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한갓지게 동네에서 연애질이나 하고, 하, 맨날 힘들게 어? 버스 타고 전철 타고 서울 올라 올라 가야 남자가 있는 줄 알았지. 세상에 이런 들판에서, 어?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 경제적이고 좋다, 어? 집에서 밥도 먹고.
미정이 한마디 되받아치려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그만 말을 삼킵니다.
잠깐 시야를 돌려 창희 친구 두환이 연애담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초등학교 축구코치인 두환이는 그 학교에 ‘곽선생’을 짝사랑하는데,
그 곽선생이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하네요.
두환
남친이랑 헤어졌다는 말 듣자마자 심장이 바로 또 막 뛰어.
미정
난 그 말을 이해 못 해. 심장 뛰게 좋다는 말. 그 정도로 좋았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 뭐 그렇게 좋았던 적도 없지만 내가 심장이 막 뛸 땐 다 안 좋을 때던데 당황했을 때, 화났을 때, 100m 달리기 하기 전 다 안 좋을 때야. 한 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 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뭐가 풀려난 거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 한다는 느낌? 내가 이상한가 보지.
창희
염미정 쟤가 정답이야. 좋으면 그냥 좋아. 근데 심장이 뛸 땐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폭풍 치는 기대 심리, 이런 거. 내건 그냥 내 건가 보다 해. 너 월급 들어오는데 심장 뛰는 거 봤어? 내 건데 왜 뛰어? 내게 아닌데 아닌 걸 알겠는데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그때 뛰는 거야, 심장이. 너 봐라, 남녀 관계도 똑같다. 결혼한 사람들 중에 첫눈에 제짝인지 알아봤다 이런 사람들 있잖아. 얘기 들어보면 그냥 보자마자 ‘음, 너구나.’ 이런데 막 심장이 막 뛰는 게 아니고 그냥 ‘음, 너구나.’ 그냥 내건 거야. 인연은 자연스러워. 갈망할 게 없어. 내건데 왜 갈망해? 너 부자들이 명품 갈망하는 거 봤어? 그냥 사지. 내가 뭔가 죽어라 갈망할 땐 저 깊은 곳에서 이미 영혼이 알고 있는 거야. 내게 아니란 걸, 갖고 싶은데 아닌 걸 아니까 미치는 거야. (자신의 이마 때리며) 아씨! 아! 내가 그래서 차를 못 모는 거네. 아...
두환
영혼한테 알려줘, 몰수 있다고.
창희
네가 해봐. 니가 알려줘 봐. 그 여자랑 잘 될 수 있다고 네가 네 영혼 열라 때려 가면서 주입시켜 봐.
오늘은,
행복지원센터 팀장님이 직접 ‘해방클럽’을 참관하러 오셨습니다.
상민
내가 숨쉬는 거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시계를 보는 거더라구요. 툭하면 시계를 봐, 계속 벌써 이렇게 됐나? 벌써? 그러면서 종일 봐. 하루 24시간 출근하고 퇴근하고 먹고 자고 똑같은데 시계는 왜 계속 볼까? 뭔가 하루를 잘살아 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 거야. 내가 평생 그랬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씁, 희한하게 바로 심장이 따 따 따 하더라고. 그 전에는 심장도 따따따따따따따따 이거를 알아채는데 50년이 걸렸다는 게 참...
상담팀장
저도 좀 그런 편인데, 다들 어느 정도 그런 강박은 있지 않아요? 그리고 부장님이 시간을 일분일초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알뜰하게 쓰셨으니까 지금 사내 혁심 인력으로 계신 게 아닐까 싶어요.
상민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저희 클럽의 규칙입니다.
팀장
아, 네.
