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가 초롱초롱해서 말하는데 괜히 나까지 설레더라고. 이게 일반 직장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될 거 같다나? 화두를 잘 잡았다는 거야. ‘해방’ 뭐, 한 명이 퇴사하면서 이제 안 한다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자꾸 보여 달라는데 이게 나 혼자 좋다, 싫다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일단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 오늘도 자꾸 쫓아나오겠다는 거 오바라고 말렸어.
향기
와, 그럼 우리 작가 되는 거예요?
태훈
아유, 저는 좀 힘들 거 같은데요.
상민
왜 부담스러운가?
태훈
쓰다 말아서 몇 장 되지도 않고 또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
상민
가명으로 하면 되지 않나? 필명. 우리 이번 기회에 필명 하나씩 짓자고.
아이, 나도 한 반 정도 쓰다 말았어. 그래도 우리 넷 거 합치면 좀 되지 않을까?
향기
아, 전 두 권 썼어요. 해방클럽 폐지되고 나서도 계속 썼거든요.
태훈
오, 역시
상민
염미정씨는 어때? 계속 쓰나?
미정
아뇨, 한 권에서 끝냈어요.
상민
오, 끝냈다는 말이 꼭 달성했다는 말같이 들리네.
미정
아, 그런 건 아니고... 아, 근데 책으로 낼 정도의 얘기인진 잘....
상민
무조건 된대. 우리 넷 얘기만 들어도 아유, 쯧, 미안. 내가 입 털었다. 흥분해서 허락도 안 받고 나이 먹고 이러면 안 되는데. 각자 뭐에서 해방되고 싶어 했는지, 좋대. 건더기가 있다고.
헤어질 땐 각자 혼자서 끝까지 가 보자고 비장하게 결의하고 헤어졌지만 뭐, 그때 감정인 거고 노트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해방이라는 말에 뭉클하고 아버지 필체라는 말에 또 한 번 뭉클하고 그렇게 순간순간 뭉클하다가, 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멀하게 살고 그래도 처음엔 독립운동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슴에 뭔가 하나 품고 사는 기분. 나의 해방.
태훈
근데 출발은 했는데 뭐가 없지 않아요?
향기
근데 아예 없다고는 또 못 하지 않아요?
태훈
좀 되셨어요? 해방
향기
어느 날은 좀 된 거 같고, 어느 날은 도로 아미타불이지만 그래도 아예 없다고는 못 하는데 조과장님은 전혀 없으세요?
태훈
어.... 나의 힘겨움의 원인을 짚었다는 것 외엔....
미정
그게 전부인 거 같아요. 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거.
맞아요, 자신을 아는 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해방클럽’ 시작이 거기서부터였던 거 같아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끔 하는 친절한 강령. 불행한 척하지 않기, 행복한 척 않기, 정직하게 보기,
모임이 끝나고 택시에 미정과 향기가 함께 탔네요.
향기
난 미정씨 그 말이 안 잊혀지더라. 옛날에 그런 말 한 적이 있어. 해방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고. 갑자기 자기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자기가 사랑스럽다는 건 어떤 걸까?
자신을 제대로 보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엔 힘이 생기는 겁니다.
그 사랑이 힘이 생기면, 남을 사랑함에도 흔들림이 없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의 힘인 겁니다.
미정이 상담팀장과 헤어져 택시에 내렸습니다.
택시에 내린 미정에게 자경이 다가옵니다.
자경
워!
미정
깜짝이야. 장난도 다 치네.
둘은 자경의 집으로 갑니다.
자경
손 떠는 게 먼저일 줄 알았는데. 귀가 먼저 맛이 가네. 뇌가 망가지는 거지, 뭐. 눈뜨자마자 들이붓는데 망가질 만도 하지.
미정
아침부터 마시는 사람 드문데. 술꾼도 아침엔 때려죽여도 못 마신다던데?
자경
맨정신으로 있는 거보단 덜 힘들어.
미정
맨정신이 왜 힘든데?
자경
음... 정신이 맑으면 지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전부 다 죽은 사람도. 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던 그 인간들도 하나둘 일어나서 와 한 놈, 한 놈 끝도 없이 찾아온 인간들 머릿속으로 다 작살내 쌍욕을 퍼붓고 그렇게 한 시간을 앉아 있으면 지쳐. 몸에 썩은 물이 도는 거 같애. 일어나자. 마시자. 마시면 이 인간들 다 사라진다. 그래서 맨정신일 때의 나보다 취해 있을 때의 내가 인정이 많은 거야.
