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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Aug 19. 2019

따뜻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우리집>


아이들의 시선과 삶을 다루는 영화는 미소를 짓게 만들면서도 가슴을 미어지게도 한다. 이처럼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2004), 다른 하나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2019)이다. 전자는 무너지는 아이들의 삶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감이, 후자는 무책임한 어른들과 달리 가족에 관한 고민을 직접 해결하려는 아이들의 실천적 행동을 보며 느끼는 부끄러움이 마음을 슬픔과 미안함으로 가득 채우는 근원이 된다. 



영화 <우리집>은 ‘하나(김나연)’와 ‘유미(김시아)’의 집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응시킨다. 이는 한 아이의 시선만 발전시키는 게 나 아니라 아이 세 명의 시선을 모두 견고히 만들뿐더러, 각자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고르게 그려낼 수 있게 돕는다. 견고히 형성된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보여주고, 아이들의 용기 있는 여정은 어린 나이임에도 너무 일찍 성숙해버린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게다가, ‘집’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어른과 아이의 상이한 태도가 영화 <우리집>의 전반적인 공기 형성에 힘을 보탠다. 극 중 어른들에게 ‘집’은 그저 지친 하루로부터 잠깐 벗어나는 공간이거나 이와 정반대로 감정의 골을 더욱더 깊게 만드는 공간이지만, 아이들에게 ‘집’은 같이 식사하고 함께 숨을 쉬며 감정의 골을 풀어낼 수 있는 가족의 고유한 공기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책임감이 있는 아이들이 책임감이 없는 어른들과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 복잡한 심경이 짙게 깔린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분위기가 영화의 엔딩과 함께 고조된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엔딩은 정점에 달한 감정을 서서히 정리하지만, 영화 <우리집>은 오히려 정반대로 고조시키는 방향을 택한다.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는 ‘유미’와 ‘유진(주예림)’의 말 한마디와 이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나’의 모습은 아이들의 인식이 ‘가족(家族)’의 사전적 의미에 갇힌 어른과 달리 ‘식구(食口)’의 의미까지 포용하는 발전된 ‘가족’의 의미로 확장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하나’는 여름방학 동안 ‘유미’와 ‘유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만들어 먹은 음식을 정리한 요리책을 시간 역순으로 살펴보는데, 이는 어른들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태도 때문에 떨어져 지내야 할 상황을 어떻게 수용할지 일찍 깨닫는 아이들의 성장을 함축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우리집>은 전작 영화 <우리들> (2015)처럼 성장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우리들>의 경우 아이들의 성장을 보며 미소를 짓을 수 있겠지만, 영화 <우리집>의 경우 아이들의 성장을 촉매하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 때문에 미소를 짓고 싶어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테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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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08.13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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