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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Dec 01. 2020

연대를 희망할 수 있는가, <글로리아를 위하여>

'연대를 둘러싼 두 의견' 1부: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


현대사회에서 난민 문제, 혐오 문제, 노동자 문제 등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물론 개인이든 단체든 어디선가 목소리를 내거나 직접 행동하며 연대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한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서 다미엘(브루노 강쯔)이 천상에서 분단의 역사를 지닌 베를린으로 내려온다. 빔 벤더스 감독은 다미엘의 여정을 그려냄으로써 고통과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더라도 사랑과 연대감이 있으므로 여전히 살만하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렇지만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불행한 사람들은 그 기쁨조차 누릴 수 없다는 논지를 바탕으로 <베를린 천사의 시>와 대조되는 작품을 만들었다.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됐던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는 화려한 미장센과 인위적인 메타포를 배제하는 대신 굉장히 직설적인 어조로 현상(現狀)을 논하는 작품이다. <글로리아를 위하여>의 주요 배경은 프랑스 남부지방의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로 유명한 마르세유이다. 관광객에게 마르세유는 활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이겠지만, 1953년 12월에 이곳에서 출생한 로베르 게디기앙에게 마르세유는 자본주의적 비극의 굴레에 빠진 도시에 불과할 테다.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이 <트랜짓>(2018)에서 그려낸 마르세유의 풍경처럼,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미디어 플랫폼이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자기 고향의 실체를 카메라로 담아냈다. 소수를 제외하면 다들 언제나 죽음을 피해, 다시 죽음 속으로 도주 중인 암울한 도시의 풍경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마틸다(아나이스 드무스티에)와 니콜라스(로벵송 스테브넹)의 딸 글로리아가 태어난다. 그리고 실비(아리안 아스카리드), 리차드(장 피에르 다루생), 오로라(로라 네이마크), 브루노(그레고이레 레프린스 린구에트)가 이를 축복한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스테잉 버티컬>(2016)을 상기하면, 알랭 기로디 감독은 출산의 순간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현대사회에서 과연 생명의 탄생이 무조건 축복할 수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스테잉 버티컬>처럼 출산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글로리아를 제외한 인물들이 경험하는 자본주의적 비극을 연쇄적으로 포착하며 알랭 기로디 감독이 투척한 질문을 우회적으로 다시 끌어올린다. <글로리아를 위하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이 2019년 11월 프랑스 앵포(France Info)에 출연해 그를 강력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로베르 게디기앙은 마크롱의 정책이 대기업과 특정 계층에만 유리하고 노동자에게는 비우호적이기 때문에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사회 모델을 무너뜨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실비의 생활 패턴과 노동 환경에 투사된다.



실비는 밤에 출근해서 남편 리차드가 출근할 시간대에 퇴근한다. 그래서 그녀의 생활 방식은 남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딸 마틸다와 사위 니콜라스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격어 하루 종일 글로리아를 보살필 수 없자, 결국 실비는 아침에 취침하지 못한 채 손녀를 돌보게 된다. 게다가, 전남편 다니엘(제라드 메이란)이 출소한 이후 그를 만나러 낮에 바쁘게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실비의 피로가 급속도로 누적된다. 그렇다 보니 실비는 본인의 감정과 견해를 드러내기 힘든 상태에 빠진다. 특히 실비의 악화된 상태는 다른 노동자들과의 결속력을 약화한다. 실비의 직장 동료들은 현 정권의 고용과 임금 정책에 반발하여 노조 파업을 벌이는 중이고, 목소리를 더 크게 내고자 실비에게 파업에 동참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심신으로 지친 실비는 그들의 연대에 동참할 여력이 없을뿐더러, 파업에 동참하면 그녀는 나이 때문에 앞으로 돈을 벌 수 없다. 이렇게 정책의 문제가 분명하지만 개인의 문제 또한 명확해서 연대 행렬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결국 실비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노동자들도 그녀의 태도에 동조하며 결속력을 세게 뒤흔든다.



연대의 붕괴는 노동 현장 이외에 가족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우선 글로리아의 세례 이후 가족 구성원들이 다 같이 만나는 장면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여 무직자가 된 마틸다가 본인이 운영하는 상점의 2호점을 운영하는 권리를 갖고 싶어 하자, 브루노는 상황을 이용해 그녀가 옷을 벗고 몸을 팔도록 유도한다. 또한, 브루노의 아내 오로라는 상점에 물건을 팔러 온 여성을 협박해 그녀의 히잡을 벗긴다. 히잡이 이슬람 여성들의 머리와 상반신을 가리기 위해 쓰는 두건의 종류라는 점에서, 오로라의 행위는 경제적 우위를 기반으로 상대방을 나체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즉, 브루노와 오로라는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방의 수치심을 자극하고, 이는 비슷한 계층 내 관계성과 네트워크를 무너뜨리는 데 영향을 미친다. 로베르 게디기앙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니엘의 시선을 빌려서 노동자 계층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한다. 밤에 외출하던 중 다니엘은 거리에서 한 매춘부를 만나 호텔 방에 들어간다. 매춘부는 자기가 그리는 미래가 옳은지 그른지를 인지하지 못한 채 다니엘의 앞에서 순순히 몸을 드러낸다. 이때 다니엘은 자신이 감옥에 간 탓에 돈을 벌고자 어린 마틸다를 두고 다른 남자들을 상대로 매춘했던 실비의 과거를 상기한다. 그리고 다니엘은 실비의 역사가 다른 여성의 역사로 이어지며 사회적 약자의 비극적인 운명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관망한다. 심지어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브루노와 마틸다의 불륜을 계속 보여주며 이 비극이 가족 내에서도 전파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후반부에 실비의 가족에게 대단히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다. 모두 당황할 때 다니엘은 본인이 희생할 테니 사건의 전말을 덮자고 한다. 2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간 다니엘은 시를 쓰고 읊으며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고 기억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가족에게 다시 한번 비극이 발생했고, 다니엘은 가족의 영역 안에 영원히 머물뿐더러 미래 세대를 대표하는 글로리아를 위해 자기희생을 택했다. 그렇게 다니엘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다미엘처럼 천사의 임무를 마쳤다. 다만 다미엘과 달리 다니엘은 감옥으로 돌아갔고, 카메라로 유리창을 응시하는 다니엘의 리액션 숏을 포착한다. 이 순간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은 관객에게 ‘과연 연대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희생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기성세대가 비극의 사슬을 끊어 글로리아의 세대에게 희망을 줄 힘이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다니엘의 리액션 숏은 단순히 유리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을 쳐다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관객을 쳐다보는 거라면, 다니엘은 관객들에게 노동자 계층의 비극적인 역사를 끊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겠냐고, 그리고 글로리아의 세대를 위해 과감하게 희생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지는 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크린 밖의 침묵과 스크린 안 다니엘의 맥없는 표정이 결합하며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아마도 연대의 희망 가능성을 향한 로베르 게디기앙의 답변일 테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985


* '연대를 둘러싼 두 의견' 2부 - <안티고네>(2019): https://brunch.co.kr/@moviemon9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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