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말수가 적었던 나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른 사람과 만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이야기 속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아마도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방에서 숨은 영화들을 찾고 영화관을 찾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보는 그 행위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0대가 이후 30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영화를 봤다. 기억에 남는 영화도 있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영화도 있었다. 절망에 빠져있을 때 위로해주던 영화도 있었고 화가 날 때 대신 화풀이를 해주는 영화도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여러 삶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영화는 내 인생의 동반자였고, 앞으로도 계속 내 삶의 한쪽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일 것이다.
이렇게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고 나서 다른 사람과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더 재미있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느낌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듣고, 내가 느낀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영화의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의견을 내기가 망설여질 때도 있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추천했을 때, 상대방에게 맞지 않는 영화 일 수도 있었고, 그런 부정적인 반응을 접하면서 점점 영화에 대한 추천을 하기 망설여졌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내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평가하는 이 시대에 나는 점점 내 의견이 담긴 평가를 하지 않게 되었다. 특정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때 상대방에게 영화의 장점을 나열할 때는 너무 많은 말이 필요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꺼낸 영화에 대한 말만으로는 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간단한 느낌이나 평가를 블로그에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로 영화에 대한 설명을 쓰다 보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나의 글을 보고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도 있었다. 글로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내 글을 읽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내 글을 보고 영화를 보고도 채워지지 못한 부분을 채워가는 사람이 생겼다. 2년 전,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스타일로 본 영화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글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스쳐 지나가는 글이다. 필요한 때만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보기 때문에 휘발성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다른 주제의 글을 쓰는 작가에 비해 구독자가 늘어나는 숫자는 느리다. 하지만 꾸준히 써나가다 보면 구독자 수는 하나둘씩 늘어간다. 내 글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좀 더 백지를 채워가는 글에 신경 쓰게 된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글을 쓴 지 2년, 처음 쓴 글과 지금의 글을 비교해 보면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내 삶이 변해가듯, 글도 변해간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다른 기회들도 생긴다. 신작 영화 시사회 참석의 기회가 생겼고, 새로운 매체에 글을 쓸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서 영화 리뷰를 작성하여 보내면 언론사 웹페이지에 배치되어 내 글이 소개된다. 그렇게 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내가 쓴 영화에 대한 글을 접하게 된다. 꾸준히 기사를 업데이트하다 보면 가끔씩 편집부에서 특정 주제의 영화 관련 기사를 청탁하기도 한다. 그런 영화 리뷰뿐만 아니라 내 삶과 생활에 대한 에세이도 하나씩 써나간다.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 공백을 채워나가야 할지 몰랐던 처음에 비해 지금은 편하게 내 생각을 글로 써나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줄 용기다. 글을 처음 발행할 때도, SNS에 내 글을 공유할 때도, 오마이뉴스에 영화 글을 적어 송고할 때도, 클릭하기 전 마음먹기가 필요하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 글을 발행할 때의 망설임을 극복할 용기가 있다면 그 이후엔 그 클릭이 두렵지 않다. 그 용기가 하나하나 쌓여 나의 글이 되고,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시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글도 없었고, 내 이야기는 그저 내 마음속에만 머무르다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여전히 내가 쓰는 글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지만 계속 써나갈 수 있는 건 내 글을 읽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내 이야기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글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내 생각을 정리하여 온전히 담을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순간의 그 용기가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이야기는 오늘도 온라인에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