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선배 만날 때 직장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했을 때 좋았어. 사람들이 남친 뭐 하냐고 물어보면 사업해. 그 한마디가 있어 보여서. 근데 너무 잘 나가니까 불안했어. 우린 결혼도 안 했는데 불량으로 계속 반품 들어오고 점점 어려워지면서 어느 때보다 옆에 붙어서 잘해 줬어. 들킨 거 같았어, 내가 안도하는 거.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린
기정과 현아랑 술을 마시면서도 미정은 구씨를 생각합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미정은 구씨에게 톡을 합니다.
(미정)
오늘 늦어요. 언니랑 한잔 해요.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맘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너무 좋아요.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의 미정은 구씨가 사는 집을 사진 찍어 추앙합니다.
다음 날, 미정 집으로 찾아온 두환이 어제 일을 미정에게 고해바칩니다.
두환
아니, 창희가 구씨네서 불러서 갔는데 진짜 깜짝 놀랬다. 방 안에서 빛이 막 장난 아니게 뿜어져 나오는데, 나 무슨 외계인이 있는 줄 알았잖아. 가 봤더니 방 안에 소주병이 가득이야. 해가 또 그 방에 딱 떨어져 가지고 방이 막 후끈후끈해. 둘이서 그거 치우다가 구씨한테 욕 바가지로 먹고, 아 뭐 바가지는 아니었는데, 아, 좀 그랬어. 아, 청소해주다가 욕 얻어먹고 민망해 뒈지는 줄 알았네, 진짜.
미정
도와 달라고 했어? 치워 달라고 했냐고? 근데 왜 함부로 들어가서 손대?
창희
그럼 봤는데 그냥 나오냐?
미정
인간을 갱생시키겠다는 의도가 너무 오만해.
두환
아, 누가 누굴 오만... 에이, 오만 아니야. 혼자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양이었다고.
미정
혼자 버릴 수 없는 양을 혼자 먹었어. 그걸 들켰어.
창희
뭘 들켜? 몰랐어, 우리가?
구씨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네요.
구씨
적당히 했어야 됐는데, 너무 열어줬어. 괜찮을 땐 괜찮은데, 싫을 때는 눈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말을 하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쯧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생각해 내야 되는 거 자체가 중노동이야.
미정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 한두 시간 되나? 좋은 시간도 아니고 괜찮은 시간이 그 정도 나머진 다 견디는 시간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신나서 뛰어노는 애들 보면 그 어린 나이에도 심란했어요. 뭐가 저렇게 좋을까? 난 왜 즐겁지 않을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쓸데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왜 이렇게 길까? 80년생을 8년으로 압축해서 살아 버려도 하나 아쉬울 거 없을 거 같은데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가보자.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가 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구씨
소몰이? 소몰이.... 본 적 있나 보네.
미정
어려서 몇 번.
구씨
(냉동실에서 빵빠레 꺼내 주는)
미정
웬 아이스크림?
구씨
샀어, 취해서. 취했을 때의 내가 맨 정신일 때 나보다 인정이 좀 많아.
미정
좋은데.
이때부터 구씨는 외모도 달라졌습니다.
홀아비 냄새 풀풀 날 것 같은 알코올 중독자 모습에서 조금 댄디해졌달까?
담날 구씨는 소주병을 치웁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 찍어 미정에게 보냅니다.
둘의 일상이 조금 밝아졌습니다.
구씨가 깨끗이 치운 집안 모습처럼, 둘의 일상이 조금 밝아졌습니다.
미정이 구씨에게 답톡을 보냅니다, 이렇게요.
[ 당신 톡이 들어오면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
구씨
오늘 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몰았다. 소몰이하듯이.
겨우내 골방에 갇혀서 마실 때 마시다가 자려고 하면 가운데 술병이 있는데 그 술병을 이렇게 치우고 자면 되는데 그거 하나 저쪽에다 미는 게 귀찮아서 소주병 가운데 놓고 무슨 알 품는 것처럼 구부려서 자. 그거 하나 치우는 게 무슨.... 내 무덤에서 내가 일어나 나와서 벌초해야 되는 것처럼 암담한 일 같아. 누워서 소주병 보면서 그래. 아, 인생 끝판에 왔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백만 년 걸려도 못 할 거 같던 일 오늘 해치웠다. 잠이 잘 올까? 안 올까?
미정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떻게 상처받고 이 동네로 와서 술만 마시는지 안 물어 한글도 모르고 ABC도 모르는 인간이어도 상관없어. 술 마시지 말란 말도 안 해. 그리고 안 잡아. 내가 다 차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