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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Mar 01. 2020

전쟁, 여성, 그리고 삶: 영화 <빈폴>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의 영화 <빈폴> (Dylda, 2019)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사실, 크고 작은 전쟁들에서부터 널리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들끼리, 이미 수천 번도 더 넘게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16~17쪽


제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은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의 영화 <빈폴> (2019)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감독에게 영감을 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전쟁이자, 남성들의 언어와 여성들의 침묵으로만 가득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 책이다.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두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고통과 슬픔, 관계 및 육신에 새겨진 상처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근데, 감독은 텍스트로 기록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할 때 17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 de La Tour)와 프랑스 신고전주의 초상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화폭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주요 소재인 촛불은 <빈폴>의 핵심적인 빛이 되었으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림은 특정 시퀀스의 뼈대가 되어 전후 여성들의 삶을 촉각적으로 인지하도록 미장센을 구축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17세기 로렌 공국의 주민은 페스트와 전쟁의 여파로 기근, 황폐화, 인구 감소 등 막대한 시대적 고통을 겪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지인을 잃은 사람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애도 의식에 전통적으로 사용된 것은 촛불이었으며,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예수의 빛이라는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오랜 기간 고난의 터널 속에서 지낸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심리적인 차원의 역할을 했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도 전쟁과 페스트로 인한 트라우마를 경험했었을 뿐만 아니라 무의식에 잠재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노력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촛불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 작품 속 촛불의 은은한 빛은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할뿐더러, 명상과 관조의 세계 아래 슬픔, 좌절, 우울 등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서서히 풀리도록 한다. 촛불의 빛이 은은히 밝히는 부분은 화폭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빛이 도달하지 못해 어두운 영역은 주변부에 배치된다. 빛이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즉시 번잡함을 극복할 수 없지만,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노력이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안내한다.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이와 같은 빛의 역할을 기반으로 <빈폴>에 필요한 관조적인 스탠스를 형성하고, ‘이야(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와 ‘마샤(바실리사 페렐리지나)’의 감정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빛은 보편적인 상황에서 느낄 수 없는 질감을 이끌어내며 감정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빈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레닌그라드의 첫 가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는 ‘마샤’와 함께 대공포 사수였으며, ‘마샤’가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최전선에 남을 때 그녀의 아들 ‘파슈카(티모시 그라스코프)’를 데리고 전역과 함께 레닌그라드에 정착했다. ‘이야’는 전쟁 당시 뇌진탕을 겪은 이후 강한 자극을 받으면 몸이 굳어지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야’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마샤’와 ‘파슈카’를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이야’에게 불운한 일이 발생한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파슈카’를 본인이 일하는 군병원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파슈카’는 병상에 누운 참전 용사들이 흉내를 내는 투견의 소리를 듣게 된다. ‘파슈카’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소리이지만, ‘이야’에게는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키는 자극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파슈카’는 집에서 참전 요사들처럼 투견 흉내 내며 장난을 치기 시작하고, ‘이야’는 같이 놀아주다가 갑자기 경직되어 아이와 본인 모두에게 끔찍한 일을 의도치 않게 범한다. 그리고 어슴푸레 흐릿하게 방을 밝히는 빛은 이 상황을 관망하게 만들며 끝나지 않은 상실의 시대를 환기한다. 



상처 자국이라면 전쟁 때 생긴 것이겠지.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온몸이 달달 떨리지. 온몸에 경련이 일어.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350쪽


이 사실을 모른 채 ‘마샤’는 ‘이야’가 거주하는 레닌그라드에 도착한다. 비록 ‘이야’가 직접적인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전우이자 비언어적인 행위만으로 모든 걸 파악할 줄 아는 친구 사이이기에 ‘마샤’는 ‘이야’, ‘파슈카’,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눈치챈다. ‘마샤’가 ‘이야’와 시선을 교환하기 위해 켠 라이터 불빛은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 속 촛불의 역할을 하며 두 인물을 관통하는 슬픔과 두려움을 응시하게 만든다. 다른 여성처럼 ‘엄마’라는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아이와 사별하고, 실재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자라진 ‘마샤’는 불안감에 빠진다. 애써 슬픔을 감추고 ‘이야’와 함께 춤추러 외출한 ‘마샤’가 길거리에서 만난 ‘사샤(이고르 시로코프)’와 감정이 거세된 섹스를 하는 모습이 이를 입증한다. 더 나아가, 자동차 밖에서 아득히 비추는 가로등의 빛은 섹스의 일반적인 강렬한 느낌을 짙게 뭉기며 무감정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에 덧붙여 빛에 의한 질감은 클로즈업 쇼트에 담긴 ‘마샤’와 결합함으로써 그녀가 경험 중인 좌절을 촉각으로 감촉할 수 있게 한다. 



