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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Oct 27. 2016

<터널> 리뷰

무너진 것은 터널이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

 <널>은 일반적인 재난영화와는 궤를 달리한다. 기존의 재난영화는 재난 이전의 상황과 개인들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이를 재난이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모습을 스펙터클하게 연출해낸다. 하지만 <터널>은 간결하다. 영화 5분 30초부터 터널이 무너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수(주인공 役)의 선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물 행동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또한 소품의 활용도 생수 두병, 케이크, 손전등만으로 간결하게 이루어진다. 과감하게 재난영화의 공식을 배제한 영화 <널>은 터널을 매개로 터널 내부에서 이뤄지는 이정수의 사투와 터널 외부에서 이뤄지는 시스템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심플하면서도 핵심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절규는 자본의 논리 앞에 소리없이 부숴진다

 “이정수 씨는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자꾸 그걸 까먹는 것 같아서... 지금 저기 사람이 갇혀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구조대원의 대사는 한국 사회에 직구를 던진다. 이러한 명제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영화는 터널 안에 또 다른 생존자인 ‘민아’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민아는 정수에게 구조에 필요한 물과 전화를 요구하는데 이정수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를 고민하는 정수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내지만 고민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영화에서 경제논리를 떠나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을 구해야 한다는 논조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정수가 타인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민아’의 등장은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이렇듯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엄숙하고도 치열한 재난영화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널>은 묵직하면서도 코믹한 장르가 공존하는 보기 드문 영화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명제는 현재 한국사회를 직설적으로 겨냥한다. 영화 초반 이정수가 터널에 갇힌 직후 119에 전화를 걸자 귀찮은 듯 전화를 다른 부서로 넘기고 조난자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들을 요구하는 모습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 또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점 또한 일치한다. 이후 영화가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정부의 보여주기 식 대응 △언론의 특종 집착 △시공업체의 무책임한 건설로 인한 피해는 영화가 사회를 완벽하게 투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인간이 터널 속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경제 논리에 귀속된 사회의 여러 집단은 경제적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구조를 중단시킨다. 이정수의 아내가 결국 국가의 반강제적인 요구에 떠밀리듯 구조 중단에 서명을 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한다.

 이정수가 처한 상황은 현실이었지만 이정수의 구출은 영화였다. 현실에서라면 이정수는 죽을 운명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전원 구조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던 세월호의 경우를 상기시켜주고 영화에서나마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조해낸다. 한국 사회의 응어리진 비극을 희극으로 씻겨주는 셈이다. 또한 이정수의 구출 이후 구조대원이 기자, 정부 관료 등을 향해 “꺼져 이 개 X 끼들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관객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준다. <널>은 패트리시아 리건 감독의 <33>과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캐스트 어웨이>를 한국의 정서로 소화해낸 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평론가들 그리고 일반 관객들이 <널>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삼풍백화점’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그 당시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슬픈 반증일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무너진 것은 터널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예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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