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게바라 Jul 28. 2022

7월 6일  수 _ 2022년

> 16화 해방   


       

마지막 회 입니다. 

지금까지 펼쳐 논 이야기를 박해영작가는 어떻게 쓸어 담는지, 

염씨 남매가 어떻게 해방을 달성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여기 ‘해방클럽’이 오랜만에 모였습니다.      


상민  

이 친구가 초롱초롱해서 말하는데 괜히 나까지 설레더라고이게 일반 직장인들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될 거 같다나화두를 잘 잡았다는 거야. ‘해방’ 한 명이 퇴사하면서 이제 안 한다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자꾸 보여 달라는데 이게 나 혼자 좋다싫다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일단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지 오늘도 자꾸 쫓아나오겠다는 거 오바라고 말렸어     


향기  

그럼 우리 작가 되는 거예요?     


태훈  

아유저는 좀 힘들 거 같은데요     


상민  

왜 부담스러운가     


태훈  

쓰다 말아서 몇 장 되지도 않고 또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      


상민  

가명으로 하면 되지 않나필명우리 이번 기회에 필명 하나씩 짓자고

아이나도 한 반 정도 쓰다 말았어그래도 우리 넷 거 합치면 좀 되지 않을까     


향기  

전 두 권 썼어요해방클럽 폐지되고 나서도 계속 썼거든요     


태훈  

역시     


상민  

염미정씨는 어때계속 쓰나     


미정  

아뇨한 권에서 끝냈어요     


상민  

끝냈다는 말이 꼭 달성했다는 말같이 들리네     


미정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책으로 낼 정도의 얘기인진 잘....      


상민  

무조건 된대우리 넷 얘기만 들어도 아유미안내가 입 털었다흥분해서 허락도 안 받고 나이 먹고 이러면 안 되는데각자 뭐에서 해방되고 싶어 했는지좋대건더기가 있다고

헤어질 땐 각자 혼자서 끝까지 가 보자고 비장하게 결의하고 헤어졌지만 뭐그때 감정인 거고 노트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해방이라는 말에 뭉클하고 아버지 필체라는 말에 또 한 번 뭉클하고 그렇게 순간순간 뭉클하다가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멀하게 살고 그래도 처음엔 독립운동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가슴에 뭔가 하나 품고 사는 기분나의 해방     


태훈  

근데 출발은 했는데 뭐가 없지 않아요     


향기  

근데 아예 없다고는 또 못 하지 않아요     


태훈  

좀 되셨어요해방     


향기  

어느 날은 좀 된 거 같고어느 날은 도로 아미타불이지만 그래도 아예 없다고는 못 하는데 조과장님은 전혀 없으세요     


태훈

.... 나의 힘겨움의 원인을 짚었다는 것 외엔....      


미정

그게 전부인 거 같아요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거     


맞아요, 자신을 아는 게 참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해방클럽’ 시작이 거기서부터였던 거 같아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끔 하는 친절한 강령. 불행한 척하지 않기, 행복한 척 않기, 정직하게 보기, 

모임이 끝나고 택시에 미정과 향기가 함께 탔네요.      


향기  

난 미정씨 그 말이 안 잊혀지더라옛날에 그런 말 한 적이 있어해방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고갑자기 자기가 너무 사랑스럽다고자기가 사랑스럽다는 건 어떤 걸까     


자신을 제대로 보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엔 힘이 생기는 겁니다. 

그 사랑이 힘이 생기면, 남을 사랑함에도 흔들림이 없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의 힘인 겁니다. 

미정이 상담팀장과 헤어져 택시에 내렸습니다. 

택시에 내린 미정에게 자경이 다가옵니다.      


자경  

!     


미정  

깜짝이야장난도 다 치네     


둘은 자경의 집으로 갑니다.      


자경  

손 떠는 게 먼저일 줄 알았는데귀가 먼저 맛이 가네뇌가 망가지는 거지눈뜨자마자 들이붓는데 망가질 만도 하지     


미정  

아침부터 마시는 사람 드문데술꾼도 아침엔 때려죽여도 못 마신다던데     


자경  

맨정신으로 있는 거보단 덜 힘들어     


미정  

맨정신이 왜 힘든데?     