상민
시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순 없겠지만 할 만큼 했으면 쉬고 잘 만큼 잤으면 일어나고 그렇게 내 템포를 갖는 게 나에게 가장 필요한 해방이 아닐까 그래서 ‘내 템포대로’라고 정했습니다. 제 시간은 끝났습니다. N분의 1로 시간 정해서 얘기하가로 했습니다. 안 그럼 저처럼 말 많은 인간이 혼자 떠들어대서
팀장
아, 좋네요. 다음은?
미정
(일지 꺼내려 부스럭 대는)
팀장
(태훈의 일지를 보며) 좀 봐도.
태훈
네. (일지 내미는)
팀장 펼쳐보니 딱 한 줄 쓰여있다.
#$@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팀장
(#$@ 가리키며) 이게 무슨....
태훈
누가 볼까 봐요.
팀장
아.
쉬는 시간을 갖자며 상민과 태훈이 나가자 팀장이 미정에게 말합니다.
팀장
좋네요. 참석해 보니까 어떤 동호회인지 확실히 알겠어요.
염미정 씨 ‘생각하면 좋기만 한 사람’도 좋고. 좋네요, 해방클럽.
이제 태훈 이야기를 하려는데,
기정도 옆자리에 앉아 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태훈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6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엄마 장례 끝내고 학교를 갔는데 애들이 괜히 저랑 어떤 애랑 싸움을 붙였어요. 절대 날 이길 수 없는 놈하고 덩치만 컸지 힘을 쓸 줄 모르는 놈이었는데 근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내가 져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그냥 져 줬어요. 부모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팔 한 짝이 없어진 거 같더니 엄마까지 돌아가시니까 두 팔이 없어진 거 같더라고요. 혹시 지금 내 딸도 할 한 짝이 없는 거 같을까 봐.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저한테 약하다는 느낌이 생긴 거 같아요. 내가 이 느낌에서 해방돼야 내 딸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지워진 #$@ 이 부분은 ‘약해지는’ 이었습니다.
태훈의 숨기고 싶은 ‘약해지는’ 이야기에 ‘받는 여자’ 기정의 사랑이 확실해지네요.
기정
나거든. 딱 나거든. 야, 내 옆에서 있으면 약하다고 느낄 수 있겠냐? 나 받는 여자야. 진돗개 같은 여자. 내 옆에만 있으면 되는데 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진짜. 나 너무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 사귀자고, 당장. 말해버려.
친구
(빈 잔에 술 따르는)
기정
아, 왜? 왜 안 돼?
친구
누가 안 된대?
기정
야, 나 내일모레면 마흔이야, 어? 올겨울엔 아무나 사랑하기로 했어.
근데 이 남자 아무나 아니야, 절대. 충만한 남자야.
올 겨울에는 아무나 사랑하겠다는 기정이게 아무나가 아닌 충만한 남자가 나타났네요.
그렇다면 고백해야겠죠?
두환
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힘들까? 싫어한다는 것도 아니고 좋아한다는데
창희
영혼이 알잖니? 백퍼 까인다는 거. 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는 말 중에 해서 후회 안 하는 말이 없다.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망설이는 거야. 근데 굳이 말을 해가지고 안 좋은 끝을 보고 말아. 인간이 그렇게 알 수 없는 동물이다.
(핸드폰으로 게임하다 벌떡 일어나는) 두환아. 유기견, 계란 흰자, 1원짜리
두환
왜 이래? 이 견딜 수 없이 촌스러운 계란 흰자가.
