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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May 18. 2021

취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영화 <강변호텔(2018)>

 *영화 <강변호텔>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강변호텔>을 이제야 봤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의 영화를 다 본 후, 필자는 잠시 걸으러 밖을 나섰다. 영화를 본 영향이었을까? 분명 집 근처 공원을 걷고 있을 뿐인데, 불쑥 찾아온 초여름의 밤공기가 진한 풀내음과 함께 어우러지며 마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영화를 보면서 마셨던 와인의 싱그러운 잔향이 코 끝에 남았던 건지도 모른다. 홍상수 영화엔 술이 필수니까.


 필자는 영화를 보면 집중해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 장면 한 장면, 내가 놓치는 것은 없는지 혹시라도 결말부에 이르렀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까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는 공부할 때도 잘 안 쓰는 안경을 꺼내고 최대한 맨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선 오히려 제정신이 몰입을 방해한다. 극 중 상황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시도해 봤지만, 마치 일자 나사에 십자드라이버를 욱여넣는 듯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홍상수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엔 음주 장면이 등장한다. 배우들이 마치 진짜 술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술판에 앉아 마치 대본이 아닌 실제 넋두리를 하는 듯한 롱테이크 장면을 볼 때마다 필자는 음주를 권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이해를 포기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소주를 한 병 꺼내 잔을 기울이며 영화를 다시 틀면, 그제야 상황으로 몰입이 가능해진다.

아들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영환




 영화에서 시인 '영환'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옆 테이블에는 '희'와 '연주'식사를 하고 있는데, 두 팀은 한 장소에 있으면서도 결코 한 프레임에 잡히는 부분이 없고, 심지어 한쪽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 반대쪽의 소리는 완전히 음소거되어 마치 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진다. 아들들이 먼저 호텔로 돌아간 후, 홀로 남은 영환이 상희에 테이블에 합석하면서 두 집단이 서로 같은 공간에 있었음이 비로소 명확해진다.


 도대체 영환은 그 둘에게 무엇이 그렇게 고마웠을까? 연신 감사의 고개를 숙이며, 마치 죽기로 결심한 사람인 양 상희가 따라주는 소주를 연거푸 마신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모습이지만, 상희는 그에게 위로를 전하듯 말없이 술을 따른다. 한껏 취한 영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나긴 산문시를 읊는다. 어딘가 어색한 그 장면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색한 술자리와 장황한 시의 내용... 이야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간 영환은 뜻 모를 죽음을 맞이한다. 술을 마신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간 두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것이다. 영환은 우연히 이끌리듯 호텔에서 지내게 되었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두 아들을 호텔로 불렀다.

 영환은 아들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리지만,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좀처럼 마주치지 못한다. 그러다 영환은 하얀 눈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희와 연주를 마주하곤, 침이 마르게 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흑백 영화는 많은 색을 담을 수는 없지만, 순백의 하얀 눈만큼은 아무런 왜곡 없이 전달된다. 우연히 상희와 연주를 눈밭에서 마주친 영환은 그녀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양 반겼다. 공교롭게도 두 여인을 술집에서 다시 마주한 날 밤, 영환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인과 죽은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마지막이었으라고 가늠이 되었다. 여인들 앞에서 시를 읊는 그의 모습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보였으니까.

상희가 따라주는 술을 받는 영환




 영화를 분석하며 보는 것이 싫증 날 때, 홍상수, 장률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어떤 영화들은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최악의 영화는 이해가 안 되는 영화가 아니라 억지로 이해시키려, 혹은 가르치려 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꼭 교훈을 얻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는 잠들기 위한 자장가로 영화를 틀어놓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혼술 하기 적적할 때 대화 상대 삼아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변호텔>은 좋은 술친구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세상에 외로운 사람이 나뿐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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