자경  

... 정신이 맑으면 지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전부 다 죽은 사람도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던 그 인간들도 하나둘 일어나서 와 한 놈한 놈 끝도 없이 찾아온 인간들 머릿속으로 다 작살내 쌍욕을 퍼붓고 그렇게 한 시간을 앉아 있으면 지쳐몸에 썩은 물이 도는 거 같애일어나자마시자마시면  이 인간들 다 사라진다그래서 맨정신일 때의 나보다 취해 있을 때의 내가 인정이 많은 거야     


미정  

몰려오는 사람 중에 나도 있었나어떡하지난 알콜릭도 아닌데 왜 당신 말이 너무 이해되지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이 닦는데 벌써 머릿속엔 최팀장 개자식이 들어와 있고 한수진 미친년도 들어와 있고 정찬혁 개새끼도 들어와 있어그냥 자고 일어났어근데 이를 닦는데 화가 나 있어     


자경  

그 새끼 전화번호 뭐야전화번호만 줘금방 해결해     


미정  

그 새끼는 나한테 돈을 다 갚으면 안 돼그 새끼가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 오래오래 증명해 보일 거니까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어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서 그놈이 간 게 아니고 그놈이 형편없는 놈이라서 그따위로 하고 간 거라고 결혼식장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어그놈이 애를 낳는다면 돌잔치에 가서도 넌 형편없는 놈이야라고 느끼게 하고 싶어그래서 내가 힘이 없는 거야누군가의 형편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존재로 나를 세워 놨으니까     


자경  

형편없는 놈이라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인간들 중에 나도 있었냐     


미정  

당신은 내 머릿속의 성역이야결심했으니까당신은 건들지 않기로 당신이 떠나고엄마 죽고 아빠 재혼하고 뭔가 계속 버려지는 기분이었어어떤 관계에서도 난 한 번도 먼저 떠난 적이 없어늘 상대가 먼저 떠났지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나한테 문제를 찾는 게 괴로우니까 다 개새끼로 만들었던 거야근데 당신은 처음부터 결심하고 만난 거니까더 이상 개새끼 수집 작업은 하지 않겠다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감기 한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기를 근데 난 불행하니까 욱해서 당신을 욕하고 싶으면 얼른 정찬혁 개새끼’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어디다 화풀이를 해야 될지 모르겠을 때마다 정찬혁 개새끼’ 그러다가도 문득 그놈이 돈을 다 갚으면 난 누굴 물어뜯지돈을 다 갚을까봐 걱정해     


자경  

생각해 보니까 나 감기는 한 번도 안 걸렸다.     


미정과 자경의 대화에서 미정의 변화(해방)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미정의 변화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인물은 ‘찬혁’이네요.

미정인 이 가시만 잘 넘기면 될 거 같아요, 해방.  

그리고 미정인 자신을 떠났음에도 ‘개새끼’라 욕하지 않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게 빌었잖아요. 그 맘이 자경을 변화시킬 거 같아요. 적어도 감기는 걸리지 않지 않을까요. 

여기 창희도 변화(해방)됨이 느껴집니다.      


창희  

울 아버지 이혼당하면 딴 수 없어 내갸 데리고 사는 수밖에내가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마주 앉아서 삼시 셰끼 먹으면서 까딱 잘못하다간 우리 둘이 이렇게 늙겠구나 싶은 게 암담하더라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버지 새장가 보내야 된다선 자리 들어오자마자 아버지 모시고 피부과 가서 얼굴 한 번 싹 긁어 드리고 리프팅 한번 해주고     


정훈  

난 아저씨가 피부과를 쫓아가신 게 용하시더라     


창희  

나랑 안 살려면 별수 있냐그렇게 어렵게 새장가 보내놨는데 그걸 깨겠냐진짜 눈물 나게 갚았다모으는 건 어려워도 날리는 건 쉽더라십년 모은 걸 몇 달 만에     


두환  

그러니까 모으지를 말아야 돼다 쓰고 살아야 돼     


창희  

진짜 대박 치나 했는데전국 이천 개 편의점에 군고구마 기계 깔기로 하고 창고에 가득 찬 기계 보면서 내가이야 염창희 인생 이렇게 풀리는구나했는데 그걸 포기한 나란 놈은 참..... 멋져편의점 까는 건 포기하고 그해 겨울에 삼백 개 팔았다나머지 천칠백 갠 고대로 창고에      


정훈  

말할 때마다 바뀐 저번에는 뭐 기계테스트에 못 가서 탈락됐대매?     


창희  

갈 수 있었는데 안 갔어차에 다 실려 있었어 테스트할 기계테스트도 다 형식적인 거였고 어차피 낙찰 예정 1순위라      


정훈  

근데 왜 안 갔냐고대박을 눈앞에 두고      


창희  

(뭔가 말하려다 마는)     


정훈  

이 새끼 안 하던 짓을 하네간 보냐왜 말을 아껴     


창희  

내가 뭐든 다 입으로 털잖냐근데 이건 안 털고 싶다나란 인간의 묵직함나만이 기억하는 나만의 멋짐     


정훈  

어이구어이구     


창희  

말하면 이 묵직함이 흩어질 거 같아서 말하고 싶지가 않다영원히 나만의 비밀     


정훈  

이 새... 걱정마얘 1분 내로 말해.     


