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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Dec 01. 2020

연대의 힘을 그래도 믿는다, <안티고네>(2019)

'연대를 둘러싼 두 의견' 2부: <안티고네> (2019)


눈이 멀게 된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나자 안티고네는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고자 방랑길을 동행한다. 그 사이 쌍둥이 형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가 둘 다 사망한다. 숙부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게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망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만, 폴리네이케스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그의 시체를 초라하게 놔둔다. 테베로 돌아온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모래를 뿌려 장례 의식을 행한다. 왜냐하면 가족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신들이 부여한 의무인 동시에 안티고네에게는 어떤 경우든 지켜야 하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크레온은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안티고네에게 굉장히 분개하여 그녀를 생매장하듯이 감금한다. 안티고네의 약혼자 하이몬이 크레온을 말리려고 해도, 그리고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경고해도 크레온은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아사(餓死)하게 놔두려고 한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신념을 수호하고자 자살을 택한다. 그녀의 죽음에 하이몬도 뒤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충격을 받아 자살한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는 사회 규범과 신념, 도덕과 윤리, 혹은 지상법과 자연법 사이에서 일어난 안티고네의 희생과 비극을 그려냄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월드 시네마 섹션에 초청됐던 영화 <안티고네>(2019)는 이 희곡을 골자로 한 작품이다. 희곡을 감명 깊게 읽은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2008년 경찰의 부적절한 개입으로 몬트리올 소재 공원에서 총살을 당해 사망한 ‘프레디 발라누에바의 사건’을 접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건 때문에 프레디 발라누에바의 형제가 캐나다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빠졌고, 여동생이 오빠의 추방을 막기 위해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그런 여동생에게서 안티고네의 모습을 떠올렸고, 이는 <안티고네>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갓난아기 때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는 알제리 내전으로 부모를 잃었고, 그 후 할머니 메노이케우스(라치다 오사사다), 큰오빠 에테오클레스(하킴 브라히미), 작은오빠 폴리네이케스(라와드 엘-제인), 그리고 언니 이스메네(누르 벨키리아)과 함께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영화 초반부에 함께 식사하고, 어깨동무하며 춤을 추는 등 안티고네의 가족은 캐나다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원에서 범죄 조직원들과 놀고 있던 폴리네이케스는 갑자기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 상황에 대해 항의하던 에테오클레스는 경찰의 오해 때문에 사살된다. 설상가상으로 폴리네이케스는 전과가 있으므로 알제리로 추방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알제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므로 안티고네는 오빠를 감옥에서 빼내고, 본인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에테오클레스가 폴리네이케스를 위해 목소리를 내다가 세상을 떠났듯이, 안티고네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폴리네이케스를 살리고자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물론 안티고네에게 자신의 희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왜냐하면 사랑했던 큰오빠 에테오클레스가 지역 사회의 축구 영웅이 아니라 작은오빠와 같은 범죄 조직에서 활동 중인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알자 좌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배려를 받지 못할뿐더러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무시를 받았던 어린 시절 폴리네이케스의 상처와 눈물을 떠올리며, 안티고네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오빠를 살리는 희생이 유의(有意)하다고 믿는다. 신념을 흔들려는 공권력과 이에 저항하는 안티고네 간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그녀의 국선 변호사가 선전전을 펼쳐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자 설득한다. 안티고네는 변호사의 제안을 수긍한다.