미정
몰려오는 사람 중에 나도 있었나? 어떡하지? 난 알콜릭도 아닌데 왜 당신 말이 너무 이해되지? 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이 닦는데 벌써 머릿속엔 최팀장 개자식이 들어와 있고 한수진 미친년도 들어와 있고 정찬혁 개새끼도 들어와 있어. 그냥 자고 일어났어. 근데 이를 닦는데 화가 나 있어.
자경
그 새끼 전화번호 뭐야? 전화번호만 줘, 금방 해결해.
미정
그 새끼는 나한테 돈을 다 갚으면 안 돼. 그 새끼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 오래오래 증명해 보일 거니까.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서 그놈이 간 게 아니고 그놈이 형편없는 놈이라서 그따위로 하고 간 거라고 결혼식장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어. 그놈이 애를 낳는다면 돌잔치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 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 놨으니까.
자경
형편없는 놈이라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인간들 중에 나도 있었냐?
미정
당신은 내 머릿속의 성역이야. 결심했으니까. 당신은 건들지 않기로 당신이 떠나고, 엄마 죽고 아빠 재혼하고 뭔가 계속 버려지는 기분이었어. 어떤 관계에서도 난 한 번도 먼저 떠난 적이 없어. 늘 상대가 먼저 떠났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한테 문제를 찾는 게 괴로우니까 다 개새끼로 만들었던 거야. 근데 당신은 처음부터 결심하고 만난 거니까. 더 이상 개새끼 수집 작업은 하지 않겠다.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근데 난 불행하니까 욱해서 당신을 욕하고 싶으면 얼른 ‘정찬혁 개새끼’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어디다 화풀이를 해야 될지 모르겠을 때마다 ‘정찬혁 개새끼’ 그러다가도 문득 그놈이 돈을 다 갚으면 난 누굴 물어뜯지? 돈을 다 갚을까봐 걱정해.
자경
생각해 보니까 나 감기는 한 번도 안 걸렸다.
미정과 자경의 대화에서 미정의 변화(해방)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미정의 변화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인물은 ‘찬혁’이네요.
미정인 이 가시만 잘 넘기면 될 거 같아요, 해방.
그리고 미정인 자신을 떠났음에도 ‘개새끼’라 욕하지 않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게 빌었잖아요. 그 맘이 자경을 변화시킬 거 같아요. 적어도 감기는 걸리지 않지 않을까요.
여기 창희도 변화(해방)됨이 느껴집니다.
창희
울 아버지 이혼당하면 딴 수 없어 내갸 데리고 사는 수밖에. 내가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마주 앉아서 삼시 셰끼 먹으면서 까딱 잘못하다간 우리 둘이 이렇게 늙겠구나 싶은 게 암담하더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버지 새장가 보내야 된다. 선 자리 들어오자마자 아버지 모시고 피부과 가서 얼굴 한 번 싹 긁어 드리고 리프팅 한번 해주고.
정훈
난 아저씨가 피부과를 쫓아가신 게 용하시더라, 응.
창희
나랑 안 살려면 별수 있냐? 그렇게 어렵게 새장가 보내놨는데 그걸 깨겠냐? 진짜 눈물 나게 갚았다. 모으는 건 어려워도 날리는 건 쉽더라. 십년 모은 걸 몇 달 만에.
두환
그러니까 모으지를 말아야 돼. 다 쓰고 살아야 돼.
창희
진짜 대박 치나 했는데. 전국 이천 개 편의점에 군고구마 기계 깔기로 하고 창고에 가득 찬 기계 보면서 내가, 이야 염창희 인생 이렇게 풀리는구나, 했는데 그걸 포기한 나란 놈은 참..... 멋져. 편의점 까는 건 포기하고 그해 겨울에 삼백 개 팔았다. 나머지 천칠백 갠 고대로 창고에
정훈
말할 때마다 바뀐다? 저번에는 뭐 기계테스트에 못 가서 탈락됐대매?
창희
갈 수 있었는데 안 갔어. 차에 다 실려 있었어 테스트할 기계. 테스트도 다 형식적인 거였고 어차피 낙찰 예정 1순위라
정훈
근데 왜 안 갔냐고. 어? 대박을 눈앞에 두고
창희
(뭔가 말하려다 마는)
정훈
뭐? 어? 이 새끼 안 하던 짓을 하네. 간 보냐? 왜 말을 아껴.
창희
내가 뭐든 다 입으로 털잖냐? 근데 이건 안 털고 싶다. 나란 인간의 묵직함. 나만이 기억하는 나만의 멋짐.
정훈
어이구, 어이구.
창희
말하면 이 묵직함이 흩어질 거 같아서 말하고 싶지가 않다. 영원히 나만의 비밀.
