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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Mar 19. 2018

시대와 맞물리는 개인의 삶 <셜리에 관한 모든 것>

에드워드 호퍼와 에밀리 디킨슨이 만나다


'Hotel Room (1931)'부터 시작해서 'Chair Car (1965)'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3점이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손길을 거쳐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을 통해 20세기 미국인의 삶의 단면을 그려낸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무심한 방식으로 삶의 단면에서 내면의 고독 혹은 단절감을 포착했다. 특히, 공간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형성하는 분위기는 현실의 환영 때문에 가려진 인간의 내면을 관찰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기차 안에서 셜리(스테파니 커밍)가 읽고 있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도 내면의 어두운 구석을 탐구하는 동시에 현실이라는 시공간에 갇힌 내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갖고 있는 주제 의식과 관련이 있다. 결국,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한 여성을 시대상과 분리시키지 않고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내면의 변화를 중심으로 그려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시대와 맞물리는 개인의 삶


영화는 셜리의 나지막한 독백으로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히 관조적인 자세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각 에피소드가 시작하기 전 라디오 뉴스를 통해 그 당시 미국 사회의 이슈가 관조적인 자세와 함께 전달된다. 경제 공황, 제2차 세계 대전, 매카시즘, 인종 차별 문제, 쿠바의 미국 출판물 검열 문제 등을 통해 불안한 시대적 정서를 엿볼 수 있으면서도 셜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고독감과 단절감이 시대의 흐름과 밀착되어 있음을 포착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미국 여성들은 참정권을 획득한 이후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 여성 해방 운동은 잠재기를 맞이함으로써 미국 여성들은 다시 사회의 부조리함에 당하고 소외감을 느끼는데, 셜리가 '그룹 씨어터' 일을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스테판(크리스토프 배치)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제활동과 가사노동의 악순환이 대표적인 그 예다. 셜리는 라디오를 즐겨 듣고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등 예술 분야에 엄청난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진작가인 스테판의 모델이 되면서 나를 위한 삶보다 그를 위한 삶을 살고 그의 상상 속 여인이 돼버린다. 게다가, '그룹 씨어터'가 각종 사회 이슈들과 얽히면서 서로를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자신이 준비한 연극 공연이 무산되었고 셜리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특히, 영화는 그런 내면의 고독감과 상실감을 묘사하기 위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표현 방법을 택했다.



1963년 8월 29일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특이한 점은 13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12개의 에피소드의 날짜가 해만 달라질 뿐 '8월 28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8월 28일은 계속 돌아오는데 셜리의 삶은 점차 피폐해진다. 영화를 좋아해서 관객이 두 명 밖에 오지 않은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좌석 안내원 업무에 만족하고, 공연 준비를 위해 열심히 대본을 외운다. 하지만, 셜리의 바람과 달리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셜리는 여전히 스테판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관계가 예전과 달리 소원해지면서 외로움에 사무친다. 이때, 셜리가 더 이상 몸을 웅크리지 않고 기지개를 켜겠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순간이 온다. 방에서 셜리가 읽고 있던 책은 플라톤의 '국가론'이었다. '국가론'에서 동굴 우화에 주목해야 하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동굴 안에서 손발이 묶여 앞에 존재하는 것만 인식할 수 있는 죄수들은 오로지 앞에 보이는 그림자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현실은 경험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실재라고 볼 수 없다.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할 때 고독감 혹은 단절감이 발생하고, 셜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른 뒤 1963년 8월 29일, 셜리는 동굴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그리고 그만뒀던 배우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며 익숙했던 장소를 떠난다. 이때, 셜리가 들고 있는 라디오 너머로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연설이 들린다. 더 이상 차별이 아닌 평등을 원하는 마틴 루터 킹처럼 셜리는 더 이상 사회와 남성에 순응하지 않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림자로 셜리를 사각형의 틀 안에 가뒀던 빛은 그녀가 떠난 빈 방을 채운다.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의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제2의 인생을 위해 익숙한 곳을 떠난 설리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 1960년대는 미국의 여성 해방 운동은 잠재기에서 깨어나 제2기 여성 해방 운동으로 접어든다. 제1기와 달리 제2기 여성 해방 운동이 실천적인 측면에서 발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셜리도 자기 꿈을 이루면서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갔을 거라고 믿는다.  



영화 상영 전 도슨트를 진행한 이선경 콘텐츠 기획자는 최영미 시인이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 속의 여인 (A Woman in the Sun, 1961)'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며 마무리지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최영미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각자의 감상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최영미 시인의 '햇빛 속의 여인'을 소개하면서 이 리뷰를 끝맺으려고 한다.



햇빛 속의 여인


최영미


가끔씩 나는 그 방에 간다

밤새 나를 지우고 비워 낸 뒤

날카로운 아침 햇살에 묶여

차마 일어날 용기가 없어

눈을 감는다


마지막 그날까지 이 고장 난 기계를 끌고

밥을 먹이고 머리를 감기고

지겨운 양치질을 몇 번 더 해야 하나?

이를 닦다가 길을 걷다가도 문득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 방을 그려본다

끊어진 손목 피멍 든 손으로

문을 두드린다

당신 너무 빨리 왔군


언제든지 원할 때 떠날 수 있다는 게

네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지


묘비명을 다시 고쳐 쓰고

충분히 지루했던 40년 생애 동안 나를 속였던

구겨진 몸을 담았던 껍질을 벗으면

도시의 공허가 칼처럼 내리 꽂히는 방


자신의 그림자에 갇힌

여자의 두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 빛의 사각형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을까?



* 원본: http://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6318


* 관람 인증

1. 2018.03.13 (아트나인 GET9 - 스크린 속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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