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뭔가 있을 것 같던 구씨. 이제 그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다 못해 폭발할 지경입니다.
정말이지 뭐야? 이 사람.
그날 밥상머리에서 구씨의 단서가 아주 조금 던져지는데요, 창희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창희
헐 구씨 성을 가진 육상 선수가 이렇게나 많다니.....
(구씨 보고) 혹시 이름을 오픈하실 생각이....
구씨
(밥만 먹는)
창희
구진서? 구자윤? 이거 이제 이러다가 진짜 이름 나온다고, 이게... 구자경.
구창모. 구창모? 와, 내가 구창모를 알다니, 아니야. 아니야, 아이고. 몰라.
난 몰라. 알아도 몰라.
실은 저는 드라마를 다 보고, 다시 보고 있는 거라 이 장면에서 뜨끔하네요.
구씨, 맞네, 맞아요. 전에 육상 선수였어요.
그날 밤, 미정은 괜한 핑계로 밖으로 나옵니다.
미정
왜 슬플까? 왜 슬프지.
(구씨 집쪽을 보며) 오다가 말아. 맨날 오다 말아.
현아
나는 갈망하다 뒤질 거야. 너는 나처럼 갈구하지 마.
미정
나는 큰 사람이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미정의 이 대사를 받아 창희가 얘기합니다. 구씨한테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구씨가 맨날 평상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있어서 나온 얘기랍니다. 하지만 창희에게 중요한 대사가 되는데요, 그러므로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해요.
창희
1원짜리를 77억 개 쌓으면 저 산만 하대.
두환
77억 개를 왜 쌓아?
창희
감 안 오냐? 하, 난 무슨 말인지 바로 알겠던데. 77억.
두환
77억이 뭐?
창희
세계 인구 인마. 날 1원짜리로 놓고 봤을 때 77억 개면 5천 톤 정도, 저 산만 하단다.
1원짜리로 치환해 놓고 보니까 그냥 한눈에 확 들어오잖냐. 세계 인구와 나.
두환
근데?
창희
아이씨 내가 죽기 기를 쓰고 살고 있잖니?
근데 저렇게 쌓여 있는 1원짜리 산에서 1원짜리 날 찾을 수 있겠니?
마침 돌아오는 길에 미정과 술을 사러 나온 구씨가 마주칩니다.
아, 그전에 궁금한 장면이 있어요.
슈퍼에서 나온 미정이 슬리퍼가 벗겨집니다. 그 슬리퍼를 미정이 잠깐 바라보고 신는 장면. 뭐지? 벗겨진 슬리퍼를 신는 이 장면? 있는 그대로 보면, 짝을 찾아 제대로 신는다로 보이네요.
여튼 미정을 봤지만 모른 척 지나가는 구씨.
미정
샀는데, 소주. (소주 건네는) 받아요.
구씨
얼마야?
미정
됐어요.
구씨
돈은 있냐?
미정
그 정도는 있어요.
구씨
확실해?
미정
(가다가 돌아보면)
구씨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돼 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 있을 거라며?
미정
한 번도 안 해봤을 거 아니에요.
난 한 번도 안 해 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구씨
(가는)
미정
하기로 한 건가?
구씨
했잖아. 아까 낮에.
돌아서 오는 미정의 입꼬리가 실룩실룩거립니다.
이 타이밍에 ‘해방클럽’의 로직도 완성이 됩니다.
상담팀장, 향기
제가 일부러 깐깐하게 구는 게 아니라요, 그렇잖아요. 저도 감사라는 걸 받는데,
해방클럽이 뭘 하는 덴지 증거 자료는 남겨야 되잖아요. 없어요? 뭘 한다. 뭐라도....
그럼 일지라도 쓰시던가요.
이 드라마 제목 <나의 해방일지>가 이렇게 딴딴하게 완성돼갑니다.
여기에 태훈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집니다.
태훈
저 여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더라고요. 옷을 봐도 사진을 봐도 그냥 그런데 필체는 이상하게 진짜 아버지 같았어요. 펜대 잡는 분이 아니셔서 전화번호 수첩 하나 있었는데, 그걸 매일 봤어요. 근데 수첩에 그런 글이 있었어요.
‘사나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런 고민 안 하실 것 같은 분이었는데.....
다들 미정이 산 노트를 나눠 들고 헤어집니다.
곧 각자의 ‘해방일지’가 될 노트를 들고 말이죠.
퇴근길에 미정이 소주를 사들고 나오는 구씨를 보게 됩니다.
미정
저녁 먹었어요?
구씨
생각 없어.
미정
이따 뭐해요?
구씨
니네 식구들 다 있는 데서 뭐 할 수 있는데?
헉, 다시 멀어집니다. 뚫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아닌가 봐요.
한편, 창희에게 눈에 들어오는 직장 동기 다연이 있습니다. 다연이는 대놓고 이렇게 말해요.
다연
네 목소리 들릴 때마다 막 귀가 바짝 서. 염창희 말한다.
