내 로망이에요. 혼자 사는 남자. 근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됐어요? 이 동넨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데, 여기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구씨
없어.
창희
근데 어떻게 오게 됐어요? 어려서 이 근처에 살았어요?
구씨
잘못 내렸어.
헐... 잘못 내렸다니... 어이없으면서 무척 심오한 대답 같기도 하네요.
여기 심오한 대화가 이어지는데요, 미정의 회사입니다.
미정이 ‘해방클럽’을 만든 걸 알게 된 동료가 묻습니다.
수진
해방클럽이 뭐하는 데야?
미정
해방
수진
그러니까 그게 뭐하는 거냐고?
미정
해방
수진, 지희
......?
미정
나도 잘 몰라.
수진, 지희
뭐야?
지희
면피용으로 막 만든 거 아니야? 행복지원센터 불려 다니기 싫어서?
미정
진짜 하기로 했어.
지희
그러니까 뭘 하는 건데? 뭘 하는 데일 거 아냐? 모여서 뭐 하는 건데?
미정
모여서는 아니고. 각자.
지희
각자 뭐하는 건데?
미정
뚫고 나갈 거야.
지희
어딜?
미정
여기서.
지희
어디로?
미정
저기로. (창밖을 가리키는)
지희, 수진
뭐야?!
사실 뚫고 나가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구씨였잖아요.
미정이 구씨에게 추앙하라고 말했을 때,
구씨가 이렇게 말했더랬죠.
“뚫어야 될 문제를 뚫어. 엉뚱한 데로 튀지 말고.”
미정이 반찬을 들고 구씨를 찾아갑니다.
미정
고구마 줄기 좋아하는 거 같다고 드시래요.
구씨
(딴짓하는)
미정
왜 이랬다저랬다 해요? 괜찮았다가 차가웠다가
구씨
똑같던데. 아저씨랑 너랑. 아니, 왜 자기가 받아야 될 돈인데 자기가 잘못한 것 처럼 주눅 드나 몰라. 받아줘? 좋게 좋게 해 봐라, 돈 나오나.
미정
한때 알았던 사람하고 끝장 보는 거 못하는 사람은 못해요. 돈 못받는 거보다 자기 자신
까지 밑바닥으로 내던져 가면서 험한 꼴 보는 게 더 힘들어요.
구씨
미안하다. 술꾼 주제에. 각자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나도 개선의 의지가 없고 너도 개선의 의지가 없고.
정작 구씨는 잘 뚫리지가 않네요.
미정과 구씨 사이는 다시 이격이 넓어집니다.
한편,
기정은 박이사에게 로또복권을 선물 받습니다.
사실 억지로 받아낸 거나 다름없긴 합니다만, 어쨌든 받았습니다, 로또.
기정
아, 1등 맞아서 기절 한번 해보고 싶네요. 이렇게 힘든데 쓰러지지도 않아, 코피도 안 나, 아유, 나 졸린 애 말하는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네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이게, 아,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생리할 때가 됐...악, 아, 뭔 말이야. 죄송해요. 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요.
박이사
심호흡 한번 해보세요. 천천히. 자. (심호흡 해 보인다.)
기정
(따라 하는)
박이사
한 번 더, 천천히. 힘들 때 심호흡하면 그것도 휴식이라고 좀 괜찮아져요. 좀 편해지셨죠?
기정
머리 밀고 싶어요. 시원하게 빡빡. 아니, 한 번도 머리발 덕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여성성의 상징처럼 놓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힘들게 감고 팔 떨어지게 드라이하고 아무 의미 없는 머리카락에 평생을 시달린 느낌이에요. 깔끔하게 밀면 쓸데 없는 기대도 없어지고 세상 가벼울 거 같아요.혹시 머리 밀면 짤리나요?
박이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할 거라면서요. 씁, 머리 민 여자를 만날 남자가....
기정
당장은 아니고 겨울에, 둘 중 하나는 꼭 하려고요.아, 힘드니까 머리카락 붙어있는 것도 짜증 나고 별게 다 거슬려요. 밤만 되면 이 팔다리랑 목을 다 분해해서 이렇게 깨끗하게 기름칠하고 아침에 다시 끼우고 싶다니까요.
박이사
그래서 제가 쉬지 않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거든요.
기정인 말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시시콜콜한 디테일들이 다 그녀 입을 통해 전해지니깐요.
미정이는 현아를 만납니다. 그럴 수밖에요. 구씨와의 관계가 뚫어지지 않잖아요.
