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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Dec 03. 2019

자비에 돌란과 이미지, <마티아스와 막심>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 (2019)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적인 감독으로 분류되는 감독 중 한 명은 바로 자비에 돌란 감독이다. 일부는 1989년생인 굉장히 젊은 감독이 내놓는 작품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지만, 상당수의 평론가는 자비에 돌란에게 ‘칸의 총아’ 및 ‘이미지의 과잉’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며 질투 섞인 조롱을 건넨다. 특히, 자비에 돌란이 제69회 칸영화제에서 영화 <단지 세상의 끝> (2016)으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자 평단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자비에 돌란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은 자비에 돌란이 영화를 만들 때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그리고 그 관심 대상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승화하고 싶은지를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관습적인 잣대를 내밀며 그를 평가 절하한다. 자비에 돌란은 서사 구조와 인물의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인물의 기분과 상황에서 묻어나는 감정 및 인상을 어떻게 이미지화할 것인가에 심혈을 기울이는 감독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자비에 돌란은 영화를 대상화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미학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으로 여기는 시네아스트다.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았던 자비에 돌란의 여덟 번째 장편 연출작 <마티아스와 막심> (2019)은 이런 미학적인 목표가 한층 더 강화된 작품이다. <마티아스와 막심>도 마찬가지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 (2009) 때부터 이어진 애증, 갈등, 사랑, 총 세 가지 핵심 감정을 다루는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단지 세상의 끝>이 남긴 자비에 돌란이 감독으로서 성숙해졌느냐에 관한 불명확성을 이번 영화를 통해 명확성으로 완전히 돌려놨다는 것이다. <단지 세상의 끝>은 프랑스 극작가 장 뤽 라갸르스의 동명 원작 희곡을 각색한 작품으로, 자비에 돌란은 원작 희곡의 방대한 대사량을 주인공 ‘루이(가스파르 울리엘)’을 1인칭 관찰자 시점에 놓고 인물들이 말하는 것과 숨기는 것으로 나누고, 이 두 가지 분류 간의 충돌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기분과 공간을 배회하는 분위기를 유발한다. 시간을 환급해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미련을 버리는 자비에 돌란의 태도는 그가 굉장히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연의 결과로 인식되었을 테다. 그러나 비록 일곱 번째 장편 <존 F. 도노반의 죽음과 삶> (2018)이 아직 개봉하지 않았지만, <마티아스와 막심>은 자비에 돌란이 영화인으로서 성숙해졌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마티아스와 막심>은 친구 여동생의 단편영화 촬영에서 키스하라는 요청을 받은 절친한 사이인 ‘마티아스(가브리엘 달메이다 프라이타스)’와 ‘막심(자비에 돌란)’의 그날 이후 관계를 그려낸다. 우선,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사건의 리듬은 더 극심하게 파괴됐지만, 감정의 리듬은 더욱더 극대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비에 돌란은 서사의 인과성과 그로 인한 사건의 변화 에너지에 관심이 없고, 견디기 힘든 들끓는 감정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커팅 포인트를 설정해 본인이 원하는 감정의 리듬을 구성한다. 그래서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이 전작들보다 과감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비에 돌란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장면 간의 비연속성이 가장 심해서 관객은 잠깐 나오는 암전 장면마다 그가 이미지화하려고 했던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비에 돌란 감독은 이전 작품처럼 딥 포커스를 거부하는데, 여기에 타임 랩스 기법, 슬로 모션, 혹은 일반적인 클로즈업 중 최소 하나를 택해서 인물의 기분을 다양한 형태로 형상화한다. 아울러 스테디캠 사용을 통한 빠른 줌인과 정밀하고 속도감 있는 전환 덕분에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여러 커팅 포인트가 형성되고, 그 포인트에 핵심 감정이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감정들이 비가시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프레임 안에 있는 가시적인 이미지와 결합하며 다층적이고 은유적인 제3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근데, 이와 같은 심층성은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티아스와 막심>에는 프레임이 두 개가 존재한다. 두 프레임은 이중 프레임을 형성하지 않고 개별적인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두 프레임에 각각 A와 B라는 명칭을 부여한다면, 프레임 A는 스크린 밖에 있는 카메라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마티아스’와 ‘막심’이 소속된 공동체 혹은 집단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프레임 B는 친구 여동생의 카메라에 의해 혹은 스크린 밖에 있는 카메라와 창문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으로, ‘마티아스’와 ‘막심’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두 인물은 처음에 프레임 A에 있다가 친구 여동생의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하면서 프레임 B로 이동한다. 그러고 나서 예상대로라면 두 인물은 다시 프레임 A로 이동하거나 프레임 B에 머물러야 하지만, 어느 프레임에 속하지 못한 채 그 주변만 배회한다. 두 인물은 자기 심정과 상대방 심정을 모두 알려고 노력하지만 엇나가기만 하고, 자비에 돌란의 의도대로 엇갈리면서 생긴 그들의 운동성에서 감정의 변화 에너지가 생성되며 또 다른 감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고로, 관객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감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뿐더러 자비에 돌란이 미학적으로 구현하려고 한 감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사유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마티아스’와 ‘막심’이 과거에 장난으로 키스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친구들과 달리 정작 당사자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장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친구들의 사소한 문법 오류를 일일이 교정하는 ‘마티아스’의 장면, 새벽에 강에서 수영하다 방향을 잃은 ‘마티아스’가 친구들에게 맥락 없이 “길을 잃었어”라고 말하는 장면 등 서사를 이루는 텍스트들이 감정으로 치환되어 읽힌다. 그래서 <마티아스와 막심>은 서사 구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도리어 자비에 돌란이 설정한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없게 되고, 서사에 임의로 논리성을 부여하려고 애쓸수록 영화의 엔딩을 비약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관객이 자비에 돌란의 미학론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티아스와 막심>을 본다면 <단지 세상의 끝>에서 보여준 성숙함을 끌어안은 채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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