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스트 듀얼(2021)>
리들리 스콧의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라스트 듀얼>은 제목만 보면 액션 신이 즐비할 것 같지만, 이야기는 결투 자체 보단 결투로 가게 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 결투라는 재판 시스템은 현대에는 생소하기 그지없다.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물리적인 힘겨루기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고, 그 결과를 신의 뜻이라 칭하는 것 또한 굉장히 무책임하게 들린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과학수사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에 재판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공감이 된다. 완전히 상반된 두 주장에 달리 무슨 수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까. 오직 말 뿐인 증거만 갖고 말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라스트 듀얼은 하나의 사건을 세 당사자의 시선으로 각각 다르게 보여준다. 장 드 카루주, 자크 르 그리, 그리고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 카루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은 같은 이야기지만 서로의 해석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점이 존재한다. 진실을 쉬이 판가름할 수 없던 시대에, 관객들은 마치 cctv를 확인하듯 현장을 확인할 특혜를 누리게 된다.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한다는 말에 벌써부터 지루함이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부각하고 불리한 부분은 순화하거나 아예 생략하여 보여주는 인간 본성의 간사함을 지켜보는 재미는 생각보다 쏠쏠하다.
하나의 예로, 카로주가 그의 아내를 추궁하는 장면은 카로주의 이야기에선 꽤나 자상하고 부드럽게 보이지만, 마르그리트의 이야기에선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었음이 드러난다. 관계에선 작은 제스처나 표정, 미묘한 분위기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완전히 달라지곤 한다.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를 떠나 객관적인 입장으로 이를 바라보는 건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진다.
중세시대 여성의 가치
현대에 이르러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 한들, 여전히 많은 성범죄가 암묵적으로 용인되거나 처벌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경우가 존재한다. 여성에게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도 이럴진대, 중세시대에 여성 인권이 얼마나 끔찍한 돼지우리에 처박혀 있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자신의 아내를 범한 죄로 자크를 고소하는 장은 왕에게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했다고 호소한다. 게다가 좀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마르그리트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을 병든 가축을 바라보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성폭행 사실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남편은 상처 입은 자신의 자존심 이외에는 관심이 없고, 시어머니는 심지어 남편을 생각했으면 강간을 당하고도 밝히지 말았어야 한다는 망언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진실은 어디에
장과 자크의 관점에서 바라본 진실을 들은 뒤, 관객들은 식도가 뻑뻑한 고구마로 꽉 막힌 듯한 기분에 빠진다. 마지막 마르그리트의 시점에 이르렀을 때, ‘마르그리트가 주장하는 진실’이라는 타이틀에서 ‘진실’이라는 단어만 남은 채 페이드 아웃된다. 사실 그녀의 시점으로 바라본 이야기에서 사건의 큰 갈래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들이 나름의 판단을 내리기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투 장면에서, 사실 승자를 비롯한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밝혀진 사건의 전말에서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 따위는 ‘알게 뭐야.’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나름의 결과를 성취한 마르그리트의 표정은 그다지 후련해 보이지 않는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참아야만 했다고 말한 그녀의 시어머니는 단순히 감수성 부족으로 그런 망언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젊은 날 강간의 피해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르그리트가 이를 숨겼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상황은 마르그리트에게 호락호락하게 풀리지 않았다. 목숨은 부지하였을 지라도, 야만스러웠던 재판 과정엔 그 어떠한 정의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진실 자체보단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지와 이길 가능성이 더욱 중요하다. 완전히 객관적이고 완벽한 진실이란 어쩌면 전설에나 존재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