정훈  

웬일이냐? 1분을 넘기려나 보다     


두환  

(손 털고 일어나이렇게 또 긁어주면 (창희 겨드랑이 간지럽히는)     


정훈  

그래말해말해     


두환  

술술 불어     


정훈  

말해     


두환  

술술 불어     


창희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꾹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내가 이걸 삼키다니자기한테 반하면서아 나 또 반한다     


정훈  

이 새끼이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졌지     


창희  

(마침 내리는 눈을 보며죽인다     


창희의 변화가 정훈에게는 ‘재수없음’으로 보여지기도 하네요. 

여기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자경이 있네요.      


자경  

오늘 1초도 설레는 일이 없었는데막판에 설레는구나걸어갈란다     


삼식  

타세요그러다 감기 걸리십니다     


자경  

안 걸려인마.     


자경의 이 대사 심쿵합니다. 

자경에게는 든든한 미정이 있다는, 사랑이 있다는 확신 같은 겁니다. 

이 시각 미정은 2004년의 자신이 썼던 일기를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생신이라 삼남매가 산포로 갔거든요.      


아버지  

혼자 살아도 된다 싶으면 혼자 살아니들은 그래도 돼     


창희

두 번 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아버지

두 번 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아버지

아빤 힘이 없어니들은 아빠보다 나아     


약간은 맥락없이 튀어나온 대사 같은데 울림이 있습니다. 

천호진 배우는 처음 등장은 몸 좋은 청춘배우였는데, 현재는 얼굴 주름이 연기하는 배우가 되셨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창희는 두환에게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 얘기를 합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젊은 시절 여행에서 만나 놀던 세 명의 이야기. 

한 명이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됐는데 그와 함께 하겠다는 한 명은 나 몰라라, 하고 한 명은 끝까지 그와 함께 한다는 내용입니다.      


창희

사형 집행되는 날 교도소 광장 사형대에서 걔가 달달달 떨고 있는데 괜히 증언해서 갇힌 놈이 그 좁은 창살 사이로 내다보면서 그래, ‘나 여기 있어내 눈 봐나 여기 있어나 여기 있어!‘ 그 십분 짧으면 오분 나 같아도 그 오분을 위해서 교도소에서 삼년 썩는다 싶더라친구도 아니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 영화 얘기가 바로 창희와 현아, 혁수의 이야기로 창희가 군고구마 기계를 납품 못한 이유가 됩니다. 그 테스트 현장에 가지 못한 이유... 혁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창희

형 미안해괜히 불안하게 해서 형나랑 둘이 있자내가 있어 줄게나 이거 팔자 같다우리 할아버지할머니엄마 다 내가 보내드렸잖아희한하지내 나이에 임종 한 번도 못 본 애들도 많은데 근데 난 내가 나은 거 같아보내 드릴 때마다 여기 내가 있어 다행이다 싶었거든귀신같이 또 발길이 이리 왔네형 내가 세 명 보내 봐서 아는데갈 때 엄청 편해진다얼굴들이 그래그러니까 형 겁먹지 말고 편하게 가가볍게

(혁수 형의 손을 꼭 잡는나 여기 있어     


좋은 차나 타고 싶다던 창희는 이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합니다. 그 경계선에서 도망친 현아와도 덤덤하게 관계를 유지해갑니다.      


창희

잠원동 거기도 괜찮다며시급도 세고     


현아

거긴 계속 다니고 여긴 주말만나도 강북에 있어 볼까 하고     


창희

쉬엄쉬엄해라 누가 쫓아오냐     


현아

밧데리가 영이 될 때까지 나를 소진 시켜야 제대로 산 거 같아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무거워되는 일은 없고 이룬 것도 없지만 어쨌든 죽을 힘은 다했다     


창희

설사하고 나서 기운 빠지는 거랑 비슷한 거냐간만에 설사하고 싶다     


현아

아이스라떼 마셔사 줄까     


창희

집에 가서 마셔야지돌아다닐 땐 안 돼     


현아

생각보다 얼굴 좋네     


창희

나쁠 일이 뭐 있다고날이 폭하다봄이 오나봐     


현아

오겠지봄도 오고 여름도 오고 겨울도 오고     


창희

     


현아

주말에 일 끝나고 편의점으로 갈게     


둘은 앞으로 충분히 잘 될 거 같네요. 

현아는 자신이 그렇게 지루해서 싫어했던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이 됐잖아요, 창희처럼요. 

