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의 영화 <리틀 조> (2019)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의 영화 <리틀 조>는 배우 에밀리 비샴에게 제72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다. 극 중에 실험실 연구원 릭(피닉스 브로사르)의 ID 카드 비밀번호 ‘fromage’가 언급된다. ‘fromage’는 프랑스어로 현재는 응고시킨 동물의 젖을 틀에 넣어 수분을 제거하고 모양을 만들어 굳히는 치즈의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원래는 다양한 재료를 틀에 넣어 만든 요리를 지칭하는 용어다. 그리고 틀이 지닌 한계와 관련된 특성은 현대사회의 몰개성으로 이어진다. 몰개성에 관하여 <리틀 조>는 같은 해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을 받은 로어칸 피네건 감독의 영화 <비바리움> (2019)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차이점은 <비바리움>은 순환성을 매개로 몰개성의 현대와 미래를 보여주는 반면, <리틀 조>는 감염을 매개로 이를 논한다. 근데, 몰개성에 관한 내용은 <리틀 조>의 심층적 부분에 해당하고, 이 영화의 표층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과학 연구에서의 비윤리성에 관한 이슈도 중요하다.
표층적인 내용을 먼저 다루자면, 생명공학자 앨리스(에밀리 비샴)는 아름답고 향기로울 뿐만 아니라 치료 효능까지 있는 식물을 만드는 새로운 육종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책임자 칼(데이빗 윌멋)은 프로젝트를 중단하라고 지시했지만, 앨리스는 동료 크리스(벤 위쇼)와 함께 연구를 계속 밀고 나간다. 연구실 책임자는 분명 연구에 결함이 있을뿐더러 그 결함이 동식물 모두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중단을 명령했지만, 앨리스는 이를 어김으로써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와 생태계와 관련된 윤리를 모두 위배한다. 중반부에 물증은 없지만, 앨리스가 ‘리틀 조’라는 식물을 개발할 때 사용한 허가되지 않은 새로운 R바이러스 벡터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미확인 병원성 바이러스가 생성되었다는 심증을 발견한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틀 조’는 번식을 할 수 없도록 유전적으로 조작되었지만,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꽃가루로 다른 식물을 죽이고 자기 종자를 번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리틀 조’는 꽃가루로 인간과 개를 포함한 동물의 신체에 병원성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번식 기능이 없음에도 자신들이 계속 퍼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객체로 만든다. 이는 생태계 평형의 파괴로 해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유전자 조작 기술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이기심을 심판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앨리스는 ‘리틀 조’ 식물을 자기 집으로 몰래 반출해 아들 조(킷 코너)와 함께 식물을 기르는데, 나중에 ‘리틀 조’에 모든 생명체가 종속되는 빌미를 제공하므로 이것도 마찬가지로 비윤리성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혹자는 비윤리성의 결과를 바탕으로 <리틀 조>는 식물 호러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틀 조’를 제외한 다른 식물은 희생당하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듣지도 못하고 의지도 없는 좀비가 된 건 아니지만, ‘리틀 조’의 병원성 바이러스에 의해 지배 및 조종을 당하기 때문이다. 즉, 표층적인 측면에서 <리틀 조>는 다른 생물의 본성과 유전자를 조작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생태계 질서를 왜곡시켜 재앙을 초래한다는 식물 공포 영화가 된다.
그렇지만, <리틀 조>가 섬뜩한 영화로 각인될 수 있는 이유는 심층적인 내용에 있다. ‘리틀 조’의 병원성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식물에서 일어나는 증상은 점점 시들다가 죽는다는 것이고,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증상은 본인 감정과 의식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틴 쉴라츠 촬영감독은 이처럼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사용할 카메라 앵글의 종류를 제한했을뿐더러 과감한 카메라워크를 보였다. 예를 들어, 버즈 아이 뷰 숏으로 무언가를 발산하는 듯한 실험실 안 ‘리틀 조’를 담아내고, 아이 앵글 숏에 동을 가둠으로써 감염에 의해 마비된 인간의 몽타주를 형성한다. 그리고 대화 장면의 경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처럼 의도적으로 트래킹 숏을 활용한다. 정석대로라면 대화 장면은 숏과 리버스 숏 패턴에 의해 완성되거나 딥 포커스가 맞춰진 설정 숏을 유지함으로써 사실주의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마틴 쉴라츠 촬영감독은 관습적인 영화언어를 파괴함으로써 의사소통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진짜 감정이 소거된 상황을 표현한다.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현대와 미래의 몰개성을 이야기하는데, 이때 감정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환기시킨다. 온전한 인간은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을 자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틀 조’의 병원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그런 능력을 상실하고, 이는 인물들의 마비되거나 변질된 감각을 통해 보여준다. 시각의 경우 대화 장면에서 언급한대로 트래킹 숏을 통해 발화자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분리한다. 발화자의 목소리는 이어지지만, 발화자의 이미지가 변했는지 파악할 수 없는 현상을 만들어 시각의 마비를 나타낸다. 후각의 경우 실험실 안 ‘리틀 조’를 카메라 회전과 함께 종종 버즈 아이 뷰 숏으로 담아내 꽃가루로 만연한 실험실 안을 보여준다. 그런 공간 안에서 코로 숨 쉬려는 순간 공기 대신 꽃가루만 흡입하기 때문에 인물의 후각은 자연스럽게 다른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촉각의 경우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사이의 충돌 장면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염되기 전 인문들은 교감을 위한 접촉 행위를 보여줬지만, 감염된 후에는 이들이 행하는 접촉은 상대방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접촉의 특성이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접촉과 촉각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촉각이 ‘리틀 조’에 의해 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리틀 조’에 의해 감각을 통제받는 인간의 모습이 몰개성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감염된 자들은 본인이 현재 느끼는 행복이 원래 자기가 추구하려던 행복이 아님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짓는 행복의 표정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과 ‘리틀 조’가 전 세계로 수출될 예정을 고려한다면, 점차 극심해질 몰개성과 그로 인한 공포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지만, ‘리틀 조’에 의해 그런 성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은 ‘리틀 조’가 원하는 개성 없고 동일한 객체가 되었다. 따라서 <리틀 조>의 심층적인 내용은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개성은 몰개성으로 역행 중인 현대사회와 크게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미래사회를 이야기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