정훈
이 새... 걱정마, 응. 얘 1분 내로 말해, 응.
정훈
웬일이냐? 1분을 넘기려나 보다.
두환
(손 털고 일어나) 이렇게 또 긁어주면 (창희 겨드랑이 간지럽히는)
정훈
그래, 말해, 말해.
두환
술술 불어.
정훈
야, 말해, 어.
두환
술술 불어, 또.
창희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꾹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내가 이걸 삼키다니, 자기한테 반하면서. 아 나 또 반한다.
정훈
이 새끼, 이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졌지.
창희
(마침 내리는 눈을 보며) 죽인다.
창희의 변화가 정훈에게는 ‘재수없음’으로 보여지기도 하네요.
여기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자경이 있네요.
자경
오늘 1초도 설레는 일이 없었는데, 막판에 설레는구나. 걸어갈란다.
삼식
타세요. 그러다 감기 걸리십니다.
자경
안 걸려. 인마.
자경의 이 대사 심쿵합니다.
자경에게는 든든한 미정이 있다는, 사랑이 있다는 확신 같은 겁니다.
이 시각 미정은 2004년의 자신이 썼던 일기를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생신이라 삼남매가 산포로 갔거든요.
아버지
혼자 살아도 된다 싶으면 혼자 살아. 니들은 그래도 돼.
창희
두 번 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아버지
두 번 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아버지
아빤 힘이 없어. 니들은 아빠보다 나아.
약간은 맥락없이 튀어나온 대사 같은데 울림이 있습니다.
천호진 배우는 처음 등장은 몸 좋은 청춘배우였는데, 현재는 얼굴 주름이 연기하는 배우가 되셨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창희는 두환에게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 얘기를 합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젊은 시절 여행에서 만나 놀던 세 명의 이야기.
한 명이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됐는데 그와 함께 하겠다는 한 명은 나 몰라라, 하고 한 명은 끝까지 그와 함께 한다는 내용입니다.
창희
사형 집행되는 날 교도소 광장 사형대에서 걔가 달달달 떨고 있는데 괜히 증언해서 갇힌 놈이 그 좁은 창살 사이로 내다보면서 그래, ‘나 여기 있어. 내 눈 봐.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그 십분 짧으면 오분 나 같아도 그 오분을 위해서 교도소에서 삼년 썩는다 싶더라. 친구도 아니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 영화 얘기가 바로 창희와 현아, 혁수의 이야기로 창희가 군고구마 기계를 납품 못한 이유가 됩니다. 그 테스트 현장에 가지 못한 이유... 혁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창희
형 미안해. 괜히 불안하게 해서 형, 나랑 둘이 있자. 내가 있어 줄게. 나 이거 팔자 같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다 내가 보내드렸잖아. 희한하지? 내 나이에 임종 한 번도 못 본 애들도 많은데 근데 난 내가 나은 거 같아. 보내 드릴 때마다 여기 내가 있어 다행이다 싶었거든. 귀신같이 또 발길이 이리 왔네. 형 내가 세 명 보내 봐서 아는데, 갈 때 엄청 편해진다. 얼굴들이 그래. 그러니까 형 겁먹지 말고 편하게 가. 가볍게.
(혁수 형의 손을 꼭 잡는) 나 여기 있어.
좋은 차나 타고 싶다던 창희는 이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합니다. 그 경계선에서 도망친 현아와도 덤덤하게 관계를 유지해갑니다.
창희
잠원동 거기도 괜찮다며, 시급도 세고.
현아
거긴 계속 다니고 여긴 주말만, 나도 강북에 있어 볼까 하고.
창희
쉬엄쉬엄해라 누가 쫓아오냐?
현아
밧데리가 영이 될 때까지 나를 소진 시켜야 제대로 산 거 같아.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무거워. 되는 일은 없고 이룬 것도 없지만 어쨌든 죽을 힘은 다했다.
창희
설사하고 나서 기운 빠지는 거랑 비슷한 거냐? 간만에 설사하고 싶다.
현아
아이스라떼 마셔. 사 줄까?
창희
집에 가서 마셔야지. 돌아다닐 땐 안 돼.
현아
생각보다 얼굴 좋네.
창희
나쁠 일이 뭐 있다고. 날이 폭하다. 봄이 오나봐.
현아
오겠지, 봄도 오고 여름도 오고 겨울도 오고.
창희
가.
현아
가. 주말에 일 끝나고 편의점으로 갈게.
둘은 앞으로 충분히 잘 될 거 같네요.
