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2.
어둠 속 사내. 그는 은밀하게 범죄를 준비하고 있다. 어둠 속 건물들 사이로 범인은 미끄러져 사라진다. 영화의 첫 5분은 프리츠 랑의 <M>이나 캐럴 리드의 <제3의 사나이>가 연상될 정도로 미국 누아르 영화의 형식과 매우 닮아있다. 배우의 얼굴만 서양인으로 바뀌었다면 일본 영화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오즈 야스지로 본인이 좋아하는 장르에 대한 오마주로 이런 선택을 한 것일 수 있지만, 영화의 주무대인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한다. 그전까지는 수직적인 구도로 사내를 압도하는 도시의 이미지, 클로즈업되는 손, 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패닝 등 감정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누아르물의 분위기가 갑자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침대 위 소녀. 소녀는 지금 매우 아프다. 오늘 밤을 잘 넘겨야만 건강해질 수 있고, 그렇지 못한다면 죽게 될 것이다. 위의 사내는 사실 아픈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 돈을 턴 것인데, 그는 아이가 위독하다는 걸 듣고 집으로 가게 된다. 사실 일반적인 누아르 영화였다면 사내는 아이의 소식을 듣고 더 큰 한탕을 하거나 자신이 훔친 돈을 걸리지 않기 위해 경찰로부터 도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의 아이가 걱정되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자신이 잡힐 확률이 매우 커짐과 동시에 가족까지 공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 지점에서 <그 날 밤의 아내>는 선배영화들과 달라진다. 아내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한지 알게 되고, 둘은 이 가족의 미래를 근심한다. 이때 남편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아내는 그의 옆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윽고 둘은 자신의 아픈 아이를 쳐다본다. 카메라는 쳐다보는 둘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지 않고 오직 이 둘의 모습만 길게 비춘다. 거의 100년도 지난 영화지만 그 어떤 신파극보다 슬프되 전혀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장면이다. 정확히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차가운 누아르물에서 아이를 걱정하는 부부의 드라마로 변한다.
택시 속 형사. 사실 남편이 집으로 타고 온 택시의 기사는 잠복근무 중인 형사였다. 남편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 형사는 이윽고 그의 집으로 따라간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남편은 숨고 아내는 형사를 맞이한다. 온갖 변명을 하지만 결국 꼬리가 잡히는 그들. 아내는 형사의 등에 총을 겨누고 그를 무력화시킨다. 일반 누아르 영화였다면 부부는 형사를 죽이거나 묶어두고 도주를 했겠지만 이들은 의아한 선택을 한다. 형사에게 총을 겨누며 딸이 위급한 이 밤만 버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며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자수하겠다고 한다. 형사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이 넷은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을 나게 된다.
권총을 든 아내. 형사에게 총을 겨누며 앉아있던 그녀는 하필 졸게 되고 다시 일어난 사이에 형사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총을 뺏어간 걸 알게 된다.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였다면 이미 그 빼앗기는 순간이 극적으로 제시되거나 그 형사가 아내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 봐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사는 별 대가를 원하는 거 없이 그저 아내가 깰 때까지 기다린다.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의 가운데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독특한 샷을 추가한다. 총을 들고 잠과 씨름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빨랫줄에 걸린 옷들을 따라 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하고 그 끝에 있는 창문을 넘어 한 우유배달부가 우유를 배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카메라는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빨랫줄을 따라 패닝 하고 이번엔 잠에 굴복해 버린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냥 편집으로 졸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잠이 든 아내의 모습으로 변환할 수 있는데, 이런 비경제적인 샷을 추가하여 오히려 이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1화에서 말했던 "작중 세계에 녹아든 영화의 요소"가 이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그래도 다행히 형사는 딸의 진료를 기다려준다.
잠이 든 형사. 아뿔싸! 형사는 가족을 기다려주다가 잠이 든다. 아내는 남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한다. 남편은 그렇게 도주를 시작하고 아내는 안심을 했지만 알고 보니 형사는 잠이 든 척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형사는 이 불쌍한 가족을 보고 눈을 감아주기로 한다. 그렇게 문을 나가는 그 앞에 남편이 서있다. 그는 가족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기 위해 자수를 하기로 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의 반전이 관객들의 멱살을 쥐었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그렇게 남편과 형사는 경찰서로 향한다.
정석적인 누아르물에서 시작해서 요상한 드라마로 끝나는 이 영화는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이 시큰둥하게 시작해서 알 수 없는 뭉클한 감동으로 끝나게 하는, 요상하다는 말 말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을 남게 한다. 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남편은 남은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든다. 이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이내 형사도 옆에서 손을 흔든다. 장면만 보면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엉뚱한 장면이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을 감동이 이 장면에서 느껴진다. 마치 이 영화의 설정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관객들에게 설파하고 싶은 따스한 휴머니즘을 영화 속 배역이 아닌 실제 배우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팀이 우리에게 보내는 인사랄까.
영화의 엔딩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남편이 형사에게 잡혀 경찰서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 카메라는 이 둘의 뒷모습을 잡으며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찍는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이 장면은 비극적인 새드엔딩일테지만, 우리는 왠지 모르게 이 장면에서 요상한 희망을 느끼게 된다. 아내는 이제 홀로 남았고, 아이를 키워야 하지만 이 가족에게는, 아니 이 세계 전체에는 작지만 강한 희망 하나가 피었다. 가로등의 불빛은 낮이 되어 꺼졌지만, 그보다 훨씬 큰 햇빛이 따스하게 이 사람들을 비춰준다.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 미묘한 감정선이 정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게 만든다. 아직 오즈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미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