폭탄을 네 개씩. 모두 합치면 400킬로그램도 넘는 그 무거운 걸, 글쎄, 다 직접 손으로 전투기에 실었다니까. 한 대가 출격했다 싶으면 어느새 다음 전투기가 들어오고, 또 막 출격하면 또 들어오고, 밤새 그러는 거야. 아유, 그런 일을 여자 몸이 어떻게 견디나. 다 망가져버렸지. 사실 우리는 전쟁 내내 여자가 아니었어. 여자로서의 성징이 전혀 없었으니까 ∙∙∙∙∙∙ 생리도 없었고 ∙∙∙∙∙∙ 그건 당신도 잘 알 거야 ∙∙∙∙∙∙ 전쟁 끝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어.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351쪽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비극의 상흔을 간직한 여성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지각할 수 있도록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작품 ‘터키탕(Le Bain turc)’을 응용하기도 했다. 원래 ‘터키탕’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여성들의 육체를 관능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렇지만,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이 누드화의 구도를 롱 쇼트로 시작해 여러 여성들의 육체에 묻어난 고난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클로즈업 쇼트로 전환해 ‘마샤’의 몸에 새겨진 상흔을 근거리에서 담아낸다. 목욕탕에서 ‘이야’와 ‘마샤’는 목욕을 하기 위해 물을 받고 있을 때 그 순간 카메라는 ‘마샤’의 복부 아래를 클로즈업 쇼트로 담는다. 극 중 맥락상 ‘마샤’의 전쟁 당시 삶과 위의 인용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클로즈업 쇼트에 담긴 복부 상처는 전쟁이 끝난 후 잉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마샤’는 유산탄 파편이 자궁이 있는 위치에 박혀 더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마샤’도 ‘이야’처럼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겪는데, 종종 코피를 흘리거나 혹은 탈진으로 인해 기절하기도 한다. 이 또한 심신으로 망가진 전후 여성의 모습을 의미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Le Bain turc, 1862)'  //   영화 <빈폴> 스틸컷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 이날들만 견뎌내면 ∙∙∙∙∙∙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 ∙∙∙∙∙∙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296쪽


물론 영화는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주위 인물의 삶도 조명한다. 전쟁에서 저격수로 활약했던 ‘스테판(콘스탄틴 발라키레프)’은 종전 후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전신 마비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워지낸다. 그의 아내는 자식을 잃고, 피난을 떠난 와중에 ‘스테판’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으므로 남편이 사망한 줄 알고 지금까지 고독에 잠몰한 채 지내왔다. 간부들은 종전 후 비로소 천천히 평화의 길로 나가고 있으니 희망을 품으라고 한다. 하지만, 더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스테판’과 그런 남편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독의 구렁텅이에 깊게 빠져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아내는 재회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논의 끝에 ‘이바노비치(안드레이 비고프)’에게 불법인 안락사를 진행해 영원히 해방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방법이 오직 죽음이라는 사실은 평화와 사랑이 일부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에게 가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밤에 ‘스테판’이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희미한 빛이 두 인물을 비추고, 그 빛이 미치지 못한 프레임의 나머지 암흑 부분은 ‘스테판’이 아내에게 전한 “전쟁 때문에 미안해”라는 말을 공허하게 울리도록 만든다. 그로 인해 홀로 육아를 책임지고, 여성이자 한 개인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한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피부에 와 닿게 만든다. 



