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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May 21. 2019

영화를 캔버스로 삼아,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원초적인 힘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다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은 다채롭지만, 원초적인 힘은 무언가를 담아내거나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한계를 뛰어넘어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에 기반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1895)은 원근감과 운동성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고, 조르주 멜리에시 감독의 <달세계 여행> (1902)은 대담한 실험을 통해 당시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무한한 상상을 영화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러 사조를 거치면서 촬영 기술과 편집 기술의 발전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의 정의와 특성은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점차 거대 자본이 투자되면서 영화의 일차적인 목표가 이윤 확보로 변질되면서 영화는 비범함을 잃은 채 그저 전형성과 관습에 발이 묶인다. 



하지만, 레오 까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 (2012)가 유능한 사업가, 한 가정의 아버지, 광대, 걸인, 암살자 그리고 광인으로 변신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춰 영화의 본질을 물어봤듯이 영화의 원시적인 힘을 되살리고자 한 작품이 간혹 가다 등장하곤 했다. 제71회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상영했던 테리 길리엄 감독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2018)은 레오 까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의 명맥을 이어 가며 <열차의 도착>과 < 달세계 여행> 등 고전 영화가 보여줬던 원초적인 힘을 관객의 가슴에 각인시킨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영화를 캔버스로 삼아 주인공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주인공이 경험하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넘나들며 미치도록 비범한 영화가 무엇인지 증명한다. 



영화의 원초적인 힘을 각인시키기 위한 기초 작업: 기묘한 여정의 설계와 소설 '돈키호테'의 변주


극 중 '토비(아담 드라이버)'는 졸업작품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덕분에 출세했으며 10년 후 돈키호테를 모티프로 한 보드카 광고 촬영을 위해 스페인 소재 작은 마을로 오게 된다. '토비'는 천재 CF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적으로 방황을 겪고 있을뿐더러 제작과정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의 졸업작품 DVD를 찾은 '토비'는 로케이션 섭외, 캐스팅 등 모든 프로덕션 과정에서 열정 넘쳤던 과거를 다시 떠올리며 당시 영화 촬영 장소로 향한다. 거기서 본인이 직접 '돈키호테'로 캐스팅했던 구둣방 주인 '하비에르(조나단 프라이스)'를 만난다. 근데, '토비'는 본인이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산초'라고 부르는 '하비에르' 때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토비'는 '하비에르'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와 함께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는 기묘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보다시피 테리 길리엄 감독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또한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해석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원제 '재기 넘치는 기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를 적절하게 수용했다. 원작은 거대한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며 무모하게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비웃음을 유발하지만, 산초 판사와의 대조적인 태도를 통해 그의 무모함과 상상력을 퇴폐한 현실을 극복하는 용기이자 원동력임을 일깨운다. 테리 길리엄 감독은 이와 같은 원작 소설의 주제를 CF 감독으로서 성공했지만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향락만 누리는 '토비'와 그가 졸업작품을 위해 창조한 '돈키호테'와의 기묘한 여정으로 변주했다. 따라서 영화는 표층적으로 잃었던 열정을 되찾고 10년 전 설정한 이상향을 향해 다시 여정을 떠나는 '토비'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비(非)관습적인 서사 구조'와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의 특징이 결합된 영화적 장치를 매개로 심층적 이야기로 넘어간다. 



'비(非)관습적인 서사 구조'와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 특징의 결합: 표층에서 심층으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현실과 상상,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기 때문에 전형적이고 관객이 친숙하다고 느끼는 서사 구조 대신 '비(非)관습적인 서사 구조'를 택한다. 왜냐하면 만약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선택했다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이야기를 전형성 안에 가두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의 극 '생일파티(The Birthday Party)'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와 같은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의 특징도 수용함으로써 표층적 이야기를 심층적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부조리극이 관객의 능동적 판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말놀이를 배치했듯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는 터무니없고 무질서한 장면을 연속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관습과 전형성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게 유도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 안에서 영화가 지닌 원초적인 힘과 가치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장면의 연속성 안에 '토비'와 '하비에르', '안젤리카(조아나 리베이로)' 등과의 만남을 그려냄으로써 '토비'가 원작 소설 속 산초 판사의 위치에서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동시에 모험을 통해 다시 한번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본인의 자아와 열정이 더 이상 퇴폐 향락 속에 파묻히는 걸 거부하고 힘찬 목소리로 외치는 '토비'의 모습을 지켜보며 영화의 일차적인 본질은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한계를 극복하고 그려낼 수 있는 상상력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통합론적인 사고를 통해 죽음과 삶의 연관성을 강조했듯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 '토비'는 본인이 만든 캐릭터를 제거함으로써 공허한 삶에 벗어나 꿈을 안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테리 길리엄 감독은 주연 배우의 건강 문제, 제작비 확보의 어려움, 촬영 세트장 관련 문제점, 오랜 기간 작품을 준비하면서 갈등을 빚은 다른 제작자와의 소송 문제 등으로 인해 여러 번 좌절했지만, 꿈을 잃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결국,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극 중 인물과 실제 감독 간의 유사점과 함께 관객에게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원초적 특성을 가슴 깊이 새기는 비범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 해당 글은 아트렉처에 발행한 글과 동일합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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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05.16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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