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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Mar 27. 2021

민기는 왜 아내를 죽였나?

영화 <해피 엔드(1999)>

*영화 <해피 엔드>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90년대에 태어났지만, 워낙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어딘가 어렴풋하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감성이 있다. 옛날식 건물의 복도형 구조, 옛날 엘리베이터 특유의 네모 사각진 투박한 버튼들, 단종된 자동차, 지금은 낡아서 바꿨거나 닳아버린 상태로 여전히 쓰고 있는 가죽 소파의 새것 같은 모습들... 세기말적 감성이 뜻 모를 향수를 유발하는 '해피 엔드'는 나의 마음을 끌어내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말은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다. 은행에서 일하던 40대 가장 '서민기'도 실업을 한 상태로 매우 위축되어 등장하고, 필자가 기억하는 당시의 우리 집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사업이 망하고, 심지어 그 웅장하던 대기업들까지 줄지어 파산하는 모습은 국가적 비극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암흑 같은 시기를 이겨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고생 끝에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리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민기는 당시의 험난한 세상에서 직장을 새로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서점에서 로맨스 책을 고르고 공원에서 마음 놓고 독서를 하는 모습은 태평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한 상황의 열쇠는 부인 '최보라'에게 있었다. 원어민 강사를 두 명이나 둘 정도로 잘 나가는 영어학원 원장인 최보라의 경제력이 이를 뒷받침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가치관은 아직 돈 버는 아내와 살림하는 남편의 모습을 받아들이기엔 무리였던 탓일까? 둘은 민기의 구직 문제에 관해 갈등을 겪게 된다. 도무지 일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민기를 보라는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일까, 보라는 옛 연인 일범과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영화는 얼핏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보라를 벌하는 선악의 구조로 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민기는 오로지 피해자로서 무결점 한 사람인가? 민기가 영어학원에서 보라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그의 숨은 본성이 드러난다. 보라가 민기의 운전실력을 칭찬하며 "택시기사 해도 잘하겠다."라고 은근히 그의 속을 긁자 급브레이크를 밟은 민기의 차가 행인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선다.


라이닝 언제 갈았니? 여자들은 브레이크 많이 밟으니까 빨리 나가

 화가 난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브레이크 라이닝을 교체하라고 말하는 민기의 모습은 자신을 무시하는 보라에게 경고를 전함과 동시에, 멈출 수 없는 정욕에 휩싸인 그녀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민기의 분노가 내재되어 있는 이 장면은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복수의 결말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초반에는 서점에서 로맨스 소설을 찾던 민기가 관심도 없던 스릴러 장르를 찾게 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선 호불호가 명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보라가 살해당한 것이 통쾌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화 자체가 여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못한다. 보라가 남편을 배신하고 아이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것은 맞지만 살인이 정당화될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다. 민기는 어느 정도 가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나 아내의 뒤꽁무니만 열심히 캘 뿐, 불화를 방치하고 이를 해결할 적극적인 자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불륜의 정황을 파악한 순간에 대화를 시도하거나, 하다못해 이혼을 요구했을 것이다. 화장대에 바람피운 증거 사진을 붙여놓음으로써 아내에게 경고를 보내는 사이코 짓은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2003년에 일어난 한 40대 가장의 자살 소동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내를 칼로 찌르고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려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그 남자는 자신의 사업이 망하고 가정의 불화가 생긴 것을 사회의 탓으로 돌렸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고..." 남자가 떨어지기 전에 남겼던 이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이 사건은 해피 엔드가 시사하는 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누구도 자살소동 사건에서 자신의 아내를 칼로 찌른 남자를 옹호하지 않는 것처럼, 필자는 모든 일의 책임을 외적 요인으로 돌리는 민기의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의 노력이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전혀 없었을까? 그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유일한 일은 살인뿐이었고, 이는 몹시 잘못된 문제 해결 방법임에 틀림없다.




 한가한 오후 시간에 아이와 낮잠을 자다 깬 민기가 멍하니 앉아 있고,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이 모든 게 소심하고 책을 좋아하는 민기의 상상일 뿐이었을까? 영화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은 채, "Happy End."라는 글자가 떠오르며 막을 내린다. 모든 게 상상이었고, 실제로 살인을 일어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결말이란 뜻일까? 그게 아니라면 죄지은 음탕한 여자를 칼로 벌하였으니 그것이 좋은 결말이라는 것인가.

 필자는 모든 걸 묵인하며 살아가기로 한 첫 번째 결말과 극단적인 선택을 한 두 번째 결말 모두 해피 엔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영화의 제목인 해피 엔드는 상당히 반어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IMF 이후로 코로나라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요즘, 한국에선 많은 혐오 관련 이슈들이 생겨나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줄 파산하고 기업들마저 휘청거리는 요즘 시기는 많은 부분에서 IMF 위기와 비교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취약해지고 공격의 대상을 찾고자 하며 혐오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갈등이 조장되고 확장되는 이런 '대 혐오의 시대'에 서로가 서로에게 끼치는 피해가 중첩되면 중첩될수록 해피 엔드에서 민기가 보여줬던, 혹은 보여줄 뻔한 참혹한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된다.

 

 만들어진 지 어느덧 20년이 지난 '해피 엔드'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과연 민기와 보라 중 누구의 죄가 더 위중한가를 따지는 게 이 영화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 바이러스의 위험성이 아무리 커 보여도,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이나 범죄로 인간이 인간을 죽인 숫자에 비하면 그 규모는 상당히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바탕이 되는 '혐오'야 말로, 어찌 보면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이자 참혹한 결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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