‘이야’는 ‘이바노비치’의 지시에 따라 ‘스테판’의 안락사를 시키고, 빈혈 증세 때문에 남은 병상에 잠깐 누워있던 ‘마샤’가 그 상황을 목격한다. ‘파슈카’의 공백을 새 생명으로 채우고 싶은 ‘마샤’는 이 상황을 빌미로 ‘이야’가 자기 아기를 대신 잉태할 수 있도록 ‘이바노비치’에게 협력하라고 협박한다. 분명 ‘마샤’는 ‘이야’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져있는 ‘마샤’는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국 친구이자 기댈 수 있는 키다리 아저씨인 ‘이야’에게 가혹한 일을 범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전쟁 이후 평화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국가의 주장과 달리 전쟁과 승리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표류 중인 여성의 피폐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마샤’는 삶의 어두운 터널에 굴복하지 않는다. 얼굴은 점점 초췌해지지만, ‘마샤’는 어떻게라도 이를 타파하려고 노력한다. 이웃 아주머니가 초록색 드레스를 수선하기 위해 밤에 잠깐 ‘마샤’에게 옷을 입히고, ‘마샤’는 그 드레스를 입은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돈다. 어두운 방을 밝히는 은은한 빛과 초록색 드레스는 따뜻한 질감을 형성하며 자유와 해방감을 일시적으로나마 느끼는 ‘마샤’의 감정에 촉감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이 은은한 빛이 점점 더 격렬해지는 원운동과 같은 움직임에 결합하자 정반대의 질감을 만들어내며 절망에 회귀하는 ‘마샤’의 내적 상태를 형상화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마샤’는 어지러운 세상의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지만, 개인으로서의 삶이 무너진 점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 그녀를 사랑과 안정이 회멸된 곳으로 당긴다. 그런데, ‘이야’는 공황 상태에 빠진 ‘마샤’에게 다가가 볼, 코, 그리고 입술에 반복해서 뽀뽀한다. 비록 ‘마샤’는 ‘이야’를 매몰차게 밀어내지만,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작품 속 촛불이 해내는 역할을 고려하자면 애도의 과정이 미약하게나마 진척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애도의 과정을 성급하게 진행하지 않는다. 



두 개의 명예훈장과 메달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지. 집에서 3일을 지내고 나흘째 되는 날, 다들 자고 있는데, 이른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우더라고. ‘딸아, 네 짐은 내가 싸놨다. 집에서 나가주렴 ∙∙∙∙∙∙ 제발 떠나 ∙∙∙∙∙∙ 너한텐 아직 어린 여동생이 둘이나 있잖아. 네 동생들을 누가 며느리로 데려가겠니? 네가 4년이나 전쟁터에서 남자들이랑 있었던 걸 온 마을이 다 아는데 ∙∙∙∙∙∙'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54쪽


다른 여성처럼 가정을 꾸려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던 ‘마샤’는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샤’의 소원대로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 ‘이야’는 슬픔에 잠겼지만, ‘마샤’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웃 아주머니에게 초록색 드레스를 빌려 가져다준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마샤’는 밝은 표정으로 ‘사샤’의 부모님에게 인사하지만, 그의 어머니 ‘페트로브나(크세니야 쿠테포바)’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어떻게 생활을 했었는지 등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페트로브나’는 ‘마샤’에게 결혼했냐고 물었으며, ‘마샤’는 남자와 같이 산 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대답을 듣자마자 ‘페트로브나’는 ‘마샤’를 위의 인용처럼 군대용 부인으로 여기며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보급품 지원 일을 하며 남자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상대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분명 사실이 아니지만, ‘마샤’는 거짓말로 맞장구를 친다. ‘마샤’는 본인의 대공포 사수로서의 삶을 숨기고 군대용 부인처럼 휴가도 가고, 빵도 사 먹고, 옷도 사는 등 나름 풍족하게 살며 안전하게 전쟁 시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이런 거짓말은 남성의 언어로만 기억되는 전쟁에서 파리목숨과 다름없는 여성의 작은 소망이자 전쟁에 참전한 남자들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전후 여성의 초상을 그려낸다. 따라서, 존중을 받지 못한 여성 군인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과 다름없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17~18쪽


가정을 꾸릴 수 없는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사샤’의 집에서 나온 ‘마샤’는 귀가하는 길에 키 큰 여성이 전차에 깔렸다는 긴급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마샤’는 ‘이야’가 매정한 자신 때문에 삶을 포기한 줄 알고 걱정이 되어 사고 현장으로 걸어간다. 근데, ‘이야’가 아닌 다른 여성임을 확인한 ‘마샤’는 바로 집으로 향한다. 두 인물의 관계는 일련의 사건들이 축적되면서 상당히 무너졌지만, ‘이야’가 ‘마샤’를 위해 초록색 드레스를 빌려 오고, ‘마샤’는 ‘이야’가 목숨을 끊은 줄 알고 걱정하는 모습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연장선을 끊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희미하게 남긴다. 특히, ‘이야’가 ‘마샤’에게 “내 속이 텅 비었어”라고 말하자, ‘마샤’가 ‘이야’에게 “너희 둘 곁에 있을 거야”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희미한 희망, 즉 연대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두 인물 사이에서 잉태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서로의 공허한 부분을 채우며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나-너 관계(Ich-Du)’를 이룬다면 실재성을 뛰어넘는 사랑과 평화를 낳을 수 있을 테다. 아울러 그 순간을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주요 소재인 촛불의 빛에서 영감을 받은 화면 속 조명과 함께한 점은 애도 의식의 마무리이자 연대의 시작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460


* 참고문헌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2015

2) 김승환,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촛불과 해골: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중심으로』, 2016, 1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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