다음 기정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15화에서 머리를 싹뚝 잘랐잖아요. 임신 아니라는 것에 대한 태훈의 반응 때문에 말이에요.      


태훈

후회했어요행방클럽에서 약한 남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던 거 나도 모른척 하고 살아야 되는 역린 같은 걸 건드린 거 같아서 그리고 기정씬 그때 그 말 듣고 불쌍해서 나한테 끌렸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날 못 떠나겠구나     


기정

못 떠나요안 떠나요불쌍해서 끌리면 안 돼요사람 감정이 이건 연민이건 존경이건 사랑 뭐이렇게 딱딱 끊어져요난 안 그렇던데막 다 덩어리로 있던데나 태훈씨 존경해요연민도 하고 사랑도 해요다 해요     


태훈

근데 머리는 왜 잘랐어요?     


기정

난 뭐 머리도 자르면 안 돼요머리도 못 잘라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태훈씨한테 힘이 돼 주고 싶었는데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태훈씨를 힘들게 하는 여자만 하나 더 늘어나게 한 거 아닌가.... 아니 솔직히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요태훈씨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난 또 뭐가 이렇게 억울한 거지아니 따져보면 마땅한 말이 없는데그냥 그냥 총체적인 느낌이 뭔가 지는 기분이에요내가 꼬맹이 눈빛 하나에 이렇게 무너지는 자존감 낮은 여자였나 쪽팔리고조경선 막말하는 거 하루 이틀도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 쭉 일관성 있게 막말하면서 살아오던 앤데 왜 난 새삼 상처를 받을까태훈씨를 사랑해서그게 왜 내가 작아지는 이유여야 되는데아니사랑은 힘이 나는 일이어야 되는데? (한숨헤어지면 난 행복할까근데 헤어지는 생각을 하면요막 팔이 저려요. (울먹겨드랑이에 막 전기가 와요아니못 헤어지는 건 분명한데 그럼 더 가야 되는데 어떻게 가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태훈

변명같아서 말 안 했는데 그래도 말할게요전 이상하게 아장아장 걷는 애들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삼십년 후에 쟨 어떤 짐을 지고 살아갈까어떤 모욕을 견디며 살아갈까아니까 견뎠지저 애는 그 어떤 애도 그런 일은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유림이가 있어서 좋았고 내 인생에 유림이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 하지만 난 태어나서 좋았나냉정히 생각해 보면 (한숨아니요     


기정  

(눈물 똑     


태훈

그래서 기정씨가 임신 아니라고 했을 때 불쑥 다행이란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아요이상 조태훈의 변명이었습니다     


기정

(훌쩍눈물 닦는그럼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되는 건데요우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데요난 남자할게요여자 넷 힘들잖아요오늘부타 나 남자나 남자     


태훈  

(웃는)     


기정  

머리도 그래서 자른 거예요.     


기정이 참 어른스럽네요, 그리고 지금 이거... ‘추앙’ 같지 않나요?

기정은 지금 태훈을 ‘좋기만 한 사람’으로 ‘추앙’ 합니다, 아주 어른스럽게. 

와, 창희와 기정이 이렇게 치고 올라오는데 미정은 어떤가 볼까요? 

미정이 추행범으로 몰릴뻔한 ‘개새끼’ 찬혁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로써 마지막 가시조차 꿀꺽 넘기는 미정입니다.      


자경

염미정염미정! (길 건너 미정에게 가는어디로 가냐     


미정

술 사가려고     


자경

이쪽에도 있어편의점.     


미정

당신이 염미정‘ 부를 때 좋아

(둘이 걸으며 재잘대며 웃는)

집에 갔다가 어려서 일기장 읽어봤는데 깜짝 놀랬잖아내가 기억하고 있던 이런 시절의 나하고 일기장의 기록하고 너무 달라서난 주변머리 없고 누구하고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애라고 생각했었는데일기장 보니까 아주 좋아 죽어얘는 이래서 좋고쟤는 저래서 좋고아주 뜨거운 애였던데     


자경

몰랐냐너 뜨거워. (비틀)     


미정

(자경 잡는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자경

좋아서. (밤하늘 보는가끔 아주 가끔 마시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이 조용할 때가 있어뭔가 다 멈춘 것처럼 그러면 또 확 독주를 들이부어편안하고 좋을 때도 그게 싫어서 깨어버리려고 확 마셔살 만하다 싶으면 얼른 확 미리 매 맞는 거야난 행복하지 않습니다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불행했습니다그러니까 벌은 조금만 주세요제발 조금만아침에 일어나서 앉는 게 힘듭니다왔던 길을 다섯 걸음 되돌아가는 것도 못 할 거 같아서 두고 나온 우산을 찾으러 가지도 않고 비를 맞고 갔습니다다섯 걸음이 힘들어서비를 쫄딱 맞고 아나는 너무 힘들고 너무 지쳤습니다엄청나게 벌받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제발제발 좀     


미정

당신 왜 이렇게 이쁘냐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한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자경

염미정! (뛰어가 미정을 안는     


6화에서 미정이 어렵게 어렵게 소몰이하듯 자신을 끌고 간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미정이 자경을 끌고 갑니다. 그럴 수 있어요. 마지막 가시도 삼킨 터라 힘이 있어요. 