창희
(다시 눕는) 하지 마라. 하지 마. 염기정 알지? 어떤 미친놈이 지 좋아한다고 그랬다고 총 구하러 다닌다고, 그냥 다 쏴 죽여 버린다고. 자기 보고 웃었다고 총 구하러 다니고 자기 보고 윙크했다고 총 구하러 다니고 그냥 툭하면 총 구하러 다녔어. 성에 안 차는 놈들이 자기 좋다 그러면 무슨 모욕당한 것처럼 펄쩍 뛰면서. 여자들 있지? 자기보다 아래인 남자가 자기 좋다 그러잖아? 그럼 진짜 죽일 듯이 난리 난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그래. 현아만 빼고. 야, 학교 다닐 때 걔 좋다는 남자애들이 한둘이었냐? 진짜 별 빙신 같은 놈들까지 다 좋다 그랬는데. 그런 놈들한테까지 진짜 상냥했다. 까도 얼마나 상냥하게 깠는데. 내가 대학 때 걔 남자한테 고백했다 까이는 거 몇 번 봤는데 걘 뭐 앙금 걘 앙금도 없고, 어? 뭐, 쪽팔리는 것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더라. 자기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자기 좋다는 남자애들한테 고마워했거든. 그럼 남들도 그럴 줄 아는 거야. 그러니까 계속 현아만 연애하는 거야. 염기정? 뭐, 올겨울엔 아무나 사랑? 됐다 그래, 못 해. 여태 아무 일 없었는데 난데없이 괜찮은 남자가 먼저 대시해 올 리가 있겠냐? 그럼 자기가 먼저, 뭐, 진짜 아무나든 뭐든 들이대야 되는데 그걸 할 수 있겠냐고. 자기가 한 짓이 있는데. 혹시 잘못 말했다가 남자한테 총 맞아 죽을 텐데 그러니까 다 자기가 싼 똥인 거야.
현관문 앞에서 창희의 말까지 들어버린 기정이 미정에게 묻습니다.
기정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구씨 말야.
미정
내가
기정
(놀라 보는)
미정
사귀자고 안 했어. 추앙하라고 했어.
기정
뭐?
미정
추앙하라고.
지금 구씨는 전화를 받습니다.
전화 내용은 신회장이 어떻고 백사장을 골로 보내자는 둥 살벌한 분위깁니다.
이 와중에 구씨는 ‘쌔비’를 찾습니다.
그러자 상대(현진) 묻습니다.
“쌔비는 왜? 누구한테 돈 물렸냐?”
구씨는 이 와중에도 미정 돈을 받아 줄 생각을 하나 봅니다.
하지만 미정은 4개월이면 만기인 청약을 깨고 ‘찬혁’ 때문에 대출받은 돈을 갚습니다.
마침 나오는 길에 구씨와 마주치는 미정입니다.
미정
오늘 그렇게 덥지 않네. 여름이 가나 봐요.
구씨
(대답 없습니다)
마을버스 안의 미정과 구씨.
미정
주소는 집으로 다시 옮겨 놨어요.
구씨
우편물 또 오면 어쩌려고?
미정
올 일 없어요. 다 정리했어요.
구씨
대신 갚았냐?
미정
준대요, 나중에.
구씨
(한숨)
미정
진짜 줄 거예요.
구씨
그 새끼 이름 뭐냐?
미정
걱정 마요, 준댔어요.
구씨
그냥 이름하고 연락처만 주면 돼. 내가 안 해, 딴 사람이 할 거야.
아직도 좋아하냐?
버스에서 내린 미정, 화가 난 듯 구씨를 보지도 않고 집으로 갑니다.
구씨는 들어와 라면 물을 끓이는데,
미정이 씩씩대며 들어옵니다.
구씨
(미정을 보다가) 무섭다, 앉든가.
미정
어디까지 더 끝장을 봐야 되는데? 이 꼴 저 꼴 안 보고 깔끔하게 잘 끝냈다, 말해줘도 되잖아. 왜 자꾸 바닥을 보래? 인터넷에서만 보던 남자한테 돈 뜯기는 빙신 같은 게 나라는 거. 엄마, 아버지, 세상 사람들 다 알게 난장까야 돼?
구씨
그게 무섭지? 그 새끼가 너 그러는 거 아니까 그따위로 나오는 거야.
