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연애를 처음 하던 때, 기념일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모르던 때가 있었다. 연애를 늦게 시작했던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연애 바보 그 자체였다. 보통 연인 사이에 100일 단위로 기념일을 챙겼는데, 첫 연애 때 맞은 첫 100일에 나는 별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정성 들여 쓴 편지와 문구류 선물이 다였다. 당연히 상대가 엄청 화를 냈고 그날 이후 연애에 있어 그런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기념일을 챙긴다는 건 어쩌면 연애하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개인마다 이런 날들에 대한 생각과 체감되는 중요도는 다를 수 있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더라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준비해 서로 주고받는 것은 각자 생각했던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형식적으로 보이지만 생각보다 중요하다.
나: 우리 이제 다음 주면 만난 지 100일이네요. 자기가 뭐 하고 싶어요?
아내: 오빠 나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파스타 먹으러 가요~
나: 그래요 맛있는 것도 먹고.. 첫 기념일인데 선물도 줄게요.
아내: 나도 나도 준비할게요. 근데 100일도 챙기나요? 중국은 그런 거 없는데.
나: 우리는 100일, 200일 같이 100일 단위도 챙기고 연 단위로도 챙겨요. 모든 사람이 챙긴다고 할 순 없지만, 많은 연인들이 챙기고 있긴 해요.
아내: 그렇구나. 이런 거 보면 한국 연애 문화가 참 신기해요. 중국은 정말 특별한 때 하거든요.
나: 생일이나 만난 날만 챙기는구나.
아내: 이렇게면 기념일이 너무 많아요~~ 오빠가 계속 챙겨주실 건가요?
나: 그럼요!!
아내와 결혼 전 이야기를 하다가 100일 단위로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연애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연인들은 100일 단위로 기념일을 챙기는 경우가 많지 않고 큰 기념일들만 챙긴다고 한다. 당연히 100일, 200일 같은 날들은 의미 없이 보낸다. 대신 오랜만에 기념일을 맞으면 선물을 주고받고 축하한다.
여러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도 잃지 않았던 건, 기념일을 꼼꼼히 챙기는 것이었다. 외국인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100일 단위의 기념일과 생일, 1년 단위의 기념일 등을 하나하나 챙겼다. 그렇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 스케쥴러에 하나하나 다 미리 기록을 해 놓고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을 해놓아야 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상대방을 챙기는 것이 곧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했다.
아내: 오빠, 우리 기념일 챙기는 건 좋은데 선물은 서로 원하는 걸 말하고 그걸 사주는 게 어때요?
나: 아 그것도 좋죠. 그럼 딱 100% 원하는 선물을 사줄 수 있으니까요.
아내: 그럼 이번에는 제가 화장품을 하나 살게요.
나: 네 같이 가서 한 번 골라봐요~ 근데 서프라이즈는 없겠네.
아내: 서프라이즈 별로예요. 상대방이 선물 사면 100% 다 만족하기 힘들어요. 만약 상대방이 사 온 선물이 제 취향이 아니면 그게 더 서프라이즈인데요. 너무 놀라서 중국 귀신이 될지도 몰라요.
나: 하하하하 그게 뭔 소리예요. 알았어요. 앞으로 우리 선물은 각자 원하는 걸 사주는 걸로!
기념일 선물을 고르는 것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연애 내내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내가 과연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선물을 살 수 있는 센스가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받는 느낌 때문에 늘 발품을 많이 팔아야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막상 그렇게 산 선물들도 상대방의 마음에 다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사는 선물을 고르는 것에 지쳐가던 찰나에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한 아내가 참 고마웠다.
그 이후로 서로 원하는 선물을 사고 서로 간단히 축하하면서 기념일들을 보냈다. 만난 지 1주년이 지났을 무렵, 결혼식을 1주년 기념 이벤트로 진행했고, 결혼 후에는 모든 기념일 선물을 모아 1년에 하나씩 상대방이 원하는 선물을 살 수 있도록 자유를 줬다. 그래서 매년 저금은 금액이 있는 선물들을 서로를 위해 사용했다. 서로 주고받지는 않지만 아주 큰 것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을 했고, 서로 매우 만족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한해 한 해가 지나 5년을 지났다. 우리에게 자잘한 기념일들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결혼을 한 많은 부부들이 실제로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1년에 한두 번뿐이다. 아이가 생기면 더더욱 아이의 이벤트에 좀 더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나와 아내에게도 똑같이 찾아왔다. 기념일이 더 이상 기념일이 아니게 된다. 당근이가 태어난 이후, 나와 아내의 기념일은 육아가 따라온다. 그게 필수고 먼저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를 먼저 챙긴다. 그렇게 우리 머릿속의 중요도가 자동으로 변환된다.
(띵동-)
아내: 뭐야. 지금 시간에 무슨 알람이에요.
나: 어 뭐지? (핸드폰을 확인한다)
아내: 누구야~ 이 시간에 여자예요?
나: 참 내, 무슨 여자예요? ㅎㅎ 이거 우리 만난 날 알람이네.
아내: 그래요? 오늘 얼마나 된 거예요?
나: 오늘이 2,300일이라고 하네요. 오래되었네~
아내: 아직 멀었어, 10,000일은 넘어야지. 우리 힘내자 자기야.
나: 어... 어... 그.. 그래요..
아내: 왜 말 더듬니?
나: 에효. 자기 참 한국말 많이 늘었다. 별 말투를 다 하네 이제. 암튼 사랑해요. 고마워요.
아내: 또 말 돌린다. 말 돌리기 왕~ 나도 사랑해요.
연애 초기 D-Day 어플을 깔고 만난 날부터 날짜를 자동으로 세도록 설정해 두었다. 100일마다, 1년마다 알람을 보내준다. 그걸로 모자라 내 구굴 캘린더에도 100일 단위의 기념일을 차곡차곡 설정해 두었다. 그래서 100일 단위로 밤 12시가 되면 알람이 온다. 비록 100일 단위로 선물을 주고받지 않지만, 또 100일을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또 100일 동안 상대방이 내 옆에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고 사랑의 표시다.
그래서 내 캘린더에는 각종 기념일들과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매년 반복되게 설정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아이가 한 특별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걸었던 날, 처음 아빠라고 말한 날, 처음 뒤집기 한 날 등. 내 삶에 아내와 기념할 날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차곡차곡 기념할 특별한 일들을 메모하다 보면, 언젠가는 365일이 모두 기념일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결혼 5년을 지난 지금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우리의 기념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