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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Nov 08. 2021

내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영화 <블루 재스민(2013)>

*영화 <블루 재스민>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란 자고로 마음 놓고 보는 게 가장 좋다. 심각한 소재를 다루거나 지나치게 복잡한 영화가 인기가 없는 이유는, 누구도 푹신한 극장 의자에 앉아 심려를 끼치면서 까지 취미 활동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최악은 가르치려 드는 영화다. 억지로 특정한 교훈이나 아이디어를 이식하려는 영화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싫다. 필자는 그래서 홍상수나 장률,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 세 분의 공통점이라면 작품에 교화적인 메시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다 보면 마치 연륜 있는 노교수의 교양 강의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교수님은 필기를 강요하는 법이 없고, 심지어 학생들이 지각하거나 졸아도 화내는 일이 없다. 가끔은 인생 경험담을 잔잔하게 섞어가며 진행되는 강의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재스민'은 초 상류층의 삶을 살던 여자다. 그녀의 남편은 초호화 주택을 소유한 사업가로 재산을 불릴 줄 아는 대담한 투자자로 그려진다. 둘 사이에 있는 아들은 하버드 재학생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고 새엄마인 재스민도 잘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재스민이 그녀의 동생인 ‘진저’의 집으로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재스민은 잠시 동생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닌 당분간 신세를 지러 그곳에 방문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던 재스민이 어째서 남루한 그녀의 동생 집으로 오게 된 걸까.


 이야기는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았던 ‘투 다이 포’도 이런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관객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생각보다 꽤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 뭐 아무튼, 비행기에서 내린 재스민은 엄마 뻘로 보이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하물을 찾으러 가는데, 성생활부터 시작해서 본인의 가족 내력, 복용하는 우울증 약의 이름까지 못 하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일행으로 보이던 여자는 자신의 캐리어를 찾자마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알고 보니 둘은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고, 재스민은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친해 보이는 둘은 사실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재스민은 갈 곳이 없어 진저의 집으로 찾아왔다. 남편이 사기죄로 수감되고 모든 자산은 압류당했기 때문이다. 남편 덕에 단숨에 몰락해버린 그녀는 진저에게 신세를 지면서도 동생에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단순 노동을 하는 직업에 소소한 집, 변변찮은 남자를 만나는 그녀의 삶이 가엾고 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놓고 드러내는 업신여김에도 진저는 딱히 불평하지 않는다. 언니와 자신은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며 언뜻 패배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언니가 자신의 남자 친구인 칠리를 ‘루저’라 불러도 그저 참을 뿐이었다.

 그런데, 늘 당하기만 하던 진저가 드디어 반항을 시도한다. 재스민의 권유로 갔던 파티에서 만났던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와 만나며 칠리를 매몰차게 치워냈던 진저는 결국 다시 칠리와 재결합을 하고, 이를 기념하던 자리에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업신여기는 재스민에게 참아왔던 화를 폭발시킨다. 그녀는 그녀의 언니에게 단호하게 집을 나가라고 말한다.


 재스민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지고, 매력과 재력을 겸비한 남자의 환심을 얻기 위해 거짓말까지 치는 막장적인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녀도 피해자가 아닐까? 그녀의 남편 ‘할’은 사기죄로 감옥에 수감됐었고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리스크가 큰 투자에 진저의 전남편까지 연루시켜 어렵게 모은 재산까지 날리게 했다. 게다가 할이 최소 4명이 넘는 여인들과 바람을 피우던 사실까지 드러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재스민은 신경 쇠약에 걸려버렸다. 재스민의 행동은 고깝지 않지만 어떻게 일방적으로 그녀를 미워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마주친 그녀의 아들에 의해 그녀는 관객이 부여한 알량한 면죄부 마저 잃게 된다. 아들은 한동안 어머니와 연락을 아예 끊고 지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알고 보니 할의 외도 사실을 알고 충격받은 재스민이 직접 FBI에 연락해 자신의 남편을 고발했던 것이다. 그녀의 망해버린 인생의 귀책사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빼앗고 하버드를 자퇴하게 만들었다. 할을 믿고 투자했던 진저의 전 남편 ‘오기’는 전 재산을 잃었다. 그러고도 그녀는 진저를 찾아가 그녀의 인생이 엉망이라며 불평하고 지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우디 앨런 영화의 매력이 여기서 드러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누가 선역이고 빌런인지 필연적으로 찾게 된다. 하지만 블루 재스민에선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왜냐하면 가족의 몰락에 결정적인 귀책사유는 재스민에게 있을지라도, 할의 사업에 불법적인 요소가 없었다면 그에게 유죄가 선고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부자들이 오로지 합법하고 도덕적인 방법 만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걸리면 유죄, 안 걸리면 무죄란 뜻은 아니다. 

 하버드를 자퇴한 할의 아들은 얼핏 불쌍해 보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의 어머니에게 돌리는 건 역설적이다. 진저와 오기는 할이 잡히지 않았다면 큰돈을 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축적한 돈이 과연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면 그토록 떳떳하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외치는 재스민의 입장이 조금은 이해가 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으로 축적한 부의 혜택을 가장 잘 누리던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망한 후 진저를 찾아가 자신은 남편의 일을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FBI에게 직접 고발한 점, 할과 나누던 투자 이야기를 미루어 볼 때 그녀가 불법적 내막을 몰랐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말이다. 그녀는 인테리어 업자가 될 야심 찬 계획을 세우며 공부를 시작하지만 결국 얼마 안 가 다른 돈 많은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곤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낸다. 자신이 성공한 인테리어 사업가에 딸린 자식도 없다고. 아, 그녀는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선 완벽한 악역이나 선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관객에게 가치 판단을 내리라고 시키지 않는다. 취약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배역들을 통해 그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재스민을 비난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게 우리의 평소 모습이다. 일상의 사소한 교통사고에도 우리는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 우기기 급급하다. 누가 실선을 밟았는지, 유도선을 지키지 않았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나에게 과실 비율이 덜 잡히는 것뿐이니까.

혼잣말하는 재스민을 뒤로하고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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