현아는 자신이 그렇게 지루해서 싫어했던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이 됐잖아요, 창희처럼요.
다음 기정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15화에서 머리를 싹뚝 잘랐잖아요. 임신 아니라는 것에 대한 태훈의 반응 때문에 말이에요.
태훈
후회했어요. 행방클럽에서 약한 남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던 거 나도 모른척 하고 살아야 되는 역린 같은 걸 건드린 거 같아서 그리고 기정씬 그때 그 말 듣고 불쌍해서 나한테 끌렸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날 못 떠나겠구나.
기정
네, 못 떠나요. 안 떠나요. 불쌍해서 끌리면 안 돼요? 아, 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 이건 존경, 이건 사랑 뭐,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아, 난 안 그렇던데. 막 다 덩어리로 있던데. 나 태훈씨 존경해요. 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 다 해요.
태훈
근데 머리는 왜 잘랐어요?
기정
난 뭐 머리도 자르면 안 돼요? 머리도 못 잘라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태훈씨한테 힘이 돼 주고 싶었는데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태훈씨를 힘들게 하는 여자만 하나 더 늘어나게 한 거 아닌가.... 아니 솔직히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요. 태훈씨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난 또 뭐가 이렇게 억울한 거지? 아니 따져보면 마땅한 말이 없는데, 그냥 그냥 총체적인 느낌이 뭔가 지는 기분이에요. 내가 꼬맹이 눈빛 하나에 이렇게 무너지는 자존감 낮은 여자였나 쪽팔리고, 조경선 막말하는 거 하루 이틀도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 쭉 일관성 있게 막말하면서 살아오던 앤데 왜 난 새삼 상처를 받을까? 태훈씨를 사랑해서? 그게 왜 내가 작아지는 이유여야 되는데? 아니, 사랑은 힘이 나는 일이어야 되는데, 왜? (한숨) 헤어지면 난 행복할까? 근데 헤어지는 생각을 하면요, 막 팔이 저려요. (울먹) 아, 겨드랑이에 막 전기가 와요. 아니, 못 헤어지는 건 분명한데 그럼 더 가야 되는데 어떻게 가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태훈
변명같아서 말 안 했는데 그래도 말할게요. 전 이상하게 아장아장 걷는 애들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삼십년 후에 쟨 어떤 짐을 지고 살아갈까? 어떤 모욕을 견디며 살아갈까? 아니까 견뎠지, 저 애는 그 어떤 애도 그런 일은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유림이가 있어서 좋았고 내 인생에 유림이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 하지만 난 태어나서 좋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한숨) 아니요.
기정
(눈물 똑)
태훈
그래서 기정씨가 임신 아니라고 했을 때 불쑥 다행이란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 이상 조태훈의 변명이었습니다.
기정
(훌쩍, 눈물 닦는) 그럼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되는 건데요. 우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데요. 난 남자할게요. 여자 넷 힘들잖아요. 오늘부타 나 남자, 나 남자.
태훈
(웃는)
기정
머리도 그래서 자른 거예요.
기정이 참 어른스럽네요, 그리고 지금 이거... ‘추앙’ 같지 않나요?
기정은 지금 태훈을 ‘좋기만 한 사람’으로 ‘추앙’ 합니다, 아주 어른스럽게.
와, 창희와 기정이 이렇게 치고 올라오는데 미정은 어떤가 볼까요?
미정이 추행범으로 몰릴뻔한 ‘개새끼’ 찬혁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로써 마지막 가시조차 꿀꺽 넘기는 미정입니다.
자경
염미정. 염미정! (길 건너 미정에게 가는) 어디로 가냐?
미정
술 사가려고.
자경
이쪽에도 있어, 편의점.
미정
당신이 ’염미정‘ 부를 때 좋아.
(둘이 걸으며 재잘대며 웃는)
집에 갔다가 어려서 일기장 읽어봤는데 깜짝 놀랬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던 이런 시절의 나하고 일기장의 기록하고 너무 달라서, 난 주변머리 없고 누구하고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일기장 보니까 아주 좋아 죽어. 얘는 이래서 좋고, 쟤는 저래서 좋고, 아주 뜨거운 애였던데.
