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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Dec 27. 2020

<당나귀 발타자르>와 <토리노의 말>

'2020~2021, 어제와의 작별' 기획전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올해의 마지막 프로그램이자 2021년의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2020~2021, 어제와의 작별’이라는 기획전을 준비했다. 이번 기획전에 상영하는 8편의 작품 중에 하나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이다. 비록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2011)은 상영작 목록에 없었지만, 두 작품이 ‘구원’을 테마로 비슷한 포지션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당나귀 발타자르>와 <토리노의 말>을 한번 병렬적으로 정리해 봤다.



1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는 인간의 위선을 순수하게 그리고 숨김없이 꺼낸다. 이때 순수는 복잡한 테크닉이나 화려한 미장센 없이도 숏을 완성한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거의 모든 숏에서 당나귀 발타자르의 시선을 빌려서 동물들에게 노동을 착취하거나 가학적 행위를 일삼는 인간을 관찰한다. 또한 당나귀 발타자르가 고난을 겪으면,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이 마리(안느 비아젬스키)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 마리는 자신의 답답하고 초라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죄의식이 없는 제라르(프랑수아 라파르지)에게 마음을 준다. 그러나 제라르에게 마리는 효용 가치로 평가받는 대상에 불과하였다. 제라르는 마리를 팽개칠뿐더러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발가벗기고 추행한다. 충격에 빠진 마리는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결국 추후 숏에 등장하지 않는다. 당나귀 발타자르도 마찬가지로 제라르 때문에 총상을 입었고, 자기가 태어났던 언덕에서 쓸쓸히 죽어간다. 지나가던 양 떼들에 둘러싸였지만 일시적이었다. 이와 같은 일시성은 구원에 관한 낙관론을 냉소하는 태도이자 인간의 위선을 포착하는 행위의 연장선일 테다.


2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2011)은 마부(야노스 데르즈시)와 그의 딸(에리카 보크)의 일상을 6일에 걸쳐 담아낸다. 마부와 딸은 원래 가난했지만, 집시의 저주 이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자 그들의 삶은 죽음에 점점 가까워진다. 어떻게 보면 <토리노의 말>은 <트리 오브 라이프>(2011), <히든 라이프>(2019) 등 생명(生命)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작품과 정반대에 서 있다. <토리노의 말>은 안티 바이블로 구원 자체를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 벨라 타르 감독은 믿음의 노력, 의지, 훈련, 그리고 경험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종교적 사고를 부정한다. 그는 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애최 존재하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벨라 타르 감독은 종교적 숭고미를 반박하고자 카메라의 수직적인 움직임을 지양하고, 수평적인 롱테이크를 고집하였다. 아울러 35mm 필름 작업을 고수하면서 슬로 템포로 촬영 카메라를 움직이고, 창문과 문틀 등을 활용한 이중 프레임으로 이미지를 완성한다. 이미지들은 종교적인 믿음과 기대에 관한 메타포가 영화에 개입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에 덧붙여 집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마부와 딸의 실패를 통해 도망칠 곳이 아예 없는 종말에 관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영화 정보]

1.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

https://www.imdb.com/title/tt0060138/?ref_=nv_sr_srsg_4


2.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A torinói ló, 2011)

https://www.imdb.com/title/tt1316540/?ref_=ttspec_spec_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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