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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Jan 23. 2020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낭만, <브라 이야기>

바이트 헬머 감독의 영화 <브라 이야기> (2018)

※ 이 아티클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364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네아스트와 시네필 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감독이 반드시 존재한다. 독일 출신인 바이트 헬머 감독이 이에 해당한다. 바이트 헬머 감독은 1968년 당시 서독 하노버에서 출생했고, ‘현대판 동화 이야기꾼’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영화 <투발루> (Tuvalu, 1999)로 데뷔하기 전 이력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다. 바이트 헬머 감독은 북독일 방송국(Norddeutscher Rundfunk, NDR)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하던 중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동독으로 넘어가 에른스트 부슈 연극예술학교에서 연극 연출을 배웠다. 그리고 도중에 서독으로 돌아와 뮌헨 영화학교에 입학해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아마도 연극과 영화 모두 공부하며 접한 작품들이 상당하다 보니 바이트 헬머 감독이 다룰 수 있는 소재의 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두 매체의 연출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영화 <브라 이야기> (Vom Lokführer, der die Liebe suchte..., 2018)의 시놉시스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매일 기차에 딸려온 물건의 주인을 찾아주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기관사 ‘눌란(미키 마뇰로비치)’은 은퇴를 앞둔 어느 날 기차 앞머리에 하늘색 레이스 브라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인을 찾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브라 이야기>는 한국어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원래 제목은 ‘Vom Lokführer, der die Liebe suchte...’으로 남성 명사 ‘Lokführer’는 기관사를, 관계대명사절 안에 있는 동사 ‘suchte’는 ‘~를 찾다/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원형 ‘suchen’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화의 전반적인 맥락을 고려한다면 원제는 ‘사랑을 찾으려 했던 기관사로부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브래지어의 주인을 찾으러 떠나는 기관사의 이야기는 표층적이고, 이 영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제의 관계대명사절에 있는 4격 목적어 ‘die Liebe’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Die Liebe’는 문자 그대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브라 이야기>는 낭만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과거의 낭만을 회복하려고 떠난 한 인간의 실패담을 다룬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아제르바이잔은 1922년 구소련을 이루는 공화국의 하나로 편입됐었고, 구소련이 붕괴된 후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하지만 잊혀 있었던 국가다. 근데,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열차의 도착> (1895)처럼 극 중 주인공 눌란은 무언가를 찾듯이 특정 동네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방문한다. 또한, <브라 이야기>의 로케이션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의 ‘기차 마을’은 현재 철거된 상태인데, 마을에 기록됐던 공기와 기억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찾거나 회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바이트 헬머 감독은 한때 구소련을 구성했던 국가를 빌려 2019년에 개봉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영화 <레토> (2018)처럼 그 시대의 공동체적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 노력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아낸다. 즉, <브라 이야기>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포스트 소셜리즘에 잠긴 영화가 아니라 그저 그 시대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성에 대한 향수를 논하는 영화다. 그리고 만약 브래지어를 잃어버린 주인을 찾기 위한 아찔한 동네 탐방기를 그 시절의 분위기와 낭만을 되찾기 위한 여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의 심층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다. 



“전적으로 같은 의견입니다. 내 의견으로는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요즘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 중에서 시네마가 거의 없습니다. 그 영화들은 거의 내가 ‘대화하는 사람들의 사진첩’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먼저 영화적 방법으로,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풀어 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영화가 하루아침에 연극적 형식을 띠게 된 것은 불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메라의 이동으로 이 사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카메라가 보도를 따라 움직인다 해도 연극적인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결과 영화적 스타일이 소멸되었고 환상도 소멸되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시각적 요소와 대사를 명확히 구분하고, 가능하다면 대사보다는 시각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연기를 어떤 방식으로 연출하든 간에 감독의 주요 관심은 관객으로부터 최대의 주의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직사각형의 스크린은 감정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프랑수아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 중에서 (자료 제공: 알토미디어)

     

위에 인용된 구절을 끌고 온 이유는 <브라 이야기>의 독특한 특징 두 가지를 꺼내기 위해서다. 하나는 음향, 효과음, 음악 등이 있으므로 무성영화는 아니지만, 대사가 없고,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면 <브라 이야기>는 자크 타티의 영화들에 가깝다. 또 다른 하나는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실제 로케이션과 한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극 중 시대와 장소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만, 영화적으로만 다가간다면 전혀 알 수 없다. 이는 비논리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익스트림 롱 숏으로 엄청난 거리를 달리는 눌란의 기차를 확인할 수 있다. 눌란은 기차에 딸려온 물건을 주인에게 되찾아주기 위해 이 거리를 오로지 걸어간다. 상식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것은 대사가 도입되면서 소멸한 영화적인 스타일과 환상을 회복할뿐더러 감독이 주목한 노스탤지어를 형성하고 거기서 파생된 감정의 파동을 스크린에 채우려는 목표와 연관이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 나온 기차처럼 눌란의 낡은 기차가 동네를 통과하자 기차의 운동성과 함께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의 궤도로 진입하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눌란은 매일 동네를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며 브래지어 주인을 찾고자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사실 눌란은 자기가 기차를 타며 지나갔던 동네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매일 고산지대에 위치한 집과 동네를 오가던 그가 어느 날부터 동네에 위치한 숙소에 머무르는 모습에서 이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동네 여성들은 눌란의 선의와 노스탤지어를 산산조각으로 깨뜨린다. 지금까지 눌란이 이 동네가 자신이 꿈꾸던 공동체적 분위기를 품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기차 창문을 통해서만 동네의 일부 풍경을 봤었기 때문이다. 눌란은 그 일부를 전체라고 여기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직접 돌아다니며 노스탤지어의 공간이라고 믿어왔던 동네의 현실을 자각한다. 비록 눌란은 브래지어에 담긴 성적인 함의에 관심이 없는 순박한 인물이지만, 여성들은 그를 만나면 브래지어에 관심이 있는 척을 하며 그를 조롱하거나,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바로 외면한다. 동네 남성들은 대부분 건장한 청년 혹은 중년인데 매일 노동하러 집을 나서기는커녕 우중충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눌란이 나타나면 그를 추적해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한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낭만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마을은 실은 내면이 무너진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것이다. 아울러 은퇴한 다음 날 냇가에서 낚시를 같이하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했지만, 소년들의 장난거리로 전락한 눌란의 초상이 이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꿈이 좌절된 눌란은 자신처럼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소년의 손을 잡고 본인 집이 있는 산 정상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동네와 대비되는 산 정상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한다. 눌란의 집이 있는 산 정상은 동네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아마도 일종의 유토피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밝은 모습 때문에 <브라 이야기>의 결말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정착하고 싶었고, 회복하고 싶었던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난 눌란이 간신히 과거의 낭만만을 꿈꿀 수밖에 없는 산 정상으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결말은 씁쓸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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