미정
돈 문제 얽히면서 나 보자마자 골치 아픈 얼굴 하는 거 견뎠어. 짜증스러워하는 얼굴 보면 다 내가 잘못한 거 같고 꿔 간 거 달라고 하는 것도 죄지은 거 같고 그냥 이런 일로 엮인 거 자체가 다 내 잘못 같고 어쩔 수 없이 난 이래. 문제 있는 남편이랑 사는 거 이해 안 된다고, 도와준답시고 악지로 뜯어내는 사람들이 난 더 이해 안 가. 제발 그냥 두라고. 내가 아무리 바보 멍청이 같아도 그냥 두라고. 도와 달라고 하면 그때 도와 달라고. 사람하고 끝장 보는 거 못 하는 사람은 못 한다고. 얼굴 붉히는 것도 힘든 사람한테 왜 죽기로 덤비래?
구씨
나한텐 잘만 붉히네.
미정
넌 날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뭔 짓을 못해.
그러니까 넌 이런 등신 같은 날 추앙해서 자뻑에 빠질 정도로 자신감 만땅 충전돼서 그놈한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야무지게 할 말 다 할 수 있게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라고 누가 알까 조마조마하지 않고 다 까발려져도 눈치 안 보고 사 살 수 있게 날 추앙하라고.
다 끓은 라면을 놓는
구씨
먹어.
미정
(보는)
구씨
(웃는) 손 떨던데, 드셔. 추앙하는 거야. 먹어.
미정
(앉는) 물
구씨
(일어나 물 떠다 바치는) 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깜짝 놀란다. 응?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
근데 너 날 쫄게 해. 네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응? 알아라, 좀. 염미정. 너 자신을 알라고.
미정
더 해보시지. 좋은데. (라면 먹는)
둘은 드라이브도 하네요. ‘산포싱크’ 트럭을 타고.
둘이 간 곳은 고작해야 경작하지 않는 밭.
그곳엔 집 잃은 들개 무리가 서성이고 있습니다.
미정
들개예요.버려진 거 같아요. 사방이 뚫려서 안전하다 싶은지 저길 안 벗어나요.
비가 와도 저기서 자고. 주인이 있었을 텐데.
구씨
(개 무리에게 가려는데)
미정
(잡는) 가지 마요. 짖는 개한텐 안 가는 게 나아요.
미정과 구씨가 돌아오는 길,
힘겹게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에게 구씨가 창밖으로 팔까지 내밀어 외칩니다.
구씨
파이팅.
이 한 컷.
자전거 타는 라이더의 뒷모습에 구씨가 모는 트럭이 플레임 되고,
창으로 구씨의 팔만 쑥 나와,
그리 힘이 날 것 같지 않은 목소리지만, ‘화이팅’ 외치는 이 장면.
누군가를 응원하는 구씨. 그 옆에 미정이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장면이 이어지네요,
기정
어떡해? 감정이 이렇게 지 혼자 막... 그냥 혼자 막 가... 아무 일도 없는데 혼자 막 이게
말이 되냐? 이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거 같아. 이건 어딘가 고장 난 거야.
(맥주 마시는) 괜찮아. 내가 금사빠기도 하지만 금증빠기도 하잖아. 아침에 사랑했다가 저녁에 증오해. 어느 날 또 이런다 ‘오, 큰일 날뻔했다. 아무 일 없길 천만다행이다.’ 언제 좋아했냐 싶게 아무 감정 없어지는 날 온다, 응.
친구
어떤 게 낫니? 얼마 전처럼 휑하니 아무 감정 없는 거하고 지금처럼 좋아서 괴로운 거하고?
기정
(울먹이며) 아이, 씨. 아, 미치겠다. 진짜.
집에 오는 마을버스 안의 기정은 이어폰에 나오는 노래에 맞춰 울며 노래 부릅니다.
여기서 끝났으면 엄청 짜증 나는 장면이었을 텐데,
이 모습이 마을버스 기사님의 시점으로 보여지니 완전 코미디가 됩니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제거되고 기정의 흐느끼며 노래 따라부르는 소리만 들리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