현아
만나고 헤어지고 수십 번인 거 같은데 왜 매번 헤어질 때마다 이렇게 바닥일까? 매번 처음 보는 바닥 같아.
미정
그냥 더 만나든가.
현아
싫어. 그 새끼 사랑 끝났어. 더 나올 게 없어. (맥주캔 벌컥) 아, 나는 갈망하다 뒈질 거야. 사랑을 줘. 나도 줄게. 더 줘. 나도 더 줄게. 선물 따위는 필요 없어. 이벤트 따위도 필요 없어. 그냥 사랑만 줘. 배고파, 더 줘, 더, 더, 더. 아씨, 세상 사랑을 다 쓸어 먹어도 안 채워질 거다. 너는 나처럼 갈구하지 마. 너 남자 있지?
미정
(고개 절레절레)
현아
야, 다 줘, 응? 전사처럼 다 줘. 그냥 사랑으로 폭발해 버려. 절대 나처럼 갈구하지 마.
지금 현아가 한 말은 알면서도 이행할 수 없는 ‘미션’ 같은 겁니다.
이 ‘미션’ 미정이 언어로 풀이하면, <추앙해>가 되는 것이겠지요.
천둥이 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해방클럽’ 첫 정모가 열립니다.
세 명은 마주 보지 않고 비 오는 창가 앞에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상민이 합니다.
상민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공백없이 말해야 된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이렇게 하는 게 불편한가?
태훈
아니요. 진짜 편하고 좋네요.
상민
딴 거 없어. 해방하려면 퇴사하고 이혼하는 수밖에.
태훈
전 그중에 하나 했는데, 그것도 딱히 해방은 아니더라구요.
상민
미안해. 어딜 가나 속 터지는 인간들은 있을 거고. 그 인간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고. 그럼 내가 바뀌어야 되는데 나의 이 분노를 놓고 싶지 않아. 나의 분노는 너무 정당해.
태훈
너무 정당하죠.
상민
너무너무 정당한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되는 게 고역이야. 일은 드럽게 못하면서 잔소리는 안 듣겠다고 하는 인간들이나 뭐라고 하면 꼰대다. 참자. 참자.
태훈
그래도 참으시네요.
상민
티나?
연미정씨는 왜 해방클럽을 생각했어?
미정
사람들은 천둥 번개치면 무서워하는데 전 이상하게 차분해져요. 드디어 세상이 끝나는구나. 바라던 바다. 갇힌 거 같은데 어딜 어떻게 뚫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다 같이 끝나기를 바라는 거 같아요.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다. 다 무덤으로 가는 길인데 뭐 그렇게 신나고 좋을까? 어쩔 땐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정직한 사람들 아닐까? 그래요.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천둥 번개가 치는 이날,
기정은 태훈에게 로또를 선물했고,
미정은 구씨를 구해내려 빗속을 뛰쳐나갔습니다. 번개가 전봇대를 때려서 구씨가 위험한 줄 알았거든요.
이 드라마에 조금은 작위적인 상황이 연출되긴 했지만 다음 장면으로 이 장면은 바로 잊혀져서 다행입니다.
다음 장면은 밭일을 한 염씨네 가족(기정을 뺀)과 구씨가 쉬고 있는 장면입니다.
날씨는 쨍한데 비온 뒤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 바람이 미정이 쓰고 있는 모자를 배수로 건너편으로 날려버립니다.
창희
으이그, 저쪽 다리로 갔다 와야지, 뭐.
엄마
아이고, 저쪽이 빠르지.
창희
이쪽이 빠르죠.
엄마
눈대중도 없는 놈 저쪽이 빠르지.
창희
아이, 저...
구씨
(운동화를 신으며 일어나는) 있어 봐.
창희
제가 갖다 올게요.
창희 일어나 가려는데 구씨는 배수로 반대인 산쪽으로 걸어갑니다.
창희
(배수로 건너편 가리키며) 아니, 저기 있는데... (미정이 보며) 어디 가?
배수로 먼쪽으로 걸어가는 구씨의 귓가에 미정의 대사 다시 울립니다.
(미정)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그래서 봄이 되면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예요.
구씨 더 갈 길이 없자 돌아서더니만 냅다 배수로를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구씨 단숨에 배수로를 뛰어넘어 버립니다.
(구씨)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는 거?
(미정)
확실해.
(구씨)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미정의 모자를 집어 든 구씨 다시 전력을 다해 배수로를 뛰어넘는 모습에서 4화가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