이 대사 참 좋아요, 그래서 그런지 다연이란 캐릭터가 무척 예뻐 보여요.
이러니 주위 동료들도 모를 리 없죠. 그래서 친한 동료, 민규가 묻습니다.
민규
씁, 다연이 걔, 예린이 정도 되지 않냐?
창희
되지.
민규
근데 왜 연락 안 해?
창희
예린이 정도 된다는 건 끌어야 되는 유모차 있고, 보내야 되는 유치원 있는 그런 여자란 건데, 뭐, 적어도 내가 괜찮다 생각하는 여잔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되는 여잔 건데 근데 난 그걸 해 줄 수 없는 남자란 거 그게 나의 딜레마야.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여자를 만나니까 계속 헤어지는 거야. 다연이라고 뭐 다르겠어? 걔 욕심 빤하고 내 주제 빤하고.
민규
그냥 연애만 하면 되잖아.
창희
걔가 연애만 하고 싶겠니? 걔도 나이가 있는데.
그리고 돌아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창희의 상상씬 하나가 들어가는데요,
달리지도 않는 스포츠카에 앉아있는 창희입니다. 그가 상상하는 스포츠카는 굳이 달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과시용으로는 안 달리는 것이 오히려 좋을 테니 말이에요.
이 드라마에서 창희는 앞서 한 대사들에 이어 이 상상 장면으로 빤한 남자 마침표를 찍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오프닝에 제일 먼저 이름이 나오는 ‘이민기’ 배우를 이대로 두진 않겠죠?
창희처럼 빤한 인물 기정이가 나온 이런 장면도 있네요.
밤이에요.
기정이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어요.
미정
안 자고 뭐해?
기정
배가 고픈데 먹고 싶은 게 없어.
미정
배고픈 게 아닐 거야.
기정이는 사랑에 빠진 거예요.
기정이 박이사에게 말합니다.
기정
희한한 게요. 며칠 안 힘들었어요. 그 남자 생각하니까 안 힘들더라고요, 진짜로.
박이사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거라고.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다고.
기정
근데 열 장 다 꽝이란 소리를 들으니까 어떻게 말 붙일 거리가 없어지니까 그때부터 바로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막.
기정이는 미친 게 틀림없다고 실토합니다. 태훈 생각만 머릿속에 뱅뱅 돈다고요.
지금 태훈은 미정이 작성한 ‘나의 해방일지’를 읽고 있네요.
태훈
좋네요.
미정의 ‘나의 해방일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좋기만 한 사람. 생각하면 좋기만 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다 좋아하는 게 아니다. 실망스럽고, 밉고, 혐오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 있다. 티내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척 참는 것뿐.
미정
생각해보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웠던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 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론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다음에 달라붙는 씬.
이 장면의 묘미가 ‘박해영’작가의 능력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산포싱크의 구씨가 아버지에게 다가갑니다.
구씨
저.. 막내 따님 전화번호 좀.....
두둥!
‘오다가 말아, 맨날 오다가 말아’ ㅆ던 구씨가 이제 오기로 한 겁니다.
것도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핸번을 물어서. 왜 그랬잖아요, 구씨가 ‘니네 가족 다 있는 데서 뭘 하냐고?’ 이제 가족 보는 데사 하겠다는 선언 같은 겁니다.
곧
모르는 번호에서 문자를 받게 되는 미정입니다.
[ 돈 생겼는데 ]
[ 혹시 먹고 싶은 거 ]
[ 나 구씨 ]
이 문자를 보는 미정의 표정이 너무 이쁘네요.
미정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상민
(‘해방일지’ 다 읽고) 이게 가능할까? 자식새끼도 이러기 쉽지 않은데.
미정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그런 사람. 상대방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려고요. 방향 없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 이제 다르게 살아 보고 싶어요.
‘해방일지’엔 누군가를 추앙하겠다로 끝맺음한 거 같네요.
구씨
좋기만 한 사람이 왜 없어. 식구들 있잖아.
미정
아빠도 다 좋지 않고 엄마도 다 좋지 않고 언니랑 오빠는 많이 싫고, 아빠는 불쌍해요.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던 거 같아요. 엄만 자식들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정작 큰일이 생겼을 땐 엄마만 모르면 된다, 그래요.
구 씨
가짜로 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잖아.
미정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해봐요, 한번. 아무 말이나.
막 무슨 얘기를 하려던 구 씨, 하지 않고 가던 길 갑니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까 봐? 아니 자신이 하려는 말이 진짜인 걸 알아서.
이 진짜 말을 하고 싶어서 그는 말하지 않고 돌아선 겁니다. 아직 시원하게 뚫리지는 않았네요, 구씨는.
그렇게 첫 데이트를 마친 미정과 구씨가 돌아옵니다.
미정과 구씨가 돌아오는 길에 기정과 딱 마주치며 5화가 끝났습니다. 이제 온 식구가 다 알게 될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