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8일 _ 멜랑콜리아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의 레퍼런스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수차례 거론했다.
하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어디까지나 형식이 흡사할 뿐 하려는 얘기는 사뭇 다르다.
'사 죽 차'가 하려는 얘기의 레퍼런스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형식에 고민 때문에 정작 하려는 얘기는 지나친 듯하다)
여기 라스 본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얘기하려 한다.
이 영화는 내가 말하려는 이야기와 정면충돌하고 있다.
일테면 어떤 이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맘을 시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면
라스 본 트리에는 실제 가서 그 사람의 목을 땄다는 느낌을,
나는 <멜랑콜리아>에서 받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시적인' 영화로 탈바꿈 된 아이러니를 낳았다.
나에게 <멜랑콜리아>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의 제목 '우울'을 어느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곧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야기다.
지구에 행성 '멜랑콜리아'가 와서 처박힌다.
지구는 끝장 나는 거다.
사랑을 잃은 지구는 그야말로 파괴되는 것이다.
그 파괴 앞에 저스틴은 덤덤하다.
사랑을 잃었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저스틴의 언니인 클레어는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클레어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는 무척 덤덤하다)
저스틴을 보고 있자면 이 영화는 구원의 영화다.
하지만 클레어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는 재난 영화다.
이 남매에게 멜랑콜리아는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엄마인 클레어는 우울할 수가 없다. 엄마이기에.
(영화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 심지어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 클레어는 멜랑콜리아 앞에서만큼은
무너지고 만다)
엄마이기에 우울할 수 없었던 클레어는 멜랑콜리아 앞에서 운다. 그것은 곧 엄마의 눈물이다.
하지만 저스틴은 사랑에 버림받은 우울함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것은 곧 세계의 파멸로 인한 재발명이다.
(이 과정은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인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는 <멜랑콜리아>의 저스틴이 주인공이다.
'사 죽 차'에 캐스팅된 '저스틴'은 다시 한 번 멜랑콜리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는 스스로 멜랑콜리아와 부딪혀 랭보가 말한 사랑의 '재발명'의 투쟁을 겪는다.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는 대략 그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