소피 데라스페 감독은 코러스의 개념을 현대화해 <안티고네>의 선전전을 그려낸다. 희곡에서 코러스는 테베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거나 심경을 전달한다. <안티고네>의 코러스는 소셜 미디어를 활발히 이용하는 사람들과 안티고네의 주변 인물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함께 춤을 추거나 그라피티(graffiti) 운동을 전개해 안티고네의 신념을 지지한다. 게다가, 안티고네와 같은 소년원에서 지내는 청소년들은 그녀가 독방에 갇혔을 때 단식 투쟁을 펼치고, 그녀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염색함으로써 연대에 동참한다. 특히 <안티고네>의 SNS 선전전은 와드 알-카팁과 에드워드 와츠의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필름 <사마에게>(2019)를 연상시킨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연관 국가는 현상(現狀)이 언론에 노출되는 일을 최대한 통제했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드론, 스마트폰 등 각종 기기를 활용해 시리아 내전의 현장을 촬영하고, 본인에게 유리한 이미지와 영상을 골라 SNS에 게시했다. 심지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서구권 미디어에 접촉해 이미지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더 나아가 서구권 미디어는 상황을 피상적으로 다루며 사건의 본질을 망각했다. 이에 와드 알-카팁 감독도 마찬가지로 드론, 스마트폰 등 여러 기기를 갖추고 최전선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며 날마다 기록한다. 와드 알-카팁 감독이 완성한 저널리즘 다큐멘터리는 편향적인 전쟁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상황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함께 맞서 싸워달라는 연대를 호소한다. <안티고네>에서 공권력은 몬트리올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로지 경찰관들의 중대한 실수를 은폐하고, 폴리네이케스의 전과, 죽은 에테오클레스의 범죄, 그리고 안티고네 가족의 과거사를 언론에 의도적으로 부각함으로써 여론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지지자들은 그녀를 헌정하는 영상 클립과 음악을 만들어 온라인에 업로드할뿐더러 오프라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연대 행렬을 계속한다. 덕분에 안티고네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하게도 폴리네이케스가 미국으로 이동하지 않고 몬트리올 소재 술집에 머무르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안티고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티고네는 절규하고 결국 슬픔에 잠긴 채 꿈을 꾼다. 그녀의 꿈에 심리 상담가가 등장한다. 심리 상담가는 희곡 속 테이레시아스를 재해석한 인물로, 그녀는 지상법과 자연법 사이에 갇힌 안티고네의 상황을 콕 집어 진단하고, 가족과 자유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라진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폴리네이케스를 따라 알제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선택의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남자친구 하이몬(앙투안느 데로쉬에)의 아버지 크리스티앙(폴 듀셋)이 안티고네의 후견인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안티고네는 심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하이몬과 함께 둘이 처음 만났던 숲에 간다. 숲에는 영화 초반부 안티고네가 읽었던 시처럼 아름다운 꽃이 피었으며, 안티고네는 그곳에서 하이몬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표면상 해당 장면은 아름답지만, 이때 레반 아킨 감독의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2019)를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에서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와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장면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롱테이크 기법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자위를 돕는 상황을 촬영한 장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두 사람이 섹스하는 장면이다. 근데, 두 사람의 섹스 장면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하는 대신에 난도질하듯이 숏들을 이어 붙여 완성되었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뜨거울 수 있으나 결국 끊어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안티고네와 하이몬의 섹스 장면도 숏과 숏 간의 연속성이 결여되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유추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안티고네가 초반부에 읊었던 시도 염세주의적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녀의 선택을 암시하는 일종의 플래시포워드였을 테다.



Ah! ce n’est pas la peine de vivre
(아, 살아본들 무엇하리)

Et de survivre aux fleurs
(꽃보다 오래 살아본들)

Et de survivre au feu, des cendres
(불보다 재보다 더 오래 살아본들)

Mais il vaudrait si mieux qu’on meure
(가슴 속에 꽃을 담고)

Avec la fleur dans le Coeur
(죽는 것이 나으리니)

- Hector de SAINT-DENYS GARNEAU -


후반부에 안티고네는 할머니와 폴리네이케스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공항 안을 이동한다. 이 순간 어디선가 안티고네와의 연대를 상징하는 휴대전화 벨 소리가 흘러나오고, 안티고네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안티고네의 정면 응시와 그녀가 입은 빨간 스웨터는 한 프레임 안에 맞물리며 <안티고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형성한다. 비록 안티고네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자가 있으므로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이다. 정리하자면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의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가 ‘연대의 힘을 믿을 수 있겠는가?’에 관한 작품이라면,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는 ‘연대의 힘을 그래도 믿는다!’에 관한 작품이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986


* '연대를 둘러싼 두 의견' 1부 - <글로리아를 위하여>(2019): https://brunch.co.kr/@moviemon9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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