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지나고, 새로운 해를 맞는 느낌은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낡은 시기를 보내고 새로운 시기를 맞는 다는 느낌에 흥분해 늘 12월 31일은 밤늦게 잠들곤 했다. 케이크를 사서 먹거나 술을 마시며 새로운 해가 왔다는 기쁨을 느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보내는 그 시간은 나름 재미있고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가족을 꾸리고 여러 번의 새해를 맞이하면서 점점 이런 느낌이 무뎌진다. 오늘이 가면 그저 내일이 오고, 해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아내와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낼 때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같은 하루를 보내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든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마무리하는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생각해보면 나와 동생이 어린 시절에도 부모님은 연말연초에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똑같이 하루를 보내고 똑같이 첫 날을 맞이한다. 물론 구정 연휴가 되면 시골에도 가고 세배도 하며 보내지만, 숫자가 바뀌는 양력 설에는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 전후에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 아내와 둘이 가던 여행에 이제는 아이가 같이간다. 아마도 매년 가는 이 여행이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어떤 의식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여행에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비행기도 잘타는 편이고, 특별히 어려움 없이 입출국 수속을 할 수 있다. 이제는 나와 아내보다 아이가 더 수다스럽다.
"아빠 우리 어디가요?"
"우리 비행기 타고 바닷가 놀러갈거야"
"정말요? 나 물에 풍덩 수영할거에요!"
"그래! 같이 수영하자~"
"아빠 근데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올해는 아이와 처음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러 간다. 수영이야기를 하면 얼굴이 밝아지던 아이. 처음 바닷가를 보러 갔을 때부터 물에 들어가고 싶던 아이. 그 아이를 위해 비교적 따뜻한 곳으로 일정을 잡았다. 가는 비행기 내내 아이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내가 지어내는 이야기들, 아이를 위한 나만의 동화가 쉬지 않고 아이의 호기심을 채워준다. 마치 드라마 단막극에 집중하는 것처럼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아이의 모습은 계속 내 머릿 속의 동화를 끄집어 낸다.
아내는 한 해 동안 정말 바빴다. 새해에는 더 바빠질 것이다. 아내는 단순하게 하는 일이 더 잘되는 것만 생각한다. 무척 단순하게 긍정적인 생각만 한다. 반면, 나는 그러지 못한 편이다. 올해 못한 것들, 내년에 직면하게 될 어려움들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가끔 밤에 잠에 못들때도 있다. 무엇이든 조금은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끄집어내 걱정부터 한다. 한 해를 정리하는 여행을 가는 비행기 에서도 아내는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고, 나는 걱정으로 가득하다.
"올해 고생 많았어요. 내년에는 중국 가서 잘 될까요? 당근이가 잘 할지 걱정이네요"
"자기는 또 부정적인 것 부터 생각해요? 잘 할 거에요. 걱정마세요"
"이상하게 부정적인 생각부터 떠올라요. 내 성향이 좀 그런 것 같아요"
"올 해 마지막 여행이니까 걱정은 잠깐 그만하시고, 가서 편하게 놀다와요~"
아마도 나의 걱정은 평생 안고가야 할 동반자일지 모른다. 떨치려고 해도 끊임없이 따라 붙는 그 걱정들은 나 자신의 문제 뿐만아니라 아이와 아내에 대한 걱정들까지 붙어 무게를 더한다. 그래도 밝게 떠드는 아이를 보며 잠시 그 근심걱정들을 떨쳐버린다.
여행지에 도착하고 바다를 본 아이는 흥분해서 뛰기 시작한다. 웃고 소리치고, 나와 아내의 손을 잡아끈다. 아이의 표정을 가만히 보며 웃음짓다가 아내의 얼굴을 본다. 아내도 웃으며 아이의 미소를 복사하면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는 방법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주 시끌벅적하게 사람들과 보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과 같이 보낼 것이다. 아마도 각자 살면서 만든 반복적인 계획들일 것이다. 나와 아내도 결혼 후 살면서 만들어진 반복되는 일들 중 하나다. 연말에 어디든 여행을 가서 쉬다 오는 것. 많은 사진을 찍고 우리 각자의 표정을 담아오는 것.
2019년의 마지막에는 아이와 며칠 동안 수영을 하며 보냈다. 아내는 그곳에서도 핸드폰과 테블릿으로 열심히 일을 하며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물을 헤집고 다니면서 연신 신난다고 외친다. 아직 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의 눈은 두려움과 즐거움이 같이 보인다.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아이 손을 끌고 길을 인도 하듯이 아이의 손을 잡고 넓은 수영장의 끝으로 인도한다. 물에 익숙해진 아이는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 지시를 한다. 앞으로 아이가 성장하면 이제 자기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르킬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앞으로 나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온 것만 같다.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갑자기 나와 아내에게 말한다.
"나... 아빠랑 마미랑 같이 놀러가는게 너무 재미있었어~!"
나와 아내는 뜻밖의 그 말에 너무 놀랐다. 마침 영상을 찍고 있던 아내의 핸드폰에 그대로 담긴 그 말을 수십번 반복해 본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뿌듯한 웃음을 짓는다. 희망, 기대, 걱정으로 시작한 한 해를 아이와 함께 추억과 뿌듯함, 행복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희망, 기대, 걱정으로 새해를 맞는다.
이렇게 2019년을 보내고 2020년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