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vie Street Oct 07. 2019

[부산국제영화제 특집 리뷰] 올렉

세계와 영화는 이주노동자들의 비극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듀서에게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도 놀랍지 않았다. 놀라움 대신, 안타까움이 쏜살 같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도달했다. 벨기에에서 전개되는 라트비아 출신 이주노동자 '올렉'의 고군분투기는 로드 무비보다 서바이벌 무비에 가깝다. 이때의 생존은 '추상적 대상으로부터의 고난'과 같은 어쭙잖은 은유가 아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자체다.

 도축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올렉이 일련의 사건으로 해고를 당하고 길거리에 나앉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서 그가 처할 고난을 유추하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청해온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올렉이 이주노동자라는 약점으로 말미암아 착취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예상대로 알렉은 안드레이라는 직업 중개인에게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을 빌미로 잡혀 임금 착취, 폭력, 범죄 가담과 같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사회적, 경제적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올렉은 스스로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유리스 쿠르시에티스 감독은 올렉이 안드레이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와 같은 패턴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부당함을 알면서도 어째서 자발적으로 착취의 늪에 빠지고야 마는지 명징하게 알 수 있는데 이는 기존 동일 장르 영화들의 화법들과 별반 다른 바가 없어 독창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현실을 재학습하는 차원에서 머무른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올렉>은 감정 표현과 상징화 구축의 차원에 전반적으로 두 가지 스타일을 고수한다. 감정 표현의 차원에서는 핸드 헬드 촬영(Hand-held camera: 카메라를 고정 도구 사용 없이 손으로 직접 들고 촬영하는 기법)을 사용해 올렉의 모습도, 올렉이 보는 세상의 모습도 흔들리는 모습으로 담아낸다. 따라서 관객은 스크린 전체에서 올렉의 불안감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핸드 헬드 촬영 기법은 고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유리스 쿠르시에티스 감독은 그러한 방법으로 올렉의 내적, 외적 불안감을 호소한다. 

 상징화 구축의 차원에서는 올렉의 불안감이 극한에 다다를 때마다 물속에 있는 올렉이 수면이 전부 얼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씬을 삽입해 그의 상황을 상징화한다. 물과 관련된 또 다른 씬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드레이는 올렉이 자신의 명령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살얼음이 언 드럼통에 올렉의 머리를 밀어 넣는다. 올렉은 물속에 있든, 물 밖에 있든 자력으로는 자신이 물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물은 '절망적 상황'에 대한 단 하나의 직유인 셈이다.

 올렉이 기적적으로 안드레이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순간 역시도 물에 대한 직유를 통해 매듭지어진다. 지금껏 환상 속에서 물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면을 두드려만 왔던 올렉은 현실 속에서 라트비아의 예식에 따라 물속에서 옷을 벗고 빠져나와 의식을 치른다.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던 올렉이 끝끝내 자력으로 절망적 상황을 뚫고 나온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와 같은 연출은 상투적이지만 수미상관의 차원에서는 꽤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올렉이 절망적 상황에서 헤엄쳐 나오는 과정이 석연치 못하다.  

      

올렉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올렉은 안드레이가 구속됨으로써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빈약하게 다뤄진다. 올렉을 절망적 상황에 몰아넣은 착취는 단 몇 분 만의 상황 설정으로 순식간에 일단락된다. 올렉이 안드레이로부터 벗어나는 상황과 올렉이 자력으로 물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연출에 관객이 납득할 수 있을만한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올렉의 감정과 생각을 조금 더 깊게 다뤄야 하지 않았을까. 실화 속 사건이 우발적이라고 해서 영화 속 사건마저 우발적이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 않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속, 기우의 대사처럼 <올렉>은 이처럼 '굉장히 상징적'이다. 안드레이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가던 중 발견한 사슴을 사냥하고 '불법체류자'라 부르는 상황 역시 그렇다. 아이러니한 건 '불법체류자'라 불린 사슴의 살과 뼈를 손질하는 사람이 불법체류자인 올렉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굉장히 상징적인데 사회 속에서 가장 약자라고 불릴 수 있는 이들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해쳐야만 하는 현실을 곧이곧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 역시, 그렇다.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올렉>은 굉장히 상징적이었으나 만연하는 상징들을 지탱하기에는 영화 속 현실의 이야기에 서사적 단단함이 부족하다. <올렉>은 다뤄야만 하는, 그래서 보다 많은 영화인들이 관심을 갖고 직시해야만 하는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뤄야만 하는 사회적 소재를 다뤘다고 해서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일 장르 영화들에 비해 매력적인 화법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응원하고자 한다. 비극적인 사건을 겪어야 했던 올렉에게 진심으로 유감을 표한다. 이제라도 행복하길. 


*<올렉> 칼럼 의미 있게 읽으셨나요? 이와 같은 비극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좋아요'와 '구독' 눌러주시면 보다 좋은 영화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하단에 제가 <올렉> 프로듀서에게 질의한 내용 있습니다.  


2019.10.05.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올렉> GV.

Movie Street: 영화 의미 있게 잘 봤다. 감사하다. 결말 직전을 제외하고 영화 속에서 물에 대한 두 가지 상황이 등장하지 않나. 첫 번째 상황으로는 올렉이 수면이 얼어버린 상태에서 물속에서 얼어버린 수면을 두드려 보지만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있고, 두 번째 상황으로는 안드레이에 의해 올렉이 물이 가득 찬 드럼통에 머리가 잠기게 되는 상황이 있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물은 절망적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올렉의 깊은 무력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결말에서는 올렉이 수면의 얼음을 깨고 수면 밖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결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을 함의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걸까.


*보다 원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의역했습니다.


<올렉> 프로듀서: 그 판단이 맞다. 그건(물속) 우리가 직면한 개인적 어려움일 수도 있다. 중간중간에 삽입됐던 올렉의 수중 씬은 내면적으로 너무 어렵고 힘들었던 올렉의 내면 상태를 표현한 거다. 결말은 올렉이 그러한 내면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결말을 통해서는 '이러한 어려움은 언제나 항상 있겠지만 우리는 일어날 힘을 찾아야 하고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조금은 희망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말에 등장하는 의식은 라트비아 전통 종교와 관련이 있는데 그러한 의식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여리기만 했던 올렉이 강인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성장의 의미를 담아내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산국제영화제 특집 리뷰] 리오네 사니타의 대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