자경
몰랐냐? 너 뜨거워. (비틀)
미정
(자경 잡는)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자경
아, 좋아서. (밤하늘 보는) 가끔 아주 가끔 마시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이 조용할 때가 있어. 뭔가 다 멈춘 것처럼 그러면 또 확 독주를 들이부어. 편안하고 좋을 때도 그게 싫어서 깨어버리려고 확 마셔. 살 만하다 싶으면 얼른 확 미리 매 맞는 거야. 난 행복하지 않습니다.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행했습니다. 그러니까 벌은 조금만 주세요. 제발 조금만. 아침에 일어나서 앉는 게 힘듭니다. 왔던 길을 다섯 걸음 되돌아가는 것도 못 할 거 같아서 두고 나온 우산을 찾으러 가지도 않고 비를 맞고 갔습니다. 다섯 걸음이 힘들어서, 비를 쫄딱 맞고 아, 나는 너무 힘들고 너무 지쳤습니다. 엄청나게 벌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좀.
미정
당신 왜 이렇게 이쁘냐?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한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자경
염미정! (뛰어가 미정을 안는)
6화에서 미정이 어렵게 어렵게 소몰이하듯 자신을 끌고 간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미정이 자경을 끌고 갑니다. 그럴 수 있어요. 마지막 가시도 삼킨 터라 힘이 있어요.
자경도 기쁜 맘으로 미정에게 끌려갑니다.
한편, 미정에게 ‘추앙’이 있다면 기정에게는 ‘받는’이 있습니다.
‘받는 여자’ 염기정이 진짜 받는 여자로 우뚝 서는 나레이션입니다.
기정
받는 여자 염기정. 목이 부러진 장미 송이를 찾아와 간장 종지에 물 담아 담가 놓았습니다. 꽂아놓으려 해도 꽂을 목이 없어 간장 종지에 눕혔습니다. 우리 사랑이 화병에 우아하게 꽂히는 목이 긴 장미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간장 종지에 지쳐 누워 있는 장미 송이가 당신 같고 나 같고 안 쳐다보면 더 빨리 시들까 봐 눈을 떼지 못하는 나는 이런 여자입니다. 계란빵이 좋아한다는 말에 겨울이면 삼일에 한 번씩 계란빵을 사 드미는 남자. 소고기라고 말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계란빵이라고 말한 내 입을 칭찬하고 매일 계란빵을 사 드미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태훈에게 꽃가지를 선물 받고 꽃송이를 찾은 뒤 기정의 대사입니다.
기정식 ‘추앙’이 완성됩니다.
창희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았습니다.
창희는 진정한 서울시민이 되고자 강좌를 들으러 갔습니다.
강좌는 ‘조선시대 풍경화로 본 서울’입니다.
강사
안녕하세요. 예, 날씨가 많이 춥죠. 잠깐 구경 좀 할게요. 예.
(수강생 하나하나 바라본 후) 아, 그럼 서로를 잠깐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게요. 혹시 앞에 계신 분은 생일이 어떻게 되세요?
수강생
오월 구일입니다.
강사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예. 혹시 옆에 계신 분은 생일이 어떻게 되세요?
수강생2
저는 구월 십구일이요.
강사
구월 십구일이요. 어유, 더 굉장히 좋은 날에 태어나셨네요. 예. 그럼 혹시 죽는 날은 언제세요? (수강생들 웃음) 예, 죽는 날은 아직까지.... 혹시 언제 죽으실 생각이세요?
수강생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강사
잘 모르겠어요? 저도 아직 잘 몰라요. 우리 모두 태어난 날은 알아도 죽는 날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죠? 그러니 마지막 여정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대부분 준비가 잘 안되어 있어요. 겪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면 먹먹하죠. 그럴 때 고인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떠나실 수 있도록 유족들은 그런 고인을 온전히 배웅할 수 있도록 곁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바로~ 앞으로 여러분들이 되실 장례지도사입니다.
창희, 귀신같이 그 자리에 딱 앉아 있네요.
창희는 삶과 죽음 경계선에서 1원짜리가 아닌 큰 산이 됩니다.
마지막 해방클럽 가입자는 자경입니다. 미정에게 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갑니다.
자경은 빚 독촉을 받는 현진을 대신해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현진은 말 그대로 자경의 뒤통수를 치고 돈을 들고 튑니다.
다음날 자경은 현진에게 전화를 겁니다.
자경
(현진에게 전화를 받지 않자 음성사서함에 음성 남기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맨정신일 때 우르르 찾아오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 아침부터 쌍욕하게 만드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
현진에게 음성을 남긴 자경이 자신의 모든 돈을 챙겨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아이 때문에 7초 설레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가지고 나오면서 오백원 짜리 동전을 떨어트렸는데 그 동전이 하수구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전을 다시 주운 자경은 술을 노숙자에게 양보하고 갑니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미정
해방일지에 그런 글이 있더라. 염미정의 인생은 구씨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뉠 거 같다는.
자경
미투.
자경은 자신의 돈으로 현진이 빚을 갚고, 미정에게 갑니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