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은메달은 없다.

by 레빗구미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무수히 많은 종목에서 많은 선수들이 정말 사력을 다해 상대방을 이기려고 애쓴다. 원래 올림픽은 전쟁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의 축제였던 올림피아제는 그리스와 다른 국가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고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대부분의 국가가 참여하여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다. 그들의 경쟁은 정말 치열하고 보는 사람들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만큼 간절히 각 종목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싸운다.


싸운다. 실제로 그들은 싸운다. 좋은 의미로 그들 자신과 먼저 싸워 무수한 연습과 운동을 하고, 실전에서 다른 국가의 선수와 싸운다. 실제로 직접 때리거나 무기로 찌르지 않더라도 각자의 종목을 무기로 싸우는데, 화살을 쏘기도 하고, 가짜 검을 들고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공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그물에 넣는 운동으로도 상대방과 치열하게 싸운다. 지난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 상대방과 싸우는 선수들을 봐왔다. 그들은 정말 모든 걸 바친다. 그 표정은 잠깐 경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아시안 게임 기간 동안 오다가다 보게 되는 중계를 보면서, 내재된 폭력성을 분출하는 사람들을 봤다. 선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방을 이기려고 애쓴다. 물론 악의는 없다. 단지 목적을 위해 그들을 말 그대로 박살 내는 거다. 이기는 게 가장 좋은 거니까. 그래서 이를 악문다. 그 경기를 보는 시청자도 그들의 승리를 바란다. 상대국가 선수가 박살 나길 원하며 소리친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를 악문다. 그렇게 내재된 폭력성을 경기에 참여하거나 보면서 해소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 이런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다행인지 모른다.


아.. 아쉽네요. 은메달에 그쳤네요. 아쉽습니다.


중학교 때 말없던 나는 화가 나면 의자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내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다. 누굴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 화가 나서 막 집어던졌다. 일 년에 한 번 정도였기 때문에 미친 학생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참고 말을 하지 않고 있기엔 무서웠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폭력성을 분출하지 않으면 내 안에 악마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너 지금 잘하고 있어, 지금 하는 걸로 충분해.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있었다. 너 조금만 더하면 1등 할 수 있어. 아쉽네 이 과목은 2등이네. 아쉽지만 다음에 더 잘해보자.


이번 아시안 게임 중계에도 어김없이 그 말이 나온다. 일단 지면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한 후에 다음에 뭔가 보강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벌써 다음 경기에는 1등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송의 시청률은 2등이던데, 다음 아시안 게임 때는 1등 꼭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해설자를 좀 보강해서 말이다. 다음엔 1등 할 수 있겠지?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2000)의 주인공인 패트릭(크리스찬 베일)은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죽인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피가 낭자하도록 때리고 칼로 찌른다. 그러고 나서 고급 음악과 음식을 즐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게 다 상상 속의 일들이다. 누구나 내재된 폭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으로 원하는 복수를 상상한다. 피로 물들이든, 퇴사를 시키든, 상상 속에선 뭐든 가능하니까. 그렇게 상상하면서 다른 사람과 욕지거리를 밖으로 내뱉는 것이 폭력을 분출하는 작은 방법이다.


자자 우리 한 개만 넣자. 너 이거 하나만 해줘


언젠가 농구 대회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다. 후보 선수였지만, 기회가 오면 열심히 뛰었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처럼 이를 악물고 뛰었다. 연습할 때도 몸이 죽어라 타기 직전까지 뛰고 집에 쓰러져 잠들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유혈 낭자한 폭력을 잠시 뒤로 하고 농구를 하면서 내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해소시켰다. 정말 죽어라 뛰었다. 농구 대회 날, 후보로 앉아있다. 경기에 투입되었다. 하나만 넣으라고, 넌 그거면 충분하다고, 공이 오면 그거 하나만 넣으면 성공이라고. 그렇게 누군가 말하고 나서 그 한 개의 골을 넣었다. 아니 몇 골은 더 넣었다. 경기의 2쿼터가 끝나는 휘슬이 울렸을 때, 나는 만세를 불렀다.


그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모두들 뿌듯해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상대방을 이기려고 했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폭력성을 분출시켰다. 모든 스트레스를 다 쏟아 내고 나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행복했다. 아쉬움보다는 서로 잘했다고 격려를 던졌다. 다음에 더 잘하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날 그 분위기를 즐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더 이상 상상 속에서 패트릭이 되지 않는다. 칼을 들지고 않고 피도 보지 않았다. 그저 공하나를 들고 열심히 드리블을 한다. 내 안 어딘가 있던 폭력성은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사라졌다. 아니 지금도 어딘가에 올라올 공간을 찾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분출되어야 하는 그 폭력성. 누군가는 일을 하며, 누군가는 게임을 하며, 누군가는 운동을 하며 그것을 깊숙한 곳에 숨겨놓는다. 아시안 게임에 뛰던 국가대표들은 그 폭력성을 삭히려고 경기에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폭력성을 더 부추긴다. 아쉽다는 폭력을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데 아무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 모른다. 폭력성을 삭히려고 만든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같은 운동 경기들은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주고받게 만든다.


그러니까. 결국 필요한 건 믿음과 격려인데, 아쉬움이 아닌데, 그런 아쉬움을 잠시 접고. 그런 폭력성은 꼭꼭 숨겨두고. 서로 좋은 말을 던져보자. 상대가 아프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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