자경도 기쁜 맘으로 미정에게 끌려갑니다.

한편, 미정에게 ‘추앙’이 있다면 기정에게는 ‘받는’이 있습니다. 

‘받는 여자’ 염기정이 진짜 받는 여자로 우뚝 서는 나레이션입니다.      


기정

받는 여자 염기정목이 부러진 장미 송이를 찾아와 간장 종지에 물 담아 담가 놓았습니다꽂아놓으려 해도 꽂을 목이 없어 간장 종지에 눕혔습니다우리 사랑이 화병에 우아하게 꽂히는 목이 긴 장미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간장 종지에 지쳐 누워 있는 장미 송이가 당신 같고 나 같고 안 쳐다보면 더 빨리 시들까 봐 눈을 떼지 못하는 나는 이런 여자입니다계란빵이 좋아한다는 말에 겨울이면 삼일에 한 번씩 계란빵을 사 드미는 남자소고기라고 말했으면 어쩔 뻔했을까요계란빵이라고 말한 내 입을 칭찬하고 매일 계란빵을 사 드미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태훈에게 꽃가지를 선물 받고 꽃송이를 찾은 뒤 기정의 대사입니다. 

기정식 ‘추앙’이 완성됩니다.

창희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았습니다.

창희는 진정한 서울시민이 되고자 강좌를 들으러 갔습니다. 

강좌는 ‘조선시대 풍경화로 본 서울’입니다.       


강사  

안녕하세요날씨가 많이 춥죠잠깐 구경 좀 할게요

(수강생 하나하나 바라본 후그럼 서로를 잠깐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게요혹시 앞에 계신 분은 생일이 어떻게 되세요     


수강생  

오월 구일입니다     


강사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혹시 옆에 계신 분은 생일이 어떻게 되세요     


수강생2

저는 구월 십구일이요     


강사

구월 십구일이요어유더 굉장히 좋은 날에 태어나셨네요그럼 혹시 죽는 날은 언제세요? (수강생들 웃음죽는 날은 아직까지.... 혹시 언제 죽으실 생각이세요     


수강생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강사

잘 모르겠어요저도 아직 잘 몰라요우리 모두 태어난 날은 알아도 죽는 날은 아무도 모르잖아요그죠그러니 마지막 여정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대부분 준비가 잘 안되어 있어요겪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면 먹먹하죠그럴 때 고인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떠나실 수 있도록 유족들은 그런 고인을 온전히 배웅할 수 있도록 곁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바로앞으로 여러분들이 되실 장례지도사입니다     


창희, 귀신같이 그 자리에 딱 앉아 있네요. 

창희는 삶과 죽음 경계선에서 1원짜리가 아닌 큰 산이 됩니다.

마지막 해방클럽 가입자는 자경입니다. 미정에게 끌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갑니다. 

자경은 빚 독촉을 받는 현진을 대신해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현진은 말 그대로 자경의 뒤통수를 치고 돈을 들고 튑니다. 

다음날 자경은 현진에게 전화를 겁니다.     


자경

(현진에게 전화를 받지 않자 음성사서함에 음성 남기는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맨정신일 때 우르르 찾아오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 아침부터 쌍욕하게 만드는 인간들 중에 형도 있는데환대할게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     


현진에게 음성을 남긴 자경이 자신의 모든 돈을 챙겨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아이 때문에 7초 설레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가지고 나오면서 오백원 짜리 동전을 떨어트렸는데 그 동전이 하수구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전을 다시 주운 자경은 술을 노숙자에게 양보하고 갑니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미정

해방일지에 그런 글이 있더라염미정의 인생은 구씨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뉠 거 같다는     


자경

미투.     


자경은 자신의 돈으로 현진이 빚을 갚고, 미정에게 갑니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미정 

나 미쳤나 봐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자경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자경을 기다리는 미정이 환하게 웃습니다.       


미정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마지막 여운이 깨지지 않게 이대로 끝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7